의주부 승격

사편(史片) 2008. 4. 22. 16:34 Posted by 아현(我峴)
상(上)이 정원에 전교하기를,
"나는 지금 이 도(평안도)를 떠나는데, 감사 이원익은 애쓴 공이 있으니, 가자(加資)함이 어떻겠는가? 전일 중화군의 호를 승격하자고 아뢰었었는데 그 일은 매우 신중해야 하므로 허락하지 않았거니와 감사의 의향도 또한 그러한지 알지 못하겠다. 실로 죽음을 각오하고 적을 토벌하는데 변함이 없었다면 이는 곧 충의로운 고을이다. 임금이 이 지역에 도착한 이상, 특별히 포상하는 의식을 거행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의주는 국가를 회복하는데 기반이었으니, 그 주의 호도 또한 승격해야 하는가? 상의하여 아뢰라. 이 밖에도 포상할 일이 또 있는가? 만일 그런 일이 있으면 모두 아뢰라."
하니,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감사 이원익이 직무에 마음을 다한 것은....(중략)....의주는 곧 중흥의 근본지역입니다. 비록 물력이 풍부한 소치라지만 백성들이 위를 섬기는데 독실하여, 공궤(供饋)에 분주하던 노고는 오래도록 생각하려도 속일 수 없습니다. 탕목읍(湯沐邑)의 고사에 따라 부(府)로 특별히 승격하여도 안될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원익은 가자하고, 의주와 중화는 모두 고을 이름을 승격하도록 하라."
(<선조실록> 선조26년(1593) 6월 15일조)

위의 글은 의주가 목(牧)에서 부(府)로 승격된 기사이다. 목은 3품이고 부는 2품이다. 그러나 감사나 병사와 비견된다고 할 수 있으리라. 선조는 의주에 6개월 동안 머물렀다.(1592년 6월 22일에 도착해서 이금해 1월 18일에 떠났다) 아직 군현의 승격이 가지는 실질적인 혜택에 대해서는 공부가 짧아 알 수는 없다. 백성들에게는 공부(貢賦) 같은 것이 줄어든다거나 재결(災結)을 많이 받는다거나 하는 몸에 와 닿는 무엇이 있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품계가 높은 사람이 지방관으로 오면 그 지방민들에게 주어지는 중앙의 명령이 조금이나마 줄어들 것같다는 생각만 잠깐 해 볼 뿐이다. 즉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우리지역 국회의원이 힘이 좀 있고 인지도도 높고 발언권도 있어야 그 지역에 무슨 혜택이라도 돌아가는 양 생각하게 된다는 말이다. 힘이 없는 현감이 있는 지역과 힘이 쎈 부윤이 있는 지역은 그러식으로 차이가 있을 것이다. 어차피 부세(賦稅)는 거의 고정되어 있으니 말이다.

내 논문에서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의주부의 성장은 단지 이때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이전부터 진행되어 오던 것이었으며 선조의 승격조치는 그것이 행정적인 절차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이미 정3품 통정대부로 임명해야 하는 목사직을 자꾸 종2품의 가선대부로 제수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었고, 문무관을 교체해서 부임해야하는 자리인데도 처음에는 거의 무관으로 후일에는 거의 문관으로 차정하는 일이 많아졌다.

또한 다른 노림수도 볼 수 있다. 의주는 6개월동안 선조를 보필한 대가로 부로 승격이 되었지만, 앞으로 사행관련 부분에서 의주는 더 많은 공력을 들여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어 있었다. 외교사신들의 접대비는 물론, 심양이나 북경까지 가는 사행인원도 모두 의주부민들이 책임을 져야했다. 소위 의주쇄마구인(刷馬驅人)들이 그들이다. 실제 기사를 읽어보면 이들이 일으키는 폐단이 부지기수다. 실제로 의주부에서 은자를 지급하여 이들이 북경까지 가는 노자로 보태게 하였지만, 이들은 노자를 다 써버리기 일쑤이고 노략질은 물론 사행물품을 훔치거나 상행위를 벌이고, 심지어는 청인에게 돈을 빌려 나라를 욕되게 하는 일도 벌어졌다. 기사에서는 이를 "나라를 욕보이게 했다"고 표현했다.

의주는 대도시로 성장을 했다. 한성을 제외하고 평양 다음가는 인구를 보유했고, 도회지 인구수는 1만이 넘는 8개도시 중에 하나였다. 의주 도회지 인구는 1만을 조금 넘었다. 그러나 의주인의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을 것이다. 앞으로 내가 공부하려는 것은 바로 이런 조선후기 의주민들의 생활상이다. 잘 드러낼 수 있을지 솔직히 알 수 없다. 단지 노력해보는 것 뿐.

08.04.22. 我峴 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