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엔 왜 금속화폐가 없었을까

사편(史片) 2008. 4. 21. 14:15 Posted by 아현(我峴)
박노자, <신라엔 왜 금속화폐가 없었을까>, [한겨레21] 707호, 2008.04.29

* 문제제기는 아주 명쾌하다. 당시 다른 국가에는 다 존재하던 금속화폐가 왜 신라에는 존재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 글은 시작한다. 금속을 그렇게 잘다루고 일본의 수출품에서 금과 은은 거의 빠지지 않았다는 배경 속에서 화폐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의아할 수밖에 없다. 경주인근에 동시(東市)와 서시(西市)가 생겨나고 울산에 국제적인 항구가 개설되었다고 하면 뭐하나 독자적인 금속화폐가 존재하지 않았으니 설명이 곤란했다. 그러니 그동안의 고대사 연구에서는 경제발전 속에서 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 그러나 화폐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분명 화폐는 존재하고 있었다. 명도전(明刀錢)같은 중국 화폐가 있지 않은가. 박노자는 그 이유에 대해 몇가지 가설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1. 한반도는 이미 청동기 때부터 중국 중심의 화폐 사용권 안에 있었다는 것. 2. 낙랑중심의 무역네트워크가 위기에 빠진 3세기 초반 이후 중국 동전공급이 어려워지자 가야.신라 지역에서 금속제 현물화폐로 각종 철로 만든 물건이 쓰이기 시작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철전(鐵錢)이라는 것. 3. 국가도 평민들도 굳이 돈을 가질 필요가 없었을 만큼 신라는 직접적 인력 동원과 현물 수취를 중심으로 행정력을 행사했다는 것.

* 내 생각에는 아마도 1번과 3번은 어느정도 그 타당성이 보인다. 민족주의적인 시각에서 독자적인 권역을 설정하다 보니 한사군 문제도 그렇고 특히 낙랑문화권을 조금 무시하는 듯한 경향이 눈에 띄지만 실제로 평양지역유적지도를 보면 고고학적 자료는 낙랑시대 유물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1번 설명의 가능성은 여전히 유효하며 지난 윤선태 선생의 논문을 보면 낙랑의 영역권이 충주지역에 까지 미친다는 가설도 어느정도 설득력을 가진다. 3번의 경우에는 과연 율령체제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작동했는가에 대한 문제를 생각하며 신라촌락문서를 작성할 정도의 행정력이라면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 조선시대에서 무본억말(務本抑末)적인 상업정책이라면 신라시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라 본다. 모든 경제구조를 국가에서 쥐는 형국이라면 말이다. 2번은 좀 고민해봐야 할 문제가 아닐까 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는바가 적어 할 말이 없다.

* 이 글은 화폐가 문제가 아니다. 마지막 문단에서 진정하고 싶은 이야기는 "국가 위주의 사회"가 부끄러운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위대한 문화유산을 국가위주로 만들었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일이 아닌데 말이다. 왜 굳이 그것을 숨기려 하는가. 사실(史實)에 맞게 앞뒤의 이야기를 생각한다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결론인데 말이다.

08.04.21. 我峴 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