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방과 자주 사이에서 2

사편(史片)/근현대사 2009. 5. 19. 00:00 Posted by 아현(我峴)
속방과 자주 사이에서 2

본 내용은 다카하시 오카모토(岡本陸司)의 저서인 <속방과 자주 사이에서>에 나오는 내용의 일부를 번역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대체로 마건충의 자서전을 이용하여 당시의 동북아시아에 대한 정치사를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임오변란에 관한 부분을 올립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국사교과서에 나오는 내용과는 좀 다릅니다.

제3장 마건충과 임오변란

 1882년 7월 23일에 조선의 구식병사들이 정부에 대항하여 대규모의 폭동을 일으켰다. 이른바 임오군란이 발발한 것이다. 그런데 이 폭동이 한창일때 일본인 교관을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기까지에 이르러 단순히 국내의 문제로 끝날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임오변란은 지금까지의 조선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 국제관계사의 범주에 놓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거기에 덧붙여 임오변란에 대한 청조정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여전히 검토해야 할 여지가 남아 있다.
 임오변란은 청조가 조선에 파병하여 대원군을 중국에 붙잡아가고 군대를 진압하고 민씨 정권을 부활시키는데까지 해서야 마무리되었다. 이러한 결과를 더듬어가면 인과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청조의 입장을 자세히 살펴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조일의 관계에 우선이 두어졌다. 청조의 중심 인물인 마건충의 활동은 그 영향이 가장 두드러진다. 이에 마건충의 활동을 추적하면서 사실관계를 확인해보고자 한다.

1) 청군의 파병
 청국정부에 들어온 임오군란의 제1보는 1882년 8월 1일 서리직예총독 장수성에게 도착한 주일공사 黎庶昌의 전보였다. 이것은 외무대보 요시다(吉田淸成)가 여서창을 방문하여 일본은 조선에서 공사관이 습격 당해 공사가 쫓겨났다는 것을 구두로 통지한 것이 본국에 들어간 것이다. 군함 3척을 조선에 파견한다는 것이 일본의 의향이었다. 청국측에서는 이미 조일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염두해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공사관 습격을 구실로 군사력을 사용하여 영향력을 증대시키는 것을 두려워해야 할 사태에까지 빠질지도 모른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청측은 임오변란을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여서창과 장수성은 군함 파견을 찬성하였다. 이에 따라 마건충을 함께 동행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장수성은 일본의 구체적인 목적을 몰랐기 때문에 마건충에게는 그냥 觀變이라는 막연한 임무를 맡겼다. 그들은 어윤중과 동행하여 인천에 도착했다. 여서창의 전보에 일본이 육군을 파견한다는 내용이 있어서 총리아문도 육군파견에 대한 요청을 재가하였다. 그러나 내란의 주모자가 대원군이라고 판명되자 난당의 진압을 육군파견의 목적으로 추가했다.
 이상을 정리하면 ① 마건충을 군함 3척과 함께 파견하고 ② 총리아문의 요청으로 육군파견을 결정하고 또 새삼스럽게 ③ 그 목적에 조선의 난당 진압이 더해졌다. ①은 일본의 군함파견에 대응하는 것과 정세파악에 지나지 않았다. ②는 일본이 육군을 파견한다고 해서 일본의 군사력 행사 억지에 있었다. 그러나 육군파견이 결정나자마자 내란의 경위가 밝혀지면서 조선정부의 난당 진압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 ③의 결정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중국의 대책에 대해서 일본정부의 태도를 보지 않으면 안된다. 조선측에서의 일본의 움직임도 물론 그것에 대처하는 마건충의 활동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2) 일본측의 대응
 일본측은 중국에서 마건충을 파견하여 “귀국을 위한 調停”을 시킬 예정이라고 하는 부분에 대해서 조정이라는 것이 도대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의원의장인 야마가다(山縣有朋)가 8월 7일 閣議에서 대충 3가지의 경우를 상정하여 대책을 제안했다. 첫째는 청국이 조선은 속국이라 주장하여 자신들이 조선을 대신할 경우에는 거절할 수밖에 없다는 것. 둘째는 청국이 조일 사이에서 중재를 신청할 경우 국제법상 양국의 수락없이는 불가능한데 일본은 사양한다는 것. 셋째는 청국이 단지 조선의 종래의 관계를 생각하여 충고하기 위한 것이라면 바로 조선과 담판을 짓고 청조의 행동은 무시할 수밖에 없다는 것. 어쨌든 조선은 국제법상 속국이 아니고 독립국으로서 임오군란의 받은 피해의 책임은 직접 조선정부에 묻겠다고 하는 것이 일본측의 입장이었다.
 8월 7일 청측은 입장을 정리하고 일본에 이를 통지하였다. 한마디로 말하면 중국의 파병은 “조선과 일본의 보호”하기 위한 것이고 이것을 보증하는 입장으로 해서 조선은 우리의 속방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이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육군파견의 목적이 의외였기 때문이다. 이노우에는 하나부사에게 훈령하기를, 인천에 도착하자마자 지체말고 서울로 진격하여 점령을 하고 만약 중국인이 서울에 먼저가게 된다면 평화를 이룰 수 없으니 모든 성공여부는 서울에 들어가는 차이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노우에는 청정부의 제3의 조처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지시가 없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에 청측의 통고가 2조처까지만 도착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일본정부가 제3의 조처를 알지 못했다는 사정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이 든다. 일본측에서는 청국측의 난당진압=내정간섭=일청개전이라고 이 비상사태를 정리했다고 보여진다. 이 때문에 제3의 대책을 고려에 넣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역시 본국에서 현지에 대처할 지시를 받지 못한채 하나부사와 마건충이 서로 마주하게 된다는 것이다.

3) 마건충의 觀變 - 8월 10일~8월 12일
 10일 오후에 인천에 들어온 마건충은 그날로 관변의 업무를 시작했다. 우선 어윤중을 불러서 정탐을 의뢰한다. 이때 왕비와 흥인군 이최응 등 중신 5명이 내란으로 죽었다는 등의 내용을 듣게 된다. 다음날에는 일본 서기관 곤도를 만나서 정보를 얻게 되는데 이때 내란의 주모자가 대원군이고 그러한 조선정부의 상황을 처음 알게 되며 아마 국왕조차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 간주하였다. 이에 육군 파견의 필요성을 급하게 느끼고 어윤중의 동의로 단지 관변으로 결정된 자기의 임무를 대원군의 독재를 무너뜨리는데 까지도 할 수 있도록 본국에 공작을 했다. 그의 판단에 따라 제3의 방침으로 결정한 것이다. 곤도의 말에 일본의 무력행사는 없었지만, 난당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위험이 생길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일본의 함대가 한강에 집결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군이 먼저 난당을 진압할 가능성이 두렵고 대항하기 위해서는 어쨌든 원군을 요청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장수성은 원군요청서를 들고 청으로 떠나고 마건충은 하나부사를 기다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건충과 어윤중의 필담을 보면 처음에는 소극적이었다. 어윤중도 마건충의 임무를 잘못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다. 마건충이 조선에 요구한 것은 조정이 아니라 국왕이 자기와 협의할 사자를 보내는 것이었다. 이에 그 사자를 통해 일본과 절충하여 청의 영향력을 키우려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현재 불가능한 것이다. 대원군이 정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이때 개원군의 심복인 조영하와 김홍집이 왔다. 이들은 이미 영국·독일과 조약에서 알고 있던 사이었다. 그는 뜻밖에 난당이 지배하는 정권이긴 하지만, 알던 사람을 중개자로 얻게 되었다. 마건충은 도착 2일이 되지 않은 사이에 이미 청국, 조선, 일본 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4) 마건충의 對日·對朝 교섭 - 8월 12일~8월 16일
 정여창이 떠남과 동시에 하나부사가 도착했다.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던 마건충을 바로 하나부사를 방문하고 그 다음날 하나부사가 답례로 방문하여 2번의 만남이 있었다. 첫 번째 만남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마건충이 겨누고 있는 목표가 확인된다. 대원군의 정권장악을 인정할 수 없고 국왕의 자유를 회복시키겠다는 자신이 만든 목적을 일본측의 입장에 배치 안되도록 제안을 하여 일본의 進軍이 차라리 불리할 수도 있다는 논법을 만들어 일본에게 그것을 말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부사는 마건충의 발언을 어디까지나 일본측의 관심에서 해석하고 있다. 특별히 이 만남으로 일본측의 자세에 눈의 뜨이는 변화는 가져오지 못하였다. 다만 조선측의 대관이 온다면 서울에 가는 것을 잠깐 연기가능하다는 말만 할 뿐이었다. 오히려 마건충의 입장에서 조영하·김홍집과 하나부사와의 사이에서 중재할 자세를 펴고 있었다. 또한 한걸음 더 나아가 대원군 자신이 서울에서 인천으로 나와 일본과 직접 교섭하도록 권하고자 하였다. 그래야 일본의 진군 저지가 가능하다고 설득을 하였다. 서울을 다녀온 조영하가 다시 기한 연기를 요구하자 하나부사는 이를 승낙하지 않고 다음날 아침 서울로 향해 출발하였다. 마건충은 이미 하나부사의 서한을 받기 전에 대원군 본인이 인천에 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신의 시도는 일단 단념하고 새로운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하든 본국으로부터의 원군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주목되는 점은 바로 이 시점에서 조영하의 무리들이 마건충과 대원군 사이를 갈팡질팡 하다가 결국 마건충의 대리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청·조선 사이에 관한 임오변란의 수습의 구도는 여기서 결정되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그러나 여전히 마건충에게는 일본이 서울에 가서 무엇을 할 것인지가 의문이었다.
 그런데 16일 밤 일본외무 서기관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가 나타났다. 그는 입경하는 하나부사와 갈라져 복명하기 위해 귀국길에 방문한 것이다. 이때 마건충은 일본이 무엇을 구하러 서울에 진군하는지, 진군하여 무엇을 하는지 물었고, 다케조에는 일본측의 이도를 설명하며 진군에 대한 청측의 의심을 풀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런 대화 중에 마건충은 현실의 일본의 목적, 청일간의 쟁점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으로 이 대화의 의미가 있다. 두 나라가 난당 진압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대원군 정권을 시인하는가에 청일간의 쟁점이 있었다는 것이다.

5) 淸日의 入京과 대원군납치 - 8월 16일~8월 27일
 입경하게된 하나부사는 간신히 국왕을 알현하여 요구서를 전달하고 대원군을 방문하여 실질적인 교섭에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조선정부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조선정부가 교섭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 다음날 서울을 떠나 인천에 머물러 최후통첩을 내밀고 조선의 대응을 기다렸다. 반면 마건충은 거꾸로 출발이 늦은 것을 만회하고 있었다. 하나부사가 요구서를 제출할 시점에 청군이 도착하였다. 이때 마건충은 대원군이 일본측에 기한 연장을 청한 것은 그가 도착하기까지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23일 서울을 도착할 시점에 하나부사가 교섭결렬도 불사한다는 계획도 알고 있었다. 이에 마건충은 24일에 인천으로 급히 되돌아가서 하나부사와 회담을 하였다. 그는 필담에서 자국군대의 도착을 언급하고 청일개전이라는 서로의 걱정을 감추고 처음으로 그 목적이 난당의 처벌에 있다고 명확히 말하였다. 하나부사는 이것에는 알았다고 회답을 하는 한편 다음날 필담에서 청조에 의한 조선의 내정, 변혁에는 반대하고 있다. 하나부사는 이 회담에 대한 후일의 기록으로 “국난의 정리”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는 난당의 징벌과 내정의 개혁을 변별하여 전자에 마건충 발언의 의미를 두고 있는 듯한 양상도 보인다. 결과적으로 객관적으로 보면 입경하기 전과 비교해 보면 마건충의 열세만회는 명백해 보인다. 그의 주장은 변경할 필요가 없으며 일본측에 동조를 강요하는 일까지도 가능하게 되었다. 일본측도 자신이 꺼낸 교섭을 조선정부가 끊어버렸기 때문에 그 태도가 변하게 되면 조선에 무력행사에 대한 정당성도 근거를 잃을 뿐 아니라 교섭재개도 할 수 없었다. 또한 청조측에서는 국왕의 복권과 조선정부의 태도를 고치는 것이 의미가 있다면 적어도 청일간의 타협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아무튼 마건충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회담의 목적은 결국 일본이 무력에 호소할 가능성이 남아있기 때문에 사후에 불만이 나오지 않도록 하는 조치였다. 이런식으로 생각이 이어가면 마건충이 다음날 바로 대원군을 납치하고 바로 조선정부가 이유원과 김홍집을 인천으로 파견하여 하나부사와 교섭을 시켰는지 이해할 수 있다. 마건충은 속으로 이미 조청 사이에 대원군의 배제와 조일 사이의 교섭 재개가 불가분으로 연결지어 있었으므로 이 두가지 사실은 절대로 별개의 사건이 아니고 오히려 표리일체라고 하였다. 또한 하나부사의 입장에서는 조선의 교섭 속결과 청국과의 충돌 회피가 처음부터의 임무였기 때문에 좌우간에 조선정부와 직접 교섭이 되어가는 가운데서 타결하는 것이 좋았다. 그렇지 않으면 청국이 군대를 입경한 이상, 간섭은 시간이 갈수록 깊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측도 불만을 남기면서 결과적으로는 마건충의 조치를 묵인하는 꼴이 되었다.

제물포조약과 마건충의 퇴장
 마건충은 조영하와의 재회, 일본측과 대원군의 교섭이 매끄럽지 못하여 하나부사가 서울로부터 물러가는 등 그 자신은 관련이 없는 정말로 우연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단편적인 사건들을 연결시켜 맞추어 가면서 조선에 대한 일본의 무력행사를 회피하고 청을 오나전히 개입시키지 않으려는 조선과 일본과의 직접 교섭을 미연에 저지시키기까지 하여 겨우겨우 자신이 향하고자 했던 목적지에 다다르게 되었다. 대원군을 납치하고 난당을 토벌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또 어윤중, 조영하를 통하여 국왕과 정부를 장악한 일이야 말로 중요하고 커다란 사건이었다.
 그의 행동을 평가한다면 골고루 살펴보아야 한다. 그는 결국 일본에게는 대립을 표면화시키지 않고 평화주의를 취하면서 조선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내정간섭을 착수하였다. 이렇게 한 행동 자체는 그 스스로 정의를 부여한 屬國自主에서 나왔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먼저 평화주의로 일본과 타협하여두고 조선에게는 자주로서 하여 조선에게 사실상 내정간섭을 실시하는 것은 바로 청국의 속국으로서 한 행동인 것이다. 그때까지 조선의 독립 자주를 당연시 해온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마건충은 대강 모순되지 않는 두 가지 사실을 동시에 잘 해치웠다고 할 수 있다.
 제물포 조약을 다른 것은 다 저지하고 배상금 50만원으로 마무리한 마건창은 9월 4일 조선을 떠났다. 그러나 오장경의 부하인 장경과 원세개가 입을 모아 그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비판의 시작은 바로 그 배상금에 있었다. 이는 결국 그를 비호하던 이홍장의 비판으로까지 발전하는데, 이는 이홍장의 조선정책 자체가 비판받는데에 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는 결국 체면이 깎이지 않게 다른 부서로 돌려지는 것으로 마무리 되고 더 이상 조선땅을 밟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 조청관계에서 그가 남긴 영향은 모두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조선문제에서 멀어지기 전에 대충 정리했던 조청수륙무역장정같은 것이 바로 대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