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류대학사
17세기 초반을 전후하여 조선사상계는 다양한 사상 조류들이 존재했고 지역적으로도 다양한 편차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서울지역이었으며, 서울은 학문적으로 나름대로 다른 지역과 다른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소위 "침류대학사"로 불리는 문장가, 사상가들의 서울 한가운데에 있는 침류대를 중심으로 한 활동입니다. 침류대학사들은 생활기반이 반드시 서울이나 서울근교는 아니었으나 나름대로 지역성을 가지고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가지고 있었던 학문경향도 이이학파나 이황학파의 주자성리학과는 다른 면을 보이고 있습니다. 즉 이단에 대해서 덜 엄격했다든지, 박학적이라든지, 문장을 중시하는 등 새로운 경향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침류대는 유희경이 창덕궁 서쪽 정업원 부근 후미지고 산에 가까운 곳에 복숭아나무와 살구나무, 버드나무 등을 몇 그루를 심고 돌을 쌓아 조그마한 대를 만들어 살면서 붙인 이름입니다. 그러나 침류대는 17세기 후반에 이미 도총부 자리로 편입되어 사라져버리고 소나무 하나만 그 자리에 남아있는 것으로 전해옵니다. 그러므로 현재 정확한 위치는 모르는 상황입니다. 다만 침류대가 세워졌을 당시에는 창덕궁 밖에 있었던 것이 틀림없으나 뒤에 가서는 창덕궁 안으로 편입된 듯합니다.
침류대학사는 침류대의 주인인 유희경을 중심으로 하여 크게 세 집단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선 유희경과 침류대 이전부터 친분을 맺어왔던 인물들로 이수광, 유몽인, 조우인, 김현성, 임숙영, 신흠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침류대 활동을 통하여 유희경과 가까워졌던 인물로 침류대가 사람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1612년이후부터 유희경과 침류대를 중심으로 활동한 사람들입니다. 이에는 유영길, 신익성, 신응시, 홍우경, 이식, 이민구, 이정구, 이준, 등이 있습니다. 셋째는 인조반정을 전후하여 관계를 맺은 사람들로 <시속록>에 나와있는 인물입니다. 이에는 이소한, 한흥일, 이경직, 홍서봉, 최명길, 장유, 김상헌, 이명한, 심지원, 정온, 윤방, 한준겸, 정경세, 남이공 등이 있습니다.
이들 중 침류대학사의 활동과 성격이 가장 잘 드러나는 집단은 첫번째 집단과 두번째 집단입니다. 첫번째 집단은 대체로 문학 뿐만 아니라 예학, 경학, 잡학 등 다른 분야에도 조예가 깊고, 불교나 도교, 양명학 등 성리학 이외의 학문에 관심이 많던 부류와 시서화에 능하고 특히 문장과 시에 능한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이 두 경우의 대부분이 서울이나 경기지방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으며, 다른 지역이라고 하더라도 서울에 와서 살았던 기간이 비교적 길었던 데에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대체로 서인과 행동을 같이하는 행로를 보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두번째 집단에서도 큰 차이없이 나타납니다.
선조대에 들어오면 문학계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진한의 고문과 당시에 대한 관심의 증대가 바로 그것입니다. 선조 이전까지는 주로 남북조시대의 사륙병려문과 송시의 영향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삼당시인과 팔문장같은 사람들이 중국에서의 고문부흥운동을 주도하게 되고 이것은 결국 침류대학사에게로 이어지게 됩니다. 특히 유희경과 백대붕을 중심으로 한 서류들의 문학 모임이었던 풍월향도는 17세기초 유희경이 사대부와 함께 침류대활동을 하기 이전인 16세기 후반부터 침류대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해왔었습니다. 문학 뿐만 아니라 성리학, 예학 등 여러 방면에서 서류, 천얼 등의 활동이 활발하였으며, 당시 사대부들도 사족이 아니라도 학덕과 재능이 있는 사람은 가서 배우거나 서로 교류하며 천예시하지 않았습니다.
침류대학사들의 특성을 구분하여 볼 수 있는데, 첫번째 집단의 학문적 특징이 16세기후반~17세기 초반 삼교회통, 박학, 잡학적이며 특히 역학을 강조하고 상공업적 방법을 중시했던 서경덕 계열의 학문 경향을 계승하였거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면, 둘째 집단에 가면 박학이나 삼교회통적 성격이 약화되고 사회경제개혁론은 주자학적 원칙 안에서 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는 실제 문장에서의 변화와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쨋든 침류대학사들의 활동 속에서 나타나는 사상적인 흐름은 16세기후반에서 17세기초반 사회경제 어려움을 해결하려는 하나의 방법으로 제시되었으며 이것은 기존의 비정통주자학적인 방법을 계승하는 것이리도 하였습니다. 또한 이러한 흐름의 형성에는 서울이라는 지역적 특성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서울은 당시의 국제변동과 신문화의 영향을 향촌사회보다 더 직접적으로 받았으며, 그러므로 정통 성리학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지도 다른 지방보다 많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출처 : 고영진, 16세기후반~17세기전반 서울 침류대학사의 활동과 그 의의, <서울학연구> 3, 1997.
아현.
17세기 초반을 전후하여 조선사상계는 다양한 사상 조류들이 존재했고 지역적으로도 다양한 편차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서울지역이었으며, 서울은 학문적으로 나름대로 다른 지역과 다른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소위 "침류대학사"로 불리는 문장가, 사상가들의 서울 한가운데에 있는 침류대를 중심으로 한 활동입니다. 침류대학사들은 생활기반이 반드시 서울이나 서울근교는 아니었으나 나름대로 지역성을 가지고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가지고 있었던 학문경향도 이이학파나 이황학파의 주자성리학과는 다른 면을 보이고 있습니다. 즉 이단에 대해서 덜 엄격했다든지, 박학적이라든지, 문장을 중시하는 등 새로운 경향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침류대는 유희경이 창덕궁 서쪽 정업원 부근 후미지고 산에 가까운 곳에 복숭아나무와 살구나무, 버드나무 등을 몇 그루를 심고 돌을 쌓아 조그마한 대를 만들어 살면서 붙인 이름입니다. 그러나 침류대는 17세기 후반에 이미 도총부 자리로 편입되어 사라져버리고 소나무 하나만 그 자리에 남아있는 것으로 전해옵니다. 그러므로 현재 정확한 위치는 모르는 상황입니다. 다만 침류대가 세워졌을 당시에는 창덕궁 밖에 있었던 것이 틀림없으나 뒤에 가서는 창덕궁 안으로 편입된 듯합니다.
침류대학사는 침류대의 주인인 유희경을 중심으로 하여 크게 세 집단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선 유희경과 침류대 이전부터 친분을 맺어왔던 인물들로 이수광, 유몽인, 조우인, 김현성, 임숙영, 신흠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침류대 활동을 통하여 유희경과 가까워졌던 인물로 침류대가 사람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1612년이후부터 유희경과 침류대를 중심으로 활동한 사람들입니다. 이에는 유영길, 신익성, 신응시, 홍우경, 이식, 이민구, 이정구, 이준, 등이 있습니다. 셋째는 인조반정을 전후하여 관계를 맺은 사람들로 <시속록>에 나와있는 인물입니다. 이에는 이소한, 한흥일, 이경직, 홍서봉, 최명길, 장유, 김상헌, 이명한, 심지원, 정온, 윤방, 한준겸, 정경세, 남이공 등이 있습니다.
이들 중 침류대학사의 활동과 성격이 가장 잘 드러나는 집단은 첫번째 집단과 두번째 집단입니다. 첫번째 집단은 대체로 문학 뿐만 아니라 예학, 경학, 잡학 등 다른 분야에도 조예가 깊고, 불교나 도교, 양명학 등 성리학 이외의 학문에 관심이 많던 부류와 시서화에 능하고 특히 문장과 시에 능한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이 두 경우의 대부분이 서울이나 경기지방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으며, 다른 지역이라고 하더라도 서울에 와서 살았던 기간이 비교적 길었던 데에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대체로 서인과 행동을 같이하는 행로를 보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두번째 집단에서도 큰 차이없이 나타납니다.
선조대에 들어오면 문학계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진한의 고문과 당시에 대한 관심의 증대가 바로 그것입니다. 선조 이전까지는 주로 남북조시대의 사륙병려문과 송시의 영향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삼당시인과 팔문장같은 사람들이 중국에서의 고문부흥운동을 주도하게 되고 이것은 결국 침류대학사에게로 이어지게 됩니다. 특히 유희경과 백대붕을 중심으로 한 서류들의 문학 모임이었던 풍월향도는 17세기초 유희경이 사대부와 함께 침류대활동을 하기 이전인 16세기 후반부터 침류대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해왔었습니다. 문학 뿐만 아니라 성리학, 예학 등 여러 방면에서 서류, 천얼 등의 활동이 활발하였으며, 당시 사대부들도 사족이 아니라도 학덕과 재능이 있는 사람은 가서 배우거나 서로 교류하며 천예시하지 않았습니다.
침류대학사들의 특성을 구분하여 볼 수 있는데, 첫번째 집단의 학문적 특징이 16세기후반~17세기 초반 삼교회통, 박학, 잡학적이며 특히 역학을 강조하고 상공업적 방법을 중시했던 서경덕 계열의 학문 경향을 계승하였거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면, 둘째 집단에 가면 박학이나 삼교회통적 성격이 약화되고 사회경제개혁론은 주자학적 원칙 안에서 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는 실제 문장에서의 변화와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쨋든 침류대학사들의 활동 속에서 나타나는 사상적인 흐름은 16세기후반에서 17세기초반 사회경제 어려움을 해결하려는 하나의 방법으로 제시되었으며 이것은 기존의 비정통주자학적인 방법을 계승하는 것이리도 하였습니다. 또한 이러한 흐름의 형성에는 서울이라는 지역적 특성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서울은 당시의 국제변동과 신문화의 영향을 향촌사회보다 더 직접적으로 받았으며, 그러므로 정통 성리학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지도 다른 지방보다 많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출처 : 고영진, 16세기후반~17세기전반 서울 침류대학사의 활동과 그 의의, <서울학연구> 3, 1997.
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