江外記聞(강외기문)

사료(史料)/조선시대 2012. 11. 19. 01:46 Posted by 아현(我峴)

홍양호, <耳溪外集>卷十二, 北塞記畧, 江外記聞(강외기문)

 

寧古塔 在土門江北六百里 虎爾哈河北岸 東濱大海 西接烏喇 南控土門 北踰黑水 土地曠遠 山川環絡 民俗勤儉畏法 長於騎射 以獵爲業 地無市井

영고탑(寧古塔)은 토문강(土門江) 북쪽 600리로 호이합하(虎爾哈河) 북안(北岸)이다. 동쪽으로는 대해(大海)에 가깝고, 서쪽으로는 오라(烏喇)를 접하며 남쪽으로는 토문(土門)을 당기고 북쪽으로는 흑수(黑水)를 넘는다. 토지는 넓고 멀며 산천이 둘러 이어져 있다. 백성들의 풍속은 근검하고 법을 두려워 한다.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고 수렵을 업을 삼는다. 그 지역에서는 사람이 모여사는 곳이 없다.

 

여지도(輿地圖)(奎古 4709-68) 기타 성경여지전도 中 일부

 

 

寧古塔 古肅愼國地 漢晉爲挹婁國地 後魏謂之勿吉 隋曰靺鞨 唐時有粟末靺鞨 大氏於此 置上京龍泉府 國號渤海 其東北屬黑水靺鞨 遼時爲女直諸部地 後建國曰金 於故地 置上京會寧府 及合 懶恤品 胡里改等路 元設軍民萬戶府五 曰桃溫 曰呼里改 曰斡朶憐 曰脫斡憐 曰孛苦江 皆隷合蘭府 水達達等路 明初屬建州毛憐等衛 後屬淸地 名寧古塔 順治十年 設昂邦章京 康煕元年 改鎭守寧古塔等處將軍 十五年 將軍移鎭吉林烏喇城 留副都統等官 鎭守於此

영고탑은 옛날 숙신국(肅愼國)의 땅이다. 한(漢)과 진(晉)나라 때에는 읍루국(挹婁國)이었다. 후위(後魏)는 물길(勿吉)이라고 불렀으며 수(隋)나라는 말갈(靺鞨), 당(唐)나라 때에는 속말말갈(粟末靺鞨)이 있었다. 대씨(大氏)가 이곳에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를 두고 국호를 발해(渤海)라고 하였다. 그 동북쪽은 흑수말갈(黑水靺鞨)에 속하였다. 요(遼)나라 때에는 여진(女直)의 여러 부족의 땅이 되었고 후에 나라를 세워서 금(金)이라 하였다. 옛 땅에 상경회령부(上京會寧府)를 두었다. 及合과 懶恤品과 호리개등로(胡里改等路)에는 원(元)나라는 군민만호부(軍民萬戶府) 5곳을 설치했는데 이름하여 도온(桃溫), 호리개(呼里改), 알타련(斡朶憐), 탈알련(脫斡憐), 패고강(孛苦江)이었다. 모두 합란부(合蘭府)에 예속되었다. 수달달등로(水達達等路)는 명(明)나라 초기에 건주모련등위(建州毛憐等衛)에 속했으나 후에 청(淸)나라의 땅에 속하고 영고탑이라 이름하였다. 순치(順治) 10년(1654년)에 앙방장경(昂邦章京)을 설치했고 강희(康熙) 원년(1662년)에는 진수영고탑등처장군(鎭守寧古塔等處將軍)으로 고쳤다. 15년(1676년)에는 장군이 길림오라성(吉林烏喇城)으로 진(鎭)을 옮기고 부도통(副都統) 등의 관원을 머무르게 하여 이곳에 진수(鎭守)했다.

 

寧古塔 距盛京東北一千三百五十餘里 吉林烏喇東北五百四十餘里 所轄地方 東西三千二百五十餘里 南北一千二百里 西南三百三十里 勒福陳河西岸 有俄多里城 淸遠祖定三姓之亂 肇居於此 國號滿洲者也

영고탑은 성경(盛京)에서 동북(東北) 방향으로 1,350여 리의 거리에 있다. 길림오라에서 동북 방향으로 540여 리의 거리에 있다. 관할하는 지방은 동서(東西)로 3,250여 리이고 남북(南北)으로 1,200리이며, 서남(西南)으로 330리이다. 늑복진하(勒福陳河)의 서안(西岸)에 아다리성(俄多里城)이 있다. 청의 원조(遠祖)가 삼성(三姓)의 난을 평정하고 이곳에서 거주하기 시작하고 나라를 만주(滿洲)라고 불렀다.

 

渾春 在寧古塔東南渾春河左右 其南與朝鮮接界 皆庫雅拉等所居 康煕五十三年 編置佐領設協領 防禦管轄 東至海二百八十里 西至土門江二十里 南至海一百十里 北至佛思恒山一百二十里

혼춘은 영고탑에서 동남 방향으로 혼춘하(渾春河)의 좌우(左右)에 있다. 그 남쪽은 조선과 경계를 접한다. 모든 고아랍(庫雅拉)이 거주한다. 강희 53년(1714, 숙종40)에 좌령(佐領)을 두고 협령(協領), 방어(防禦)를 설치하여 동쪽으로 바다까지 280리, 서쪽으로 토문강까지 20리, 남쪽으로 바다까지 110리, 북쪽으로 불사항산(佛思恒山)까지 120리를 관할했다.

 

吉林烏喇 在寧古塔西南五百四十餘里 置將軍 副都統 協領 佐領等官 寧古塔將軍 又鎭守於此

길림오라(吉林烏喇)는 영고탑에서 서남 방향으로 540여리에 있다. 장군(將軍),부도통(副都統),협령(協領),좌령(佐領) 등의 관원을 두었다. 영고탑장군도 이곳에 진수(鎭守)했다.

 

渾春部落 在慶源江北十餘里 俗呼爲後春 未辨室屋 望見炊煙 皆作煙筒 如六鎭之俗 官府稱曰鄯城 與後春隔一嶺 去慶源七十里 有協領 佐領 防禦等官

혼춘부락(渾春部落)은 경원에서 강북(江北)으로 10여리에 있다. 세속에서는 후춘(後春)이라고 부른다. 실(室)과 옥(屋)을 구분하지 않으며 불 때는 연기를 바라볼 수 있다. 모두 연통(煙筒)을 만드는데 육진(六鎭)의 풍속과 같다. 관부(官府)는 선성(鄯城)이라 칭하며 후춘과 더불어 고개 하나를 두고 있으며 거리는 경원에서 70리이다. 협령(協領),좌령(佐領),방어(防禦) 등의 관원이 있다.

 

* 해동지도(海東地圖) 함경도 경원부 中 일부

 

鄯城後春等地 野廣而土沃 人物輻集 畜牧多牛馬犬豕驢騾羔羊 一如遼瀋 而數十年前 交易往來者 車不過千輛 騎不過四五百 近年則車至四五千輛 騎亦如之 以此推之 人戶大約五六千矣

선성과 후춘 등지는 들이 넓고 토질이 비옥하다. 사람과 물건이 몰려든다. 가축을 기름에 소, 말, 개, 돼지, 나귀, 노새, 양 등이 많은데 하나같이 요동이나 심양과 같다. 그리고 수십년 전에 교역하며 왕래하는 것이 수레가 천여 량을 넘지 않으며 기마는 4~5백을 넘지 않았다. 근래에는 수레가 4~5천 량에 이르고 기마도 또한 그와 같다. 이를 미루어보면 인호(人戶)는 대략 5~6천이다.

 

自後春部落。至興開湖。路出黑龍江西邊。其間多巨邑。而程站道里。並未詳。

후춘부락에서 흥개호(興開湖)까지 길은 흑룡강 서변으로 나오는데 그 사이에 거읍(巨邑)이 많다. 정참(程站)과 도리(道里)는 모두 상세하지 않다.

 

* 지승(地乘) (奎 15423) 기타 조선여진양국경계도 中 일부

 

 

鄯城 西距豆江五里 東距後春江七里 北距後春部落十二里 城則土築 內有六井 亦稱奚關城 北距巨陽城九十里 山上有石城 是爲於羅孫站 其北三十里 有虛乙孫站 其北六十里 有留善站 西距六十里 有先春嶺

선성은 서쪽으로 두강(豆江)과 5리, 동쪽으로 후춘강(後春江)과 7리 떨어져 있다. 북쪽으로 후춘부락과는 12리의 거리이다. 성(城)은 흙으로 쌓았고 내부에는 6곳의 우물이 있다. 또한 해관성(奚關城)이라 칭하는데 북쪽으로 거양성(巨陽城)과 90리 떨어져 있다. 산 위에는 석성(石城)이 있다. 이곳을 어라손참(於羅孫站)으로 삼았는데 그 북쪽 30리에 허을손참(虛乙孫站)이 있고, 그 북쪽 60리에 유선참(留善站)이 있고, 그 서쪽 60리에 선춘령(先春嶺)이 있다.

 

* 팔도지도(八道地圖) (奎古軸 4709-48) 함경북도 中 일부

 

 

 

 

興京 在盛京東南二百七十里 吉林烏喇界 西三十五里 東西二百二十五里 南北二百九十里 明初置建州衛 淸初始祖肇祖 始居於此 名曰黑圖阿喇 三傳至興祖景祖顯祖 皆居於此 至太祖建立盛京 世祖順治五年 以黑圖阿喇 爲興業之地 尊爲興京 設城守章京 守之

흥경(興京)은 성경에서 동남 방향으로 270리, 길림오라의 경계에 있다. 서쪽으로 35리, 동서로 225리, 남북으로 290리이다. 명나라 초에 건주위(建州衛)를 두고 청나라 초에 시조(始祖)와 조조(肇祖)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거주했다. 이름하여 흑도아라(黑圖阿喇)라고 하였다. 3대로 전해져 흥조(興祖), 경조(景祖), 현조(顯祖)까지 모두 이곳에 거주했다. 태조에 이르러 성경을 건립하고 세조 순치 5년(1648, 인조23)에 흑도아라를 흥업지지(興業之地)로 삼고 높여 흥경으로 삼았다. 성수(城守)와 장경(章京)을 설치하여 이곳을 지켰다.

 

* 여지도(輿地圖) (奎古 4709-78) 기타 성경성 중 일부

 

 

所里 三姓 七姓 柳川 後春等邑 在黑龍江內 自愎介至烏喇 爲十三日程

심양 이북에는 신오라(新烏喇), 오모소리(吾毛所里),삼성(三姓),칠성(七姓),류천(柳川),후춘(後春) 등의 읍이 있다. 흑룡강 안에 있으며 팍개(愎介)에서 오라까지 13일 일정이다.

 

自後春至烏喇 爲一千三百里 至寧古塔五百里 至吾毛所里八百里

후춘에서 오라까지 1,300리가 되고 영고탑까지는 500리, 오모소리까지는 800리이다.

 

自會寧 渡江 西八十五里 有廢城址 或是古蕃胡所住也 自此至分界江 爲五里許云

회령에서 강을 건너 서쪽으로 85리에 폐허가 된 성터가 있다. 혹 이곳은 옛 번호(蕃胡)가 거주한 곳이다. 이곳에서 분계강(分界江)까지는 5리쯤이라고 한다.

 

自會寧渡江 西行一百八十五里 至伐加土里江 自江邊西南行四百餘里至烏喇 西北行三百里至寧古塔 西行一百六十里至吾毛所里 皆捷路也

회령에서 강을 건너 서쪽으로 185리를 가면 벌가토리강(伐加土里江)에 이르고, 강변에서 서남으로 행하여 400여리를 행하면 오라에 이르고, 서북으로 300리를 행하면 영고탑에 이르고, 서쪽으로 160리를 행하면 오모소리까지 이른다. 모두 빠른 길이다.

 

* 해동지도 기타 서북피아양계전도 중 일부

 

自北京至山海關 爲七百里 自山海關至瀋陽 爲七百里 自瀋陽至烏喇爲七百里 自烏喇至吾毛所里 爲五百里 自吾毛所里至寧古塔 爲三百里 自寧古塔至後春 爲五百里 合爲三千四百里 騎馬往來 則行四十日 倍道則二十日云

북경에서 산해관까지는 700리이다. 산해관에서 심양까지는 700리이다. 심양에서 오라까지는 700리이다. 오라에서 오모소리까지는 500리이다. 오모소리에서 영고탑까지는 300리이다. 영고탑에서 후춘까지는 500리이다. 합하면 3,400리이다. 기마(騎馬)로 왕래하면 40일이 걸리고 서둘러 길을 재촉하면 20일이라고 한다.

 

自鄯城往烏喇寧古。路出穩城越邊。由鍾城界深北之地。自鄯城距烏喇七日程。涉三漢水。距寧古塔九日程。涉烏龍江云。

선성에서 오라와 영고탑을 가는데 길은 은성(穩城)의 월변(越邊)이 나오며. 종성(鍾城)의 경우하여 심양 북쪽의 땅에 닿는다. 선성에서 오라까지는 7일 정도의 거리이며 삼한수(三漢水)를 건넌다. 영고탑까지는 9일 정도의 거리며 오룡강(烏龍江)을 건넌다고 한다.

 

自會寧至寧古塔路程

鍋底溝六十里 光庇股嶺一百二十里 生格甸子一百二十里 拉西嶺一百十里 寓集口子一百十里 馬連河卡路八十里 合六百里。

회령에서 영고탑까지의 도로 일정

과저구(鍋底溝)까지 60리, 광비고령(光庇股嶺)까지 120리, 생격전자(生格甸子)까지 120리, 랍서령(拉西嶺)까지 110리, 우집구자(寓集口子)까지 110리, 마련하카로(馬連河卡路)까지 80리, 합하여 600리이다.

 

自寧古至烏喇路程

沙嶺站八十里 必爾漢站六十里 搭拉站六十里 蛾眉所站八十里 伊西站四十里 推通站八十里 拉法站七十里 厄阿木站八十里 烏喇九十里 合六百四十里

영고탑에서 오라까지 도로 일정

사령참(沙嶺站)까지 80리, 필이한참(必爾漢站) 60리, 탑랍참(搭拉站)까지 60리, 아미소참(蛾眉所站)까지 80리, 이서참(伊西站)까지 40리, 추통참(推通站)까지 80리, 랍법참(拉法站)까지 70리, 액아목참(厄阿木站)까지 80리, 오라(烏喇)까지 90리, 합하여 640리이다.

 

自會寧至北京三千四百餘里。

영고탑에서 북경까지 3,400여 리이다.

 

自寧古塔至三姓七日程。

영고탑에서 삼성(三姓)까지 7일 일정이다.

 

自後春至紅旗浦十五日程。水行二十日程。

후춘에서 홍기포(紅旗浦)까지 15일 일정이다. 물길로는 20일 일정이다.

 

* 해동지도 기타 서북피아양계전도 중 일부

 

寓率里 登登磯 在寧古塔之後 自三姓至寓率里 登登磯 陸行十五里 水行二十日 皆極險云

우솔리(寓率里)와 등등기(登登磯)는 영고탑 뒤에 있다. 삼성에서 우솔리와 등등기까지는 육로로 15일이며, 수로로 20일 일정이다. 모두 몹시 험하다고 한다.

 

黃山 自撫夷堡東望江外 廑十餘里 圓峰立野中 色黃故名 每春夏之交 山忽騰上半空 作樓臺人馬旗幟之形 風起而滅 俗謂之山遊 蓋其下有大池 產明珠 卽八池之一也

황산(黃山)은 무이보(撫夷堡)에서 동망강(東望江) 밖으로 겨우 10여 리에 있다. 원봉(圓峰)의 벌판 한가운데 서서 색이 누렇다고 하여 이름하였다. 매 봄과 여름 중에 산이 갑자기 공중에 위로 올라 누대와 인마와 기치의 형상을 만들어내다가 바람이 일어 없어진다. 세속에서는 산유(山遊)라고 말한다. 대개 그 아래에는 큰 못이 있는데 명주(明珠)를 생산한다. 곧 팔지(八池)의 하나이다.

 

* 해동지도 함경도 경흥부 중 일부

 

 

八池 在撫夷江外 登西烽臺 望見野中 八池連亘數十里 入豆滿江 有五色蓮 出明珠 名於北方 第三池上有山 曰黑角峰 峰下有村 曰金塘 穆祖舊墅 卽斡東 蕃音烏東 地距慶興府東北三十里也

팔지(八池)는 무이강(撫夷江) 밖에 있다. 서봉대(西烽臺)에 오르면 들 가운데를 바라볼 수 있다. 팔지는 수십리를 길게 뻩쳐 두만강으로 들어간다. 오색련(五色蓮)이 있어서 명주가 나오는데 북방(北方)에서 유명하다. 3번째 못 위에 산이 있어서 흑각봉(黑角峰)이라고 한다. 봉우리 아래 마을이 있는데 금당(金塘)이라 한다. 목조(穆祖)의 옛 별장으로 곧 알동(斡東)이며 번호(番胡)의 소리로는 오동(烏東)이다. 지역은 경흥부에서 동북으로 30리 거리에 있다.

 

* 대동여지도 중 일부

 

 

* 팔도지도(八道地圖) (奎古軸 4709-48) 함경북도 중 일부

 

德林石。在寧古塔城西九十里。通志自俄漠惠池。東遶沙闌站之南。抵虎爾哈河。有大石廣二十餘里。袤百餘里。孔洞大小不可數計。或圓或方。或六隅八隅。如井如盆如池。或口如盂。而中如洞深。或丈許或數尺。中有泉澄然凝碧。或潛鱗游泳。或中生樺楡等木。夏無蚊蝱。麋鹿羣聚於中。名曰德林石。其名義不可解。金人有言曰。白頭山下。石有德林。寶有東珠。人有我太祖。皆地靈所鍾云。

덕림석(德林石)은 영고탑성에서 서쪽으로 90리에 있다....

 

* 마지막 부분은 아직 번역 미완임

 

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