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5년 공의, 사의 논쟁

사편(史片)/조선시대 2009. 5. 18. 23:13 Posted by 아현(我峴)
현종5년 공의, 사의 논쟁

현종에서 숙종 사이에 보면 무수한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그 중에는 단편적으로 끝난 것도 있지만, 수개월에 걸쳐 이루어진 논쟁도 있습니다. 예송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한 논쟁들 중에서 잘 알지 못하지만,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논쟁도 있습니다. 지금 소개하려는 것은 현종 5년에 일어난 공의.사의를 둘러싼 논쟁입니다

현종 5년에 일어났던 조신들 사이의 公義. 私義 논쟁은 그 전 해인 현종 4년 11월 청나라 사신을 맞기 위해 모화관으로 친행하는 왕에 대한 배종을 회피하고자 수찬 김만균이 그 직을 사퇴하려 한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김만균은 그 조모인 연산 서씨(김익희의 모)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점을 들어 私情으로 볼때 원수를 접대하는 일에 도저히 배종할 수 없다고 하여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승정원에 제출한 것입니다. 본래 김만균의 이러한 상소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때 올린 김만균의 진정사직소는 그 선대와는 달리 아무런 배려도 없이 사퇴 또한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서필원이 이를 보고서 그를 비판하는데, 하나는 공무수행을 위해서 사사로운 정의 허용은 부모의 선에서 크쳐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祖孫간은 부자 사이와는 차이가 있다는 것으로 사정보다는 공사의 수행을 우선하고 중시하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서필원의 이야기가 압도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에 불을 붙인 것은 송시열의 상소입니다. 이 문제가 일어나게 된 한달 쯤 뒤인 이듬해 정월, 송시열은 상소를 올려 김만균을 옹호하게 됩니다. 그는 청사를 영접하는 왕을 수행하는 것보다 사적이기는 하나 조모의 복수에 대한 의리를 지켜주는 것이 인심과 천리를 유지하게 하는 의리에 합당한 조치라고 하여 세속적인 군주권보다는 도덕적이고 본원적인 도학에 최고의 가치와 권위를 부여하게 됩니다.

이에 우부승지 김시진과 함경감사 서필원이 반박을 합니다. 김시진은 형제조손간은 부자사이와는 차이가 있으며 사정을 줄이고 공의를 폐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주장했고, 서필원은 국정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서는 사의에 일정한 제한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합니다. 벼슬에 나가기 전에는 사은이 위주이며 공의야 말할 것도 없지만, 이미 벼슬길에 나온 다음에는 당연히 공의를 중시해야 하며 사은은 굽히고 밀리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또한 이단상도 송시열을 배척하게 되는게 그는 송시열이 상소에서 인용한 인명도 틀리고 사실의 내용도 잘못되었다는 것을 밝히면서 사의허용 범위를 조부모에까지 확대하여 송시열의 주장 일부를 수용함으로써 절충적인 자세를 취하지만 공사를 위해 사의를 굽히고 제한하지 않을 수 없다는 서필원의 기본적인 입장을 끝까지 옹호합니다. 여기서 현종의 입장을 보면 공의.사의 문제에 대한 현종의 자세는 처음부터 사의론에 비판적이었습니다.
 
현종은 즉위초의 복제논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송시열 등 산림계가 왕권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고 있었고 왕은 사의론자를 지칭하여 "군상을 우습게 알고 모욕한다(慢侮君上)"든가 "군상을 경시한다(輕視君上)"고 되풀이 비난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최종적인 시비는 유보한채 서필원의 파직으로 서둘러 매듭이 됩니다. 오히려 예송으로 인한 손상에서 회복되어가던 산림계의 정치적 위상에 또 한번의 큰 타격을 안기게 됩니다

출처 : 정만조, "조선 현종조의 사의, 공의 논쟁", <한국학논총> 14, 1991.

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