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 다시보기

사편(史片)/고려시대 2009. 5. 18. 22:56 Posted by 아현(我峴)

삼별초 다시보기

의종 24년(1170)에 일어난 무신정변 이후 고려사회는 혼란과 저항에 직면하게 되고 대외적으로는 침략의 위기에 놓이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신정권의 집권세력은 자신만의 기구를 만들어 지배체제를 강화하게 되고 개인사병을 통하여 이를 유지해 나갑니다. 그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삼별초라는 조직입니다. 삼별초는 대몽항쟁기의 중심적은 군사조직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그동안 삼별초에 대한 평가는 국난극복이라는 측면에서 다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무신들의 호국전통’이나 ‘반정부, 반몽고 투쟁의 용맹스런 활동조직’이라는 수사적인 표현으로 장식되었습니다. 그러나 연구가 진전되면서 이와는 다른 시각에서 삼별초를 바라보는 인식이 나타나게 되었고 본래 고유의 기능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 보고자 합니다.

의종 24년 이후 무신정권은 몇차례의 파동을 겪게 됩니다. 정중부 이후 여러 무인들이 정권을 쟁탈하게 되면서 최충헌대에 이르러 이러한 쟁탈전에서 안전망을 찾고자 하는 노력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바로 사적인 지배수단을 확대하는 것입니다. 최충헌의 교정도감은 대표적인 기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종 18년(1231)에 몽고의 침입으로 이제 무신정권의 권력유지는 고려내의 문제를 벗어나 외적의 침입 대비도 아울러 떠 안게 됩니다. 최씨정권은 몽고와의 첫 번째 대결 이후 강화도로 천도합니다. 최씨정권에게는 이것이 유일한 정권유지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최씨정권의 대몽항쟁은 강화도 안에서의 소극적인 저항이었고 한반도에 남게된 백성들은 국가의 보호없이 대몽항쟁을 하는 이중적인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러므로 최씨정권이 육성하던 삼별초는 결국 백성과는 괴리된 상태가 되는 것이죠.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 이후에 국가의 공적질서는 마비상태가 됩니다. 정규군의 경우에는 거의 유명무실화되었고, 최씨정권의 경우에는 의미가 없어진 정규군 외에 전투에 대비하기 위한 조직이 필요하게 되어 삼별초를 만듭니다. 삼별초는 외적에 대한 방어보다는 중앙정부에 도전하는 세력에 대한 진압이나 치안유지에 힘쓰게 됩니다. 삼별초의 이러한 성격은 대몽항쟁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최씨정권이 강화도로 수도를 옮길 때 삼별초도 같이 강화도로 들어가는데, 강화도에서 장기전을 펼치면서 최씨정권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최씨정권의 사병들은 외적의 침입이라는 국가위기상황에도 최씨정권의 유지 외에는 별로 동원되지 않았던 것이죠.

그럼 왜 삼별초는 ‘무신들의 호국전통’이나 ‘반정부, 반몽고 투쟁의 용맹스런 활동조직’이라고 했을까요. 최씨정권이 몰락하고 김준과 임연에 의해 정권이 유지되면서 당시 국왕이었던 원종은 몽고와 타협하게 되었고, 원종과 몽고는 무인정권을 압박하게 됩니다. 결국 원종은 다시 개경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김준과 임연에 의한 무신정권은 종말을 고하고 맘니다. 무신정권을 유지하는데 동원되었던 삼별초 또한 무신정권의 종말과 더불어 해체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죠. 원종이 적극적으로 삼별초를 혁파하고자 하였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삼별초는 곧 무인정권이었던 것이죠. 삼별초가 이미 기울어져 가던 상황에 대항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자신이 존립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삼별초를 해체시키려던 원종과 몽고에 대항하여 강화도와 진도, 제주도에서 항쟁하였던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반정부, 반몽고에 대한 투쟁은 결국 무신정권 몰락 이후 자신이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행동이었던 것이지, 삼별초가 만들어진 당시부터의 구호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출처 : 신안식, “삼별초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한국 전근대사의 주요 쟁점>, 역사비평사, 2002.

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