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무역에 대한 단상

사편(史片)/고려시대 2009. 5. 1. 11:37 Posted by 아현(我峴)
고려시대 무역에 대한 단상

예성항은 고려 무역의 출발점이자 시작점이었다. 실제 서긍의 기록에 의하면 1123년(인종 1년)에 송나라의 사신을 실은 배가 와서 정박하고 영접한 곳은 예성항이었고, 돌아갈 때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가 멸망한 뒤 국제항구로서의 면모는 사라지고 조선시대에 오면 단지 강을 건너는 작은 나루터로 변하였다. 이에 식민지 사학자들은 이러한 사실에 주목하여 조선왕조가 멸망한 원인은 고립정책이라 판단하고 고려왕조가 문호를 개방하여 여러 나라와 교류했다는 사실로서 예성항의 해상 무역을 주목하게 되었다.
 
식민지 시대에 주목받은 예성항은 해방이후에는 민족사의 복원 차원에서 일련의 연구가 이루어졌다. 고려의 해상무역은 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기술하게 되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중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한편 고려는 대외 무역을 장려했으므로 멀리 아라비아 상인들까지 무역을 하러 고려에 왔다. 예성강 입구의 벽란도는 당시에 국제 무역 항구로서 크게 번성했다. 우리나라가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서방 세계에 처음으로 알려진 것도 고려 왕조의 이러한 개방적인 대외 정책에서 비롯되었다”고 했고,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예성강 어귀의 벽란도는 대외 무역의 발전과 함께 국제 무역항으로 번성했다 .... 한편 대식국인이라고 불리던 아라비아 상인들도 고려에 들어와서 수은, 향료, 산호등을 팔았다. 이들을 통하여 고려의 이름이 서방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했다.
 
이러한 교과서를 보면 고려시대 예성항이 항상 외국 상인들로 붐볐던 국제 항구였으며 고려는 무역의 진흥을 위해 개방적인 대외정책을 취했다고 쉽게 판단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 실상을 면밀히 살펴보면 꼭 그러한 것은 아니다.
 
고려의 해선이 송나라와 교역한 증거로 <송사> 고려전의 기사를 제시하는데 문제는 그들을 상인으로 표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개는 중국에 표착했다는 사실이 대부분을 이루므로 상인으로의 활동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송대 명주지역에서 간행된 <보경사명지>의 기사에서도 상선의 존재를 알려주는 주된 사료로 제시되는데, 명주지방에서는 외국 선박에 대하여 1/15의 입구세(항구에 들어오는 것에 대한 세금)를 징수하고 있었는데, 고려의 상선에 대해서는 1/19의 입구세를 거두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 기사는 오히려 고려의 상선들이 이 지방에 오지 않아서 그 세율을 낮춘 것으로 판단할 수 있는데, 그만큼 송의 명주로 향하는 무역선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고려초에는 바다 건너 무역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종대 이후 최승로는 무역 왕래에 따른 폐단 등을 지적하며 정식 외교 사신 일행의 무역 이외에는 순수 무역을 목적으로 하는 배는 없애자고 하였다. 이러한 최승로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오직 무역만을 위한 중국의 왕래는 사실상 중지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성종대 이후의 고려는 해상활동에 소극적이었다는 지적이 타당할 듯 싶다.
 
11세기 말 대각국사 의천이나 중국에 간 승려들이 고려와 교류를 한 흔적을 보면 대개는 송나라 상인이 중간에서 연락을 주고받는 중간인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무인정권기에도 고려와 송은 양국의 현안문제를 사신파견으로 처리하지 않고 송나라 상인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고려 해상들의 선단운영은 경쟁차원에서 쉽지 않았을 것이다. 고려가 대외무역에 소극적이었던 사실은 요의 각장설치문제에서 잘 드러난다. 각장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양국의 백성들이 필요한 물품을 교역하는 호시장(互市場)을 말하는데 조선시대의 개시(開市)와 같다. 요나라에서는 1086년(선종3년)에 양국의 국경이었던 보주에 시장을 설치하자고 요구하였지만, 고려에서는 요와의 무역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 결국 3년 뒤인 1088년에 스스로 포기하겠다는 공식적인 통보를 하기에 이르렀다. 요나라에서는 3차례나 각장을 설치했음에도 고려에서는 적극적인 의지를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요나라는 각장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었다. 변경무역에 대해 금지한다는 고려의 정책은 1세기가 지난 뒤 금나라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쌀이 부족해진 금나라는 고려에 두 차례에 걸쳐서 쌀의 매매를 요청하였지만, 고려에서는 이를 모두 거절하였다. 물론 일반 백성들의 개인적인 무역도 허용하지 않았다.
 
또한 그동안 아라비아 지역에 있었던 대식국의 상인이 직접 찾아왔다는 점에도 주목하였는데, 여기서 지적되어야 할 것은 아라비아 상인들이 예성항에 와서 무역을 했던 것은 1024년에서 1040년 사이 단 세 차례 뿐 그 이후의 기록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또한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수은, 향료, 산호 등을 팔았다”고 했는데, 고려사에는 “그러한 물품을 바쳤다”고 되어 있으므로 조금 표현이 다르다. 아마 10세기 전반 고려에 온 아라비아 상인들은 송에 무역하러 왔다가 소문을 듣고 예성항에 와서 무역의 허락을 얻기 위해 고려 국왕에게 진귀한 물품을 바친 일로 인해 고려사에 실리게 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 동안에는 활발한 무역으로 이를 해석했던 것이다. 문종대 대외무역에 대해서는 <고려 문종시대 대외무역에 대하여>를 참조.
 
고려시대 예성항은 기본적으로는 조운항이었으며 정기적으로는 송의 상선이 드나들었던 것 이외에 시기에 따라 매우 드물게 일본, 아라비아 등의 무역선도 찾아와 무역한 개방된 항구였다고는 할 수 있어도, 외국의 선박이 물밀 듯이 들어온 항구는 분명 아니었다. 국경지대의 무역은 통제되었고 해상무역은 고려를 찾는 외국상인에게만 개방했을 뿐 기본적인 무역정책은 무역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오히려 예성항은 일반 상인보다는 고려의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 참고문헌 : 이진한, “고려시대 예성항 무역의 실상”, <내일을 여는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