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의 정의

사편(史片)/조선시대 2009. 4. 22. 04:01 Posted by 아현(我峴)
지금까지 양반에 대한 이해는 "18세기 이후 양반층이 급증하기 시작했으며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전체 인구구성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단일 신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지배층인 양반층의 이와 같은 극히 비정상적인 비대는 신분제의 사실상 해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신분제 해체는 18, 19세기 조선사회가 자생적으로 자본주의 사회로 접근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는 중요한 지표로 활용할 수 있다 등등"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이외의 다른 나라 역사의 경우, 서양에서는 2%정도, 중국의 경우 초시 합격자 외 가족을 총망라한 수가 5%내외, 일본의 경우 도쿠가와 시대 사무라이 수치가 6% 남짓이었다고 한다. 조선은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경우가 된다.

첫번째 지배양반되기의 조건으로 호적상에 유학 직역의 등재와 족보를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요즘 호적 관련 연구를 보면, 호적은 당시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필요에 의해 재구성된 부세대장으로서 활용하기 위해 만들어낸 자료라고 한다. 그래서 그 자체만으로는 신분을 파악하기에는 불충분하다는 데에 합의를 보고있는 실정이다. 지역사 연구에서는 호적상에서 직역이 요동치는 현상을 무색케 할 정도로 지역사회를 주도하는 양반층의 지위는 매우 안정적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어김없이 족보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를 목숨 보다도 더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이렇게 첫번째 조건으로 양반은 구성해보면, 상당히 많아진다. 호적상에 유학 기재는 60~70%에 달하고, 요즘 족보없는 집 없다. 이 양반이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바로 그 양반이다. 그러니 양반이 많다고 생각할 수밖에.

두번째 지배양반되기의 조건으로 유교적 의례의 준행과 그 다양한 특권을 들 수 있다  연구대상을 지역차원으로 좁아보면, 지역사회를 주도하는 소수의 지배집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지역사회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소수의 주도종족이 있는가 하면, 지배집단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기는 종족들도 있다. 지배 집단 내부의 家格(가문의 등급)이 서로 달랐다는 것이다. 남원의 예를 들면, 崔盧安李 네 집안을 드는데, 그것은 바로 가격의 순서이다. 崔씨 집 가격이 가장 높고, 盧씨가 그 다음이다. 이와는 달리, 각 도 차원에서 이름있는 집안을 道班이라고 한다. 전라도의 경우 창평의 연일정씨, 장성의 울산김씨, 광주의 행주기씨, 광주의 장흥고씨가 도반에 해당된다. 전라도 어디를 가도 양반이라 인정해주는 집안이다. 그럼 이런 가격이 결정되는 기준은 뭘까. 바로 道學>文章>忠節>宦官의 순서다. 전라도의 경우 울산김씨의 김인후는 도학으로, 행주기씨의 기대승도 도학으로, 연일정씨의 정철은 문장으로, 장흥고씨의 고경명은 충절로 유명한 가문이다. 이는 어느 도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 네가지는 유교적 교양과 지식의 습득, 유교적 가치관의 공유를 전제로 한다. 이것은 바로, 奉祭祀,接賓客으로 표상되는 양반문화에서 나온 것이다. 봉제사는 제사를 행하는 것이고, 접빈객은 손님들을 접대하는 것이다. 양반들이 늘 행하는 의례하고 할 수 있다. 또한 양반들은 그에 대한 다양한 특권이 있는데, 이는 갑오개혁 당시 신분제 철폐를 위한 개혁안을 보면 알수 있는데, 만약에 19세기에 신분제가 무너졌다면, 이러한 개혁안이 나올리 없다.
 
세번째 지배양반되기의 조건으로 문중과 동성촌락의 형성을 들 수 있다. 일제시대의 자료를 보면 전국에 마을은 45000여개 정도인데, 그중 동성촌락은 15000여개이고 이중에 저명한(!) 동성촌락은 1685개 정도 였다고 한다. 이를 班村이라고 한다. 양반들만 사는 동네죠. 당시 저명한 양반들은 자기들끼리 살았다. 그리고 그 주변 마을들을 지배해 나갔다. 향약이라는 것도 자기들이 그 주변 마을을 통제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동성촌락에 살지 않는 양반들은 지배양반이 되지 못했다. 어느 학자는 다음과 같이 정의하길.."유명 선조의 후손으로서, 이름있는 터를 택하여 그것을 중심으로 누대에 걸쳐 세거하면서 양반 가문으로서의 전통을 유지, 강화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정확한 양반정의다.

* 참고문헌: 김성우, "18~19세기 지배양반 되기의 다양한 조건들", <대동문화연구> 49, 2005.

* 사이버조선왕조에서 가산님과 나눈 대화를 적어둔다. 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듯 하다.

최승정 :
강의의 주제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잠곡님께서 진행하는 전체 강의의 주제가 아니라 이번 강의의 주제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양반의 정의를 내리는 것이 강의의 주제인지, 양반의 기준은 이러한데 당신은 이 기준에 일치하는지 생각해보라는 것이 주제인지, 이촌향도 현상으로 반촌은 실질적으로 없어졌다는 것이 주제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도저도 아니면 이걸 포괄적으로 다 말씀하고 계신지요? 후배가 본래 무지한 탓일 수 있겠으나 강의의 주제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딴지를 걸고자 함이 아니라 정말 몰라서 묻는 것입니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우리는 오직 성씨나 본관이 대충 과거 급제자와 정승을 많이 배출한 집안과 일치하면 다 양반이라고 으스대지만, 진짜 양반은 말 그대로 소수의 명문가일 뿐이지요. 김해 김씨 중에도 백정이 있었고 반남 박씨 중에도 천민이 있었으니 단지 김해 김씨, 반남 박씨라고 다 양반이 아니지요. 진짜 양반은 김상헌의 후손인 장동 김씨, 정유길의 후손인 회동 정씨 등 이런 집안을 이르는 말이지요. 본래 양반은 정말 소수의 명문가에게만 붙이는 말이었으나 조선 후기로 오면 그냥 중인 이상, 왠만큼 자족한 생활을 하는 사람, 명문가와 동성동본인 사람이면 다 양반으로 칭해지는 것 같습니다. 마치 본래 고관대작을 일컫던 대감, 영감이라는 표현이 시간이 흐르면서 일반 노인들에게 붙여진 것 처럼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조선 후기 전국민 60%이상은 양반이었다."는 말은 역사적 왜곡도 아니고 미화도 아니고, 사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 "양반"이라는 말은 소수의 명문가 양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중인 이상, 왠만큼 자족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 명문가와 동성동본인 사람을 다 합쳐서 계산한 수치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렇게 본다면 "조선 후기 전국민 60% 이상은 양반이었다."는 말은 틀린것이 아닌 셈이지요. 조선 후기 쯤이면 그 정도 부류의 사람들은 60% 정도가 될테니까요. 결국 이러한 논리는 일제의 식민사관에 컴플렉스를 가진, 조선 후기에도 근대화의 뿌리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찾으려고 혈안이 된 근대 사학자들이 만들어낸 말장난, 자료 해석의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아현:
강의 주제를 흐리게 한 제 잘못이 큽니다. 첫 강의인데 벌써 부터 제가 실수를 했네요. 강의 제목인 "당신은 어느 가문입니까"는 그냥 글을 전개하기 위해 처음에 삽입한 부분이고 주제를 담은 것이 아닙니다. 강의 주제는 지배양반의 정의 입니다....혼란스럽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질문에 답변을 드리면 저는 양반이 아니라 "지배양반"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위 세가지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양반이라고 말할수 없다는 것이 요지입니다. 그러나 교산님께서 "조선후기 전국민 60%이상은 양반이었다"는 말이 사실이었다고 말씀 하셨는데 그때의 양반은 제가 말하는 "지배양반"이 아닙니다. 지배양반은 5%내외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결국 "지배양반"이 아닌 교산님이 말하는 60%정도 차지하는 양반의 성격이 문제가 되는데 과연 그들이 양반의식을 가지고 있었을까. 전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겨우 지배양반의 제1조건만 충족한 사람들이죠..제2,3조건인 의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표면적으로만 양반이라 행세했을뿐 "지배양반"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지배양반 안에서도 그들간의 가격이 있어서 서로간에 상하관계가 존재했습니다. 양반을 인정받는 것은 촌락안에서 입니다. 절대로 신분제와 같은 성격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전라도에서 겨우 양반 인정을 받는 사람들은 경상도가서는 양반이 아닙니다 상대적인 개념이죠. 그리고 마지막 문장은 이해가 안되네요....60%가 양반이었다는 논리가 자료해석의 오류였다고 한것처럼보이는데. 다른 문장하고 앞뒤가 안맞네요

최승정:
제가 말한 전국민의 60%가 양반이었다는 것은 말 그대로 양반이라 참칭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에게는 잠곡님께서 말씀하신 양반 의식이나 양반의 기준 등이 적용될 수 없지요. 왜냐하면 그들은 말 그대로 참칭일 뿐이며, 조선 후기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양반의 수를 조사하는 사람들은 애초부터 양반 의식이나 양반의 기준을 가지고 조사를 하지 않았으니까 말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자족할 수 있을 정도의 생활수준이나 족보에서 양반가와 항렬이나 촌수가 어떻게 연관있는지만 살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조선 후기의 전국민의 60%가 양반이었다고 말한 것은 조선 후기 당대의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사농공상의 구분이 존재했던 시대의 사람들이니까 분명 양반의 기준이나 지배양반과 잔반 등등의 구분이 명확했을 것입니다. 문제는 조선 후기를 살아보지 않은 근현대의 학자들이 중인이나 자족한 생활을 한 사람, 대충 양반가와 동성동본이면 모두 양반이라고 참칭한 것이 문제입니다. 이들이 이렇게까지 넓은 범위로 양반의 수를 집계하고 일반 사람들까지 양반이라 참칭한 것은 이 사람들이 살던 시대는 양반의 기준이 흐려지고 중인 이상의 사람들에게까지 양반이라는 말이 적용되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물론 여기에는 양반문화와 의식이 후대에까지 제대로 전수되지 못한 탓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들이 조선 후기 전국민의 60%는 양반이었다는 말을 거론한 것은 조선 후기의 역사에도 근대화의 뿌리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조선 후기 쯤에 신분제의 동요가 일어났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조선 후기에 양반층이 급성장했다는 것을 자료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필수적이었겠죠. 때문에 그들은 양반이 어떤 계급인지 일일이 구분하거나 조사하지 않은채 대충 양반의 모습만 갖추면 다 양반이라고 구분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료를 보여주면 그것이 어떤 기준으로 나왔고 범위가 어떻게 되는지 등 자료를 철저하게 검증하지 않은 채 단지, 자료를 자료로서만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데 이 때 아마 이런 오류에 빠진것 같습니다. 정작 그 시대에는 그런 말도 없었고 그들은 양반이 누구인지 일일이 다 구분하고 있었는데 후대의 학자들은 이런 것들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지요. 그들에게는 근대화의 증명의 자료의 철저한 검증보다 더 중요했으니까 말입니다.

여하간, 이것이 저는 오늘날 거의 정설로 굳어진 전국민의 60%는 양반이었다는 말이 나온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자료해석의 오류라고 부른 것도 바로 이 때문인데, 제가 사학을 전공하는 학생이 아니라서 이 경우에는 정확한 용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더 적확한 용어가 있다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아현 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