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주차 강의(우송대)

우송대강의/2011.2학기 2011. 9. 26. 06:05 Posted by 아현(我峴)

5주차 강의(우송대) - 2011년 9월 23일

* 지식채널
-619 : 채무왕
-671 : 환상적인 실험 1부
-673 : 환상적인 실험 2부

* 파시즘에 대한 설명
- 대중독재
- 조건 : 1)공동체의 상징 2) 구호와 경례 3)공동체 회원증 → 훈련 →힘의 단결
- 이성적이 아닌 맹목적 추종 → 지도자에 대한 경애.
- 제도화된 민주주의 속의 맹목적인 대중, 개인이 아닌 대중이 중심이 되는 사회
-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 지도자에 의해서 대중이 좌지우지 되는 사회

* 역사는 왜 배우는가

역사는 보통 다음과 같이 정의됩니다.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 그러나 실제로 이 대화방식은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우선 위 정의에서 변수가 될 수 있는 조건을 보면 3가지로 구분됩니다. 과거, 현재, 대화. 하지만 과거는 변수가 될 수 없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과거는 그 자체로 진실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고 또한 변하지도 않습니다. 종종 어떠한 자료가 발굴되는가에 따라 변화를 받지만 그것 또한 실제 있는 그 사실을 어느정도 알고 있느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문제는 바로 현재와 대화에 있죠.

대화는 어떨까요. 대화란 현재가 과거에 말을 거는 것을 뜻합니다. 거꾸로 과거가 현재에게 말을 걸 수는 없는 노릇이죠. 타임머신이 있지 않는한. 그러므로 대화의 주체는 현재가 되고 그 대상은 과거가 됩니다. 이렇게 대화의 방식을 한정하게 된다면 문제는 간단해 집니다. 현재의 일방적인 대화인가. 아니면 과거를 배려하는 상호소통적인 방식인가로 나누어집니다.

일방적인 대화란 다음과 같은 것들을 말합니다. 최근 모방송국에서 방송된 선덕여왕이 상당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실제 주인공은 선덕여왕이었지만, 우린 주로 미실을 기억하고 있죠. 미실은 어떠한 여자였을까요. 그와 관계를 맺은 남자를 보면 진흥왕부터 시작하여 실제 사모했지만 일찍죽은 연인, 결혼하여 미실의 정부로 자리를 잡았던 상대등, 그리고 내연의 남자였던 병부령. 그러나 우리는 미실의 남자들에 비추어 미실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별로 고민하지 않지만 실제 미실은 현대의 기준으로 본다면 행실이 바르지 않은 부도덕한 여자임에 틀림 없죠. 이남자 저남자와 관계를 맺고 있지만, 실제 정실남편은 따로 있고, 자기가 사모하는 남자를 따로 있으니까요. 그리고 정실남편과 사모하는 남자 사이에 각기 아들들이 존재하고, 그 아들들은 호형호부하는 사이죠. 그러므로 우리의 사고방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미실이 됩니다.

상호소통적인 방식의 대화는 무엇일까요. 우선 과거의 배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현대 한국사회도 그러하기 때문에 선덕여왕이 살던 신라시대 신라인들도 우리와 같은 방식의 사고방식을 했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인 착각이자, 현대인의 오만이죠. 미실의 남자관계를 놓고 본다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사실들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죠. 신라사회의 연애관 내지 결혼에 대한 풍습이 현대 한국사회와 다르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을때, 일부일처제와 여자가 남자 집에 시집을 가는 형태의 결혼이 조선중기 이후에 한반도에 정착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고 있을때에야 비로소 미실의 남자관계가 좀더 뚜렷하게 이해가 됩니다. 즉 신라사회는 그렇게 해도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자연스러운 그런 사회라는 것이죠. 일부일처제의 방식과 간통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던 사회가 바로 신라사회였으므로 미실과 관련된 사실들은 보다 더 잘 이해가 되는 것이고 역사적 해석을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죠.

그러나 상호소통적인 방식에도 일정한 한계는 존재합니다. 바로 대화를 거는 현재가 어떠한 상태에 놓여 있느냐의 차이에 있죠. 과거에 말을 거는 현재가 수동적이고 적극적이지 않다고 한다면 상호소통적인 방식의 대화작동에 문제가 생깁니다. 즉 내가 누구인지, 현재 내가 놓은 환경이 어떠한지에 따라 대화는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한나라당에 소속되어 있는데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적인 모습보다는 그 이면에 자리잡고 있던 인권의 후퇴성을 이야기한다면 내 자신이 속한 당 안에서 온전하게 남아 있을 수 있을까요? 내가 고려대에 속해 있는 교직원인데 일제시대 김성수의 친일적인 행각을 학교발전을 위해 노력한 사실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라고 학내에서 말하고 다닌다면 난 그 사회에 남아 있을 수 있을까요? 그래서 역사는 정치적인 성격을 띄게 됩니다. 역사의 정치성이죠.

정치는 곧 권력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현재는 권력에 둘러싸인 환경에 의해서 지배를 받게 되고 자연스럽게 과거에 말을 걸어야 하는 현재는 그 권력의 통제 내지는 눈치를 보게 됩니다. 즉 대화는 현재 어떠한 구조에 있는가에 따라 그 방식을 달리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역사란 무엇인가"의 물음은 그 의미를 많이 상실하게 됩니다. 그 질문과 동시에 그 상위에 있는 근본적인 물음은 역사는 어떻게 구성이 되고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가 등의 질문들이 모두 무의미한 질문으로 퇴색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죠. 즉 드러내야 할 것들을 이 질문과 더불어 감추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역사의 정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하고 질문을 바꾸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역사에 대해서 궁금해해야 할 것은 역사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바로 "그 역사는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하는 것입니다.

한국사관련 교과목에는 서로 다른 이름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국사(國史)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사(韓國史)입니다. 중등교육과정에서는 국사로, 고등교육과정에서는 한국사로 부릅니다. 같은 한국의 역사인데 왜 다르게 부를까.

국사라는 말은 말 그대로 "그 나라의 역사"를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나라는 당연히 한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국사는 자연스럽게 한국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한국 안에서만, 그리고 한국인에게만 통용되는 용어입니다. 일본인이나 중국인에게 국사라는 말을 쓴다면 각기 일본의 역사나 중국의 역사를 가리키지 한국의 역사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국사라는 말은 본래 상대적인 말입니다.

국사 말고 그와 같은 용어로 국어, 국군 등의 용어가 있습니다. 국사처럼 국어는 그 나라의 언어, 국군은 그 나라의 군인을 지칭하지만, 우리는 실제로 한국의 언어, 한국의 군인을 가리킵니다. 상대적이라는 것은 그 용어가 가지고 있는 주관성으로 인하여 받아들이는 사람의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얼마전까지만 하여도 우리는 살색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우리는 황인종이기 때문에 피부가 노랗습니다. 그래서 살색은 노란빛 갈색을 지칭하지만, 흑인종이나 백인종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죠. 그러므로 국사, 국어, 국군도 그와 같은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즉 국사는 우리들만의 표현이죠. 하지만 역사라는 것은 우리만 누릴 수 있는 학문이 아닙니다. 일본인도 한국사를 할 수 있고, 중국인도 한국사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이 용어를 고쳐부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 왜 지금까지 썼던 걸까요.

고등학교 역사교과서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한국의 모든 역사를 다루는 "국사"가 있고, 다른 하나는 근현대 이후만 다루고 있는 "한국근현대사"입니다. 문제는 하나는 그냥 국사인데, 다른 하나는 "한국"이라는 말을 포함시켰다는 점이죠. 국사는 유일하게 1종만 있으며 국사편찬위원회라는 국가기관에서 만든 것입니다. 이와는 달리 한국근현대사는 현재 6~7종이 있으며 민간의 여러 출판사에서 만듭니다. 그러므로 국사와 한국근현대사의 차이는 유일한 역사인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구분된다고 할 수 있죠.

그러면 국사와 한국사의 차이는 뭘까요. 조금 시각을 바꾸어 History와 history의 차이는 뭘까요. 용어로만 본다면 대문자일 경우와 소문자일 경우로 구분될 뿐이지만, 그 안에 담겨져 있는 내용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Apple라고 했을 때와 apple라고 할 경우 대개는 Apple는 the apple의 의미를 apple는 an apple의 의미인데 the가 붙는 경우 사과라는 과일의 한 종류를 대표해서 지칭하지만, a가 붙는 경우에는 여러 다양한 종류의 사과 중에서 어떠한 개별 사과 하나는 지칭합니다. 먹음직스런 사과이건, 맛이 없는 사과이건 모두 사과죠. 이때 후자로 지칭되는 과일의 한 종류인 사과는 the가 되고 앞의 여러 종류의 사과는 a가 됩니다.

바꾸어 예를 들면, History와 history 뒤에 of Korea를 붙였을 경우 똑같은 한국사를 의미하는 말이 되지만, History of Korea와 history of Korea라고 했을 경우 의미 차이가 크게 됩니다. History of Korea는 한국사 중에서도 유일한 역사를 가리키며 한국사를 대표적으로 설명하는 그 하나의 무엇이 됩니다. 즉 "국사"를 가리키는 것이죠. 반면 history of Korea는 한국사의 여러 유형들을 가리킵니다. 이 때의 한국사는 국사와는 달리 유일하지 않은 각기 다른 해석의 역사를 용인하는 의미를 가지고 모두 한국사로 인정을 하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 역사의 정의에 대해서 이제는 역사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이 때 "누구"란 국사일 경우에는 바로 민족이나 국가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사는 한민족의 역사임을 천명하게 되죠. 그리고 국사에서의 역사는 당연히 개인과 민족의 정체성 확립에 목적을 두게 됩니다. 그래서 국사는 곧 민족사죠. 모든 한국사의 기준은 민족이 됩니다. 그러면 "누구"가 민족이 아니라면 어떻게 될까. 민족을 벗어나는 역사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두 가지 예를 들어 봅시다. 동학농민혁명 당시에 동학교도와 농민들은 정부를 상대로 전쟁을 벌입니다. 즉 (동학교도와 농민↔조선정부)의 구도가 설정이 되죠. 그런데 문제는 그 와중에 일본과 청국이 조선정부를 도와주기 위해 참여합니다. 다시 구조를 설정하면 (동학교도와 농민↔조선정부+일본+청)이 되죠. 이 중에 하나 빠져 있는 대상이 있습니다. 양반이죠. 이때 양반은 조선정부에 적극적으로 협력합니다. 일본군을 도와 동학폭도들을 처단하는데 앞장서죠. 다시 구조를 그리면 다음과 같죠. (동학교도와 농민↔조선정부+일본+청+양반). 근데 이 때 민족은 누구를 가리킬까요. 이 사건은 현재 동학농민혁명이라고 해서 동학교도와 농민이 혁명의 주체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동학교도와 농민이 민족이 되죠.

임진왜란때 일본군이 조선을 점령함에 따라 다양한 변화 양상이 나타났습니다. 의병을 일으켰던 양반들이 그러했고, 지배를 받아오던 농민과 노비들의 경우가 그러했죠. 대개는 (일본군↔조선정부+양반)의 구조로 이해가 됩니다. 양반은 의병을 일으켜서 일본군에 대항하고 있었죠. 그런데 문제는 양반이외에 농민과 노비, 일부 향리층은 어디에 포함이 될까요. 자연스럽게 양반과 합세하여 일본군에 저항할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 자료에서는 그런 사실을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던 때 노비들은 궁에 있던 노비문서를 불태웠다는 사실을 잘 알려져 있고, 선조의 아들로 함경도로 피난갔다가 지역 향리들에 의해서 붙잡혀 일본군에 건네진 것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각 지방의 농민들은 대개 일본군이 들어옴에 따라 잘 순응하고 있었죠.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하여 지나친 억측이 아니라고 본다면 (일본군+농민+노비↔조선정부+양반)이라는 구조를 상정할 수 있을 겁니다. 이때 그런 민족은 누구일까요. 당연히 양반이 됩니다.

동학농민학명과 임진왜란에서 서로 상이한 민족의 구성을 어떻게 모순되지 않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아니 말을 바꾸어 한국사를 통틀어 한반도에 살던 모든 백성을 민족이라고 지칭한 때가 있었을까요. 국사교과서에는 태초부터 그러했다고 암시적으로 전제를 하고 역사서술이 되어 있지만, 우리는 곳곳에서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을 쉽제 찾아낼 수 있습니다. 660년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기고 곧 이어 고구려 또한 멸명시켰을 때 우리는 이 사건을 일러 삼국통일이라고 하지만, 실제 백제와 고구려입장에서 본다면 통일이 아니라 우리가 일본제국주의에 1910년 멸망되었듯이 삼국병합이라고 써야 옳을 것입니다. 민족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사건은 어떻게 설명이 될 수 있을까요. 삼국통일이라고 한다면 아마 신라만 민족일지 모릅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와 같은 민족일까요. 과연 민족은 누구일까요.

서로 상이한 민족에 대한 개념설정을 간단히게 모순없이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모순된 사실을 역사에 포함시키지 않으면 됩니다. 동학농민혁명에서는 양반을, 임진왜란에서는 농민과 노비를 서술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면 민족은 마치 모든 구성원인 것처럼 인식하게 됩니다. 삼국통일도 마찬가지죠. 신라의 경우에만 말하지 고구려와 백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우린 단지 부흥운동이라고만 서술하고 있지만, 실제는 부흥운동이 아니라 정확하게 용어를 쓰지만 독립운동에겠죠. 3.1운동을 부흥운동이라고 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국사교과서의 문제점은 이 지점에서 발견됩니다.

몇해전 미륵사지 석탑 사리봉안기에서 하나의 기록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기록 때문에 우리는 여러개 역사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죠. 미륵사 창건이라는 하나의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서로 다른 별개의 자료에 대한 두 가지의 역사적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국사를 통해서 배워온 역사는 삼국유사 서동요 설화에 기반을 둔 선화공주가 창건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새롭게 석탑에서 발견된 기록에 따르면 미륵사는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의 유력 귀족인 사택氏의 딸이 창건했다고 나옵니다. 그러면 둘중 하나는 잘못되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모두 자료에 근거를 두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역사를 다양하게 바라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History의 체계 아래에서는 하나의 역사만 존재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해석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지만, history의 의미 안에서는 충분히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는 점을 이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두 역사적 해석에 차이가 있다면 어느 것이 더 진실에 가까운가 하는 점일 겁니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란 무엇이며,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가가 아닙니다. 역사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통해서 그 역사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며 나의 세계관을 어떻게 만들어가야 할지 고민하는데 있을 것입니다. 문학을 통해서 인간에 대한 속성을 간접 경험하듯, 역사도 과거를 비추어 민족과 국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역사는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그 무엇인가를 물어보고 있으며 나를 그것을 이제 스스로 대답해야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제 모든 것들은 나의 판단에 따라 세상이 달리지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는 역사는 곧 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일구어 간다는 의미로 바꾸어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역사는 내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 9월 30일 휴강(학교 축제)
* 10월 7일 휴강(학과 학술제)

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