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차 강의(한국사새로읽기)

건양대강의/2011.2학기 2011. 9. 26. 06:00 Posted by 아현(我峴)

3주차 강의(한국사새로읽기) - 2011년 9월 19일

* 지식채널
-188 : 제 정신으로 정신병원 들어가기
-362 : 1968(68혁명) 1부 주동자가 없는 시위
-369 : 1968(68혁명) 2부 실패한 혁명

* 인간의 이성적 판단에 대한 회의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것은 정상인들의 판단에 따른 것입니다. 그 판단은 대개 이성(理性)에 기초하고 있는데, 그럼 그 이성이란 무엇일까. 사전에 따르면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을 감각적 능력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시켜 주는 인간의 본질적 특성" 즉 한마디로 생각하는 능력입니다. 그 능력이 객관적이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인간들은 믿었습니다. 르네상스 이후부터. 인간이 재발견되었다고 하는 말도 결국 이성적 능력을 다시 획득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 이르러 이러한 이성적 판단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판단은 완전한가. 인간의 이성은 합리적인가. 20세기에 들어서서 인간에 의해 일어난 두 차례의 전쟁에서, 특히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유태인 학살은 인간이 아무리 합리적 이라고 하더라도 얼마나 무자비하고 난폭한가를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성적인 인간이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할 수 있다는 회의를 가져오게 한 것이죠.

역사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역사는 해석에 기초하고 있지만, 그 해석은 과연 합리적인가. 개개인마다 다를 수 있고, 보는 조건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이 역사라는 것을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방식을 통해, 합리적인가 합리적이지 않은가를 나누는 기준이 모호하다는 사실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즉 역사의 해석은 다양하며 그 다양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현대 역사학의 이해가 아닐까 합니다.

(추가)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확인은 정상인들의 이성적인 합리성에 따른 것으로, 근대 이전에는 굳이 구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죠. 근대적인 병원이 없었다는 사실은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 불필요하다는 하나의 반증일 것입니다. 감옥과 교도소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는데, 일반 병원이 병의 유무로 인간을 구분하고, 정신병원이 인간의 정신상태로 구분했던데 비해, 감옥은 인간의 도덕성에 근거를 두고 법으로 구분하는 이분법적인 장치였다고 볼 수 있겠죠. 그것은 모두 인간의 이성에 근거를 두며 근대 이후에 나타난 제도 중의 하나가 됩니다.

* 68혁명

1968년 당시 프랑스는 아주 행복한 시절이었습니다. 우리나라 IMF를 맞이하기 이전 90년대 모습과 비슷합니다. 정부도 기업도 국민 개개인도 모두 잘 살던 시절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안에서 싹틔우고 있었죠. 세대문제였죠. 기성세대는 부단한 노력을 통하여 경제적으로 먹고 살기 편한 세상을 만들어 냈지만, 청년을 비롯한 신세대들은 그것을 넘어서 그 무엇을 요구하기 시작했죠. 또한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 여성들도 이에 동참하게 됩니다. 기성세대의 권위주의, 서열주의에 대한 도전이 시작된 것이죠. 그것이 68혁명의 원동력이 됩니다.

현대사회를 설명하는 가장 큰 축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민주주의가 최상의 정치제도는 아니며, 자본주의가 최상의 경제구조가 아니라는 사실을 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선거제도를 통하여 그것의 본질을 실현합니다. 그러나 선거는 투표권자의 투표에 의해 진행이 되는데, 이때의 전제가 되는 것은 바로 현명한 선택입니다. 투표권자가 현명한 판단력에 따라 올바른 사람을 뽑는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투표권자가 모두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과 나이 지긋하고 인생의 굴곡을 모두 겪은 50~60대 어른이 같은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70대 치매에 걸린 노인보다 판단력이 빠른 고등학생이 더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자본주의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를 보통 성장의 관점에서만 바라보지만 성장과 더불어 같이 생각해야 하는 것이 바로 분배의 원칙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나라에서 주력하는 것은 성장이지 분배는 아닙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통 나타나는 부익부 빈익빈은 그러한 가운데에서 나타납니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딜레마죠. 미국이 자본주의 사회이면서도 그 나마 사회불안 요소가 적은 것은 기부와 분배를 통한 적절한 정책을 이어나가기 때문입니다. 상속세를 폐지하려고 했을 때 최고 갑부였던 빌게이츠가 반대했던 것도 성장과 분배의 문제 한 가운데에서 설명할 수 있는 현상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함께 성장하고 같이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제도적인 장치들이 마련되어야 하는데 그 본질을 잘 모르면 자본주의가 극단에 놓일 수 있죠. 문제는 거기서 발생하게 됩니다.

아주 초기적인 현상이지만 그러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폐해야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1968년 프랑스에서 있었고, 대한민국에서도 혁명에 까지 이른 것은 아니지만, 차츰 변화의 흐름에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무상급식이 그렇죠. 초기 무상급식이 나왔을 때에는 사회주의적인 발상이라는 원색적인 비난이 있었습니다. 지난 5월 교육감 선거에서는 후보들의 대부분 공약에서 무상급식이 언급되었고 현재는 그 진행중에 있습니다. 아무도 무상급식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불과 얼마 되지 않은 기간에 국민들의 인식이 변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비록 작은 변화과정이지만 대한민국에서도 이제 국민들이 사회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사실이 큰 의미를 두어야 할 것이며 앞으로 다른 분야에서도 그러한 변화들이 진행될 것이라 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불평등은 대개 자본주의의 성장에 따라 발생합니다. 자본주의의 성장으로 모두 잘 사는 사회가 된다고 하여 평등화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의 경우 경제의 규모가 세계 10위 내외에 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만큼 더 민주화되고 평등사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최근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남녀불평등 비율이 전세계 100위 내외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경제성장이 반드시 좋은 사회를 가져온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68혁명에서 젊은세대의 기성세대에 대한 저항에 여성과 노동자가 동조하고 참여하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단지 젊은세대의 반항이 아닌 권력을 지니지 못한 소수자의 권력을 지닌 기성남성에 대한 도전이라고 하는 것이 더 합당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같은 사회구조라고 하더라도 남성이 여성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고, 내국인이 외국인보다,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보다 더 많은 받은 것은 그러한 불평등, 즉 고정관념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저항이 68혁명이겠죠.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아무리 잘살아도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현상을 이해하고 극복하려는 노력의 의지를 자각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 강의 - 교양과 인문학

* 대학의 학문 체계는 전공과 교양으로 구분이 됩니다. 전공은 말 그대로 오로지 하나의 힘쓰는 것을 말합니다. 대학에 오면 누구나 전공을 가지게 되며 전공에 힘쓰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대학에 오는 목적이 전공을 깊이 있게 공부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대학의 학문체계는 전공과 더불어 교양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교양은 좁은 의미로는 문화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쌓는 넓게는 인격을 배양하는데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양을 의미하는 culture라는 단어의 어원에서 보듯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한 당연한 기술인 '밭갈기'를 통해서 생활을 영위해 가듯이 현대 사회에서는 일정한 교양 지식을 통해 더 인간답게 살고자 합니다.

그러면 대학에서 가르치는 교양의 의미는 무엇일까. 본래 현대의 대학 체계는 중세대학의 학문구조에서 연원을 하고 있습니다. 교양에서는 산수, 기하 등의 7개 과목을 가르치고 있었고, 이를 모두 이수해야만 법학, 철학, 신학의 전공 과목을 선택하여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교양과목은 전공을 더 전공답게 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였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천문을 바라보는 당시 사람들의 두 가지 인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구가 하늘의 중심이라는 천동설과, 태양이 하늘의 중심이라는 지동설이 있습니다. 모두 밤에 하늘을 바라보며 별자리 운행의 변화를 통해서 밝혀진 사실들이지만 하늘에 대한 인식에 따라 같이 바라보아도 생각이 달랐던 것입니다. 당시에는 신학이 지배하던 세상으로, 이 우주는 모두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밤하늘에 보이는 별자리도 하느님의 창조하신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천문에 대한 인식은 지주가 중심이 되는 천동설이 지지를 받게 됩니다. 지동설을 주장할 경우 하느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과 논리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천문학의 천동설은 신학에서 말하는 천지창조의 설명을 더욱더 선명하게 별자리를 통해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죠. 천문학은 신학이 신학답기 위한 교양학문이 되는 것입니다. 천문학 자체가 목적이 아닌 것이죠.

뉴턴의 과학관도 이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뉴턴은 자신의 지적능력을 물리학에 발휘하였습니다. 그러나 물리학이 연구의 그 자체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였고 질량이 있는 모든 물질들 사이에서는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법칙화하여 F=ma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죠. 지구상의 모든 힘은 그 질량과 가속도의 곱에 비례한다고. 하지만 그는 독신한 신자로 그와 같은 발견이 곧 천지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뜻이라 여겼습니다. 즉 하느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그것이 하나의 법칙으로 모두 설명될 수 있다고 믿었고 그것을 연구한 끝에 F=ma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즉 그는 신학을 더 잘 이해하고 자연세계에 담겨진 하느님의 창조의 말씀을 만유인력의 법칙이라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뉴턴이후가 되면 중세시대와는 전혀 다른 근대과학의 시대를 열게 되었다고 평가를 받았지만, 뉴턴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죠. 그의 유명한 저서인 프린키피아에는 다음과 같이 우주의 정의가 있다고 하죠. "천체는 태양, 행성, 혜성 등으로 매우 아름답게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은 지성을 갖춘 강력한 통치자의 의도와 통일적 제어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지극한 하나님은 영원, 무궁, 완전하신 분이시다"

(추가) 신의 믿음에 따른 학문의 역사에 대한 설명은 학문적인 이야기이지 종교적인 설명은 아닙니다. 오해 마시길.



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