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하였다.
“지금 중국 사신이 황상의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는 신하로서 조서를 받들고 우리 나라에 왔으니, 체면이 높고 무겁다. 우리의 도리에 있어서는 마땅히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그들의 환심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할 뿐이다. 요즈음 삼사에서 고담 준론을 좋아하는데, 이는 이익은 없고 손상됨만 있으니 어찌 미안하지 않은가. 중국의 귀인이 우리 나라 삼사의 의논에 어찌 털끝 하나라도 꿈쩍하겠는가. 다만 생각건대 이러한 논의가 새어나가 혹 저들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 뜻밖의 처리하기 어려운 근심이 어찌 반드시 없으리라고 보장하겠는가. 내가 매우 두렵다. 이런 뜻을 정원은 잘 알아서 조사와 관계되는 모든 일을 십분 잘 단속하고 절대로 조보(朝報)에 내지 말라. 그리고 원접사와 관반(館伴)으로 하여금 통역관을 엄히 단속해 중국 사람들에게 전파하지 못하도록 하게 하라.”
(<광해군일기> 권17, 1년(1609) 6월 9일(무오))
광해군은 무엇을 두려워했을까.
(<광해군일기> 권17, 1년(1609) 6월 9일(무오))
광해군은 무엇을 두려워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