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상으로서 광개토왕비문

중국 지린성 지안시에 6미터 남직한 광개토왕비문을 일본 육군은 일본으로 반입하여 도교국립박물관에 진열하려는 계획을 세웠었다. 이 비석을 옮기려던 계획을 세우게 된 동기는 조선침략을 정당화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일본국민들에게 고대 일본 세계를 알려주고 당시 러일전쟁의 전세에 국민에게 전쟁 대비용 마음가짐을 환기하기 위한 현실적 목적이었다. 물론 이 계획인 실패로 돌아갔다.

이와 같이 각 나라마다 이 비문은 다르게 인식되고 있다. 비문과 연결된 국가들, 한국, 중국, 일본, 북한은 각기 자신의 위치에서 비문을 해석한다. 고구려의 텍스트가 근대 동아시아 각국에서 공통된 텍스트로 영유되는 것 자체가 특별한 일로 주목이 되고 있음과 동시에 근대 동아시아의 민족, 국가의 컨텍스트에 따라 해석되어 이용되고 있는 상황이다.

장수왕은 광개토왕 사후 3년 뒤에 비문을 건립했다. 비문은 1775자로 서론과 두 가지의 본론 내용을 담고 있다. 서론은 시조 추모왕이 창업 이해 고구려 왕가의 世系(왕의 계보)를 약술하고 본론 1에서는 광개토왕 일대의 무훈을 8년 8조로 나누어 연대기식으로 정리했고 본론 2에서는 광개토왕릉의 守墓人(묘를 지키는 사람들) 330家의 내역과 그들에 대한 금령, 처벌 기록을 적고 있다.

그러나 비문 내용 중에서 네 나라가 첨예하게 관심을 가지는 문장을 정해져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百殘新羅舊時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

1883년에 일본 참모본부의 사코 가게아키 포병 대위는 광개토왕비의 묵본(탁본)을 입수하여 귀국했다. 3년 뒤에 현지에서 비석이 발견되었고 일본의 참모본부에서는 이를 해석했다. 일본에서는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백잔과 신라는 본디 속민이었으므로 원래 조공을 하였다. 그런데 왜는 신묘년에 와서 바다를 건너 백잔과 임나, 신라를 쳐부수고 신민으로 삼았다”

일본에서는 391년에 야마토 조정의 군대가 한반도 남부를 공격하여 백제와 신라를 정복하고 평양부근의 고구려와도 싸웠다고 하여 4세기 말에 야마토 조정이 한반도 남부를 복속했다고 가장 유력한 제1급 사료로 취급했다. 이에 더 나아가 시라토리 구라키치는 이 비문을 보고 당시 일본이 처해 있는 상황을 보아 비문 속에 이를 투영시켜 근대 텍스트로서 비문을 해석했는데, 왜가 고구려에서 결국 졌기 때문에, 현재(러일전쟁)에 이를 국민에 대한 교훈으로서 (일본이 러시아에 질 수 있다는 가장 하에서) 제시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후 한국에서도 이 비문을 접하고 나름대로 해석하기 시작했지만, 일본의 경우와 같이 해석할 수는 없었다. 일본에 의해 정식화된 이해를 정면에서 비판하고 통설적인 해석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정인보였다. 그는 이 비문은 광개토왕을 현양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일본의 해석으로는 문맥상 맞지 않다고 보았다. 그는 이렇게 해석했다.

“그리하여 왜는 일찍이 신묘년에 (고구려에 가서 침범하고) (고구려도 또) 바다를 건너 (왜를) 무찌르고, 백잔은 (왜와) 내통하여 신라를 침범했다. (태왕은) 신민(인 백잔과 신라가 왜 이러한 일을 하는가)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주인공인 광개토왕에게 불리한 기사가 적혀 있을 리 없다고 단정했기 때문에 주오와 목적어가 상당수 생략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이후 정인보식 해석은 북한 학계의 김석형과 박시형에게 계승되었다. 김석형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고구려에) 왔으므로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 백잔을 쳐부수고 신라를 **하여 (백잔과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쳐부순 주체를 왜가 아니라 고구려로 본 것은 정인보와 같으나 신민을 삼은 주체가 왜에서 고구려로 바뀌었을 뿐이다. 박시형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고구려에) 왔으므로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 (왜를) 쳐부수었다. 백잔이 왜를 불려들여 (신)라를 침략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김석형과는 달리 고구려가 쳐부순 것은 백제가 아니라 왜였고, 신민으로 삼은 주체는 고구려가 아니라 왜를 끌어들여 신라를 침략한 백제였다는 해석이다. 김석형과 박시형의 해석은 고대 일본 민족에 대한 한민족의 우위성에서 설명하고 있다.

김석형 학설의 경우 일본의 고대사 연구에 충격을 주었지만 일본에서는 냉담한 반응 뿐이었고, 오히려 재일사학자 이진희에 의한 석회설까지 나돌게 되었다. 그는 참모본부가 적극 관여하여 탁본을 바꿔치기 하고 이를 은폐하고자 비문에 석회를 발라 글자를 왜곡했다는 석회도포설을 제기했으나 이는 후대에 민족주의의 소산에 불과함이 드러났다.

지금까지는 텍스트 외부적인 문제로 비문의 내용을 접근했으나 우선 내부로 들어가 비문을 살펴보자. 8년 8조의 무훈기사는 王躬率(왕이 친히 이끌다)와 敎遣(명령을 내려 파견하다)라는 두 글자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군사행동을 엄격히 구분한 것으로 모두 그 정점에 왕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른바 ‘왕궁솔’의 전치문(앞에 먼저 내 놓는 문장)을 보면 “20년 경술, 동부여는 예로부터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도중에 거역하여 조공하지 않았다. 왕은 친히 이끌고 가서 토벌했다”에서 왕이 나서서 해결하는 전치문으로 작동했다. 이는 비문의 필법으로 그 효과를 극대화 하여 국란극복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처음 제시된 문제의 그 문장은 바로 무훈기사를 설명하기 위한 전치문의 역할을 띠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현명할 것이다.

1980년대가 되면 텍스트는 새롭게 복원이 되었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중국에 들어갈 수 없는 상황에서 왕건군 등의 학자에 의해 비석 연구의 현지조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에 따라 글자 전체를 다시 판독하고 현지조사를 진행하여 석회는 탁본을 잘 뜨기 위해 현지인들이 발라 놓았다는 것과 석회를 바르기 이전의 탁본 원본이 발견되었다는 두 가지 성과를 이룩했다.

그러면 이제 텍스트 자체로 돌아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비문을 쓴 사람의 의도와 동시대에 그것을 읽은 사람들에게 왜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우선 비문이 만들어진 이유에서 먼저 찾아야 한다. 광개토왕비문은 일반적인 비석과는 다르다. 또한 중국의 묘비와 묘지제도에서도 벗어난 비석이었다. 그러므로 근대적인 사고방식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이 비문의 내용을 보면 주로 수묘역 제도의 혼란을 막고자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수묘인 매매가 심각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에 비문에는 금령과 이에 대한 벌칙이 기록되어 있다. 즉 국가적인 사민책에 의해 수묘역 체제에 바탕을 두면서 새롭게 제도를 강화한다는 취지와 목적을 가지고 세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문의 무훈기사를 보면 8회 뿐이다. 그러나 광개토왕의 승전기사는 8회뿐이 아니다. 삼국사기나 중국 사서를 보면 광개토왕의 기사는 꽤 많다. 비문에는 이것을 일일이 다 기록하지 안았음을 알 수 있다. 왜 그랬을까. 본문 1을 보면 무찌른 성과가 64성에 1400마을이라고 하였는데 그 수는 겨우 8회에 미지지 못했다.

본론 2에서는 징발된 수묘인 330가구의 출신지가 나오는데 대부분 무훈 8회의 기사에 기록된 64개 성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수묘인은 대개 정복한 지역의 백성들을 징발하여 차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본론 1의 무훈기사는 수묘역체제의 수호를 겨냥한 문장의 전제이지, 무훈 칭송을 위한 목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비문을 읽은 독자는 바로 수묘인이었던 것이다. 비문의 무훈기사는 330호의 수묘인의 광개토왕의 무훈에 의해 확대되고 유지되었던 고구려왕을 중심으로 하는 질서구조에 근거하고 있음을 주장함으로써 광개토왕릉과 그 수묘인의 관계를 필연화시키기 위한 언설이었다.

이제 다시 왜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비문에서 왜의 기능은 무엇일까. 고구려의 국가관 질서의식에서 왜는 어떠한 존재로 해석될까. 고구려에게 왜는 토벌하고 조공을 강요할 대상은 아니었다. 왜는 단지 고구려 왕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질서를 위협하고 파괴하는 적이었다. 비문에서 왜를 묘사할 때 약한 적이라기보다는 강한 적이라고 하는 것은 수사학적으로 효과를 더 발휘하기 때문인데 그래야만 광개토왕의 공적이 더욱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결국 왜는 고구려의 우주론에서 꼭 필요했던 존재였다.

왜는 고구려 지배공동체 내의 공동 환상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였고, 왜의 존재가 있음으로서 고구려의 질서 세계가 더 명확해지고 광개토왕의 위업이 빛나며 수묘역 체제의 수호가 절대 사명으로 필연화되는 것이다. 백제가 고구려의 신민이었는지, 왜에 의해 격파되었는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물론 백제는 고구려에 대해 왜와 결탁하여 항전하고 한성이 함락되지만,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왜는 백제가 고구려의 속민이 아니면 안된다는 것을 정당화하는 역할만 하고 있었다.

백제를 고구려의 속민으로 삼는 것은 어디까지나 고구려(비문)의 논리였다. 마찬가지고 백제와 신라가 왜의 신민이었다는 기사를 그대로 당시의 개별적이며 구체적인 사실이라고 보아야 할 필요는 없다. 기록되어 있다고 그것이 다 사실은 아닌 것처럼.

* 참고문헌 : 이성시, <만들어진 고대>, 삼인, 2001, 35~79쪽
* 건양대 역사교양수업 “한국사새로읽기”와 “한국의전통문화” 6주차 수업 내용임.

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