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말고사 문제(한국사의 이해1)

건양대강의/2011.1학기 2011. 6. 18. 00:31 Posted by 아현(我峴)

기말고사 문제(한국사의 이해1)

1. 왕건을 지방의 호족들을 자신의 편으로 삼기 위하여 여러 가지 유화정책을 시행했다. 그 중에서 호족들에게 성(姓)을 하사하는 정책을 펴기도 했다. 이 정책을 무엇인가. → 문제에 정답이 있다고 말했건만

2. 고려초에는 독자적인 세력을 가진 호족출신의 공신세력들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혜종때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실과 호족, 외척이 얽힌 정변은 무엇인가. → 안가르쳤다. 국사교과서 보면 나온다

3. 고려 성종대에는 고려사회의 기틀을 마련한 시기로 각 지방에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지방 군현은 500여개가 넘어서 고려정부는 모든 군현에 지방관을 파견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지방관이 파견된 군현을 주현(主縣)이라고 불러 지방관이 파견되지 못한 지방까지 통치하게 하였다. 그럼 지방관이 파견되지 못한 군현은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 이건 좀 말한거 같다

4. 고려 중기에 이르면 문벌 귀족들의 특권이 강화되었다. 음서와 공음전을 통해 많은 특권이 귀족들에게 주어졌고 심지어 이들 간의 내부 분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권력이 소수에 의해서 독점되었고 경제적 특권도 일부가 장악하고 있었다. 결국 귀족 사회의 폐단과 모순이 노출되기에 이르었는데 2명의 왕에게 자신의 딸을 왕후로 삼게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이후에는 스스로 왕의 되고자 했던 문벌귀족의 이름은 무엇인가. → 국사교과서 봤으면 알 건데

5. 고려시대 토지제도인 전시과 중에서 오직 관품에 따라서 전현직 관리에게 토지를 분급한 전시과의 이름은 무엇인가. → "전시과 중에서"라고 했건만 왜 과전법과 직전법을 쓸까

6. 조선 건국 직후 정도전은 고려의 불교사회에 대한 모습을 비판하고 유교정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불교의 잘못된 관습을 비판하여 책으로 엮었다. 그 책의 이름은 무엇인가. → 이건 많이 맞추었다 ㅎㅎ

7. 세종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한자를 두고 왜 훈민정음을 만들었을까. → 수업시간에 훈민정음 원문 보여주면서 말했다. 그런데....

8. 태종과 세조를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6조에서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바로 국정을 보고할 수 있도록 6조직계제를 시행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그의 치세 중반에 의정부를 다시 거치도록 하여 의정부서사제를 시행했다. 세종이 의정부를 다시 거치도록 한 이유는 무엇일까. → 발상의 전환이 요구된다

9. 조선시대 감찰기구인 사헌부와 사간원을 합하여 양사라고 불렀다. 그리고 양사에 이 기구를 합하여 삼사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 기구의 이름은 무엇인가. → 맞추라고 낸 문제

10. 조선 전기의 토지제도 중에서 지급할 토지의 부족으로 현직관리에게만 토지를 지급하던 제도는 무엇인가. → 5번 문제하고 헷갈릴 게다

11. 조선시대 도량형 중에서 성인 남자 한줌에 해당하는 다음 그림의 도량형 단위는 무엇인가 → ppt에 있다

12 고려의 광종은 호족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 중에서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는데 공복의 제정이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는 이유에 대하여 설명하시오. → 꽤 자세히 설명했다. 건양대 교직원이 초록색 유니폼을 입는 이유와 같다.

13 고려 성종은 고려가 불교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유교정치를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신라의 6두품 출신의 유학자들과 더불어 국정을 주도하였으며 5품 이상의 관리들로 하여금 그 동안의 정치에 대한 비판과 정책을 건의하는 글을 올리게 했다. 또한 국자감을 정비하고 지방에 경학박사와 의학박사를 파견하여 유학 교육의 진흥에 노력했다. 불교국가이면서 유교정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성종의 의도는 무엇일까. → 글쎄 왜 그랬을까.

14 고려의 중앙조직은 2성 6부제를 토대로 하고 있다. 이는 당의 제도를 받아들인 것으로 당의 제도는 3성 6부제였다. 고려의 관계는 문산계와 무산계로 이 또한 당나라의 제도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그 운영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당은 3성인데 비해 고려는 2성이며, 당나라의 문산계와 무산계도 고려에서는 당나라의 그것과는 달리 운영되었다. 한편 고려의 독자적인 관청인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은 당나라에는 없는 것이었다.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면서도 당나라의 제도와는 달리 운영되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 이건 모방과 운용의 문제다. 우리게 아는데 당연히 그대로 운영이 안되지. 지금도 마찬가지고

15 고려의 관리는 과거에 합격한 자를 우선으로 선발하였다. 과거의 제술과와 명경과에 합격한 사람들은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공신과 종실의 자손, 5품이상의 고위 관리의 자손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도 관리가 될 수 있는 음서제의 혜택을 받았다. 고려에서는 합리적인 과거제를 운영하여 능력위주의 인물을 선발하는데 반하여 그와는 달리 음서라는 관직 특혜를 시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 고려시대 사회의 특징이다. 고려사회가 귀족사회인가. 관료사회인가.

16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과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은 사대성과 자주성으로 자주 비교된다. 김부식은 신라 출신으로 유학적인 면모로 사대적으로 삼국시대의 역사를 썼으며 일연은 단군신화로 대표되는 우리의 역사성을 강조하여 자주적인 역사를 썼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김부식은 우리나라의 기록과 중국의 기록이 서로 상반될 경우, 우리나라의 기록을 신빙하였으며 반대로 일연은 우리나라의 기록과 중국의 기록이 서로 다를 경우 중국의 기록을 더 믿었다. 그러면 김부식은 자주적이고 일연은 사대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황제국에서만 사용하는 <본기>라는 용어을 썼으며 중국보다 우리나라의 기록을 더 신빙했음에도 단군신화와 같은 자주성(?)을 띄는 기록을 <삼국사기>에 포함시키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 암기 교육의 처절한 폐해 중 하나

17 다음 글을 보고 최치원이 신라 고유의 왕명(王名)을 쓰지 않은 이유와 그와는 반대로 김부식은 신라 고유의 왕명을 그대로 사용한 이유를 쓰시오. → 지금도 이런 사람들 있다. 오렌지가 아니라 어륀지

신라의 왕칭에는 거서간이 하나, 차차웅이 하나, 이사금이 열여섯, 마립간이 넷이 용례가 있다. 신라 말의 유명한 유학자 최치원이 지은 <제왕년대력>에는 모두 某王이라 하고 거서간 등은 말하지 않았으니, 이는 아마 그 말이 비야하여 족히 일컬을 만하지 못하다고 여겼던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좌전>과 <한서>로 말하자면 중국의 사서인데도 오히려 초나라 말과 흉노의 말을 그대로 보존해 남겨두었다. 그러므로 지금 신라의 일을 기록함에 있어 그 방언을 그대로 두는 것이 역시 마땅할 것이다(<삼국사기> 신라본기4, 지증마립간 즉위년)

18 조선시대 관원들의 근무태도를 굉장히 엄격하였다. 특히 감찰기구인 사헌부와 사간원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헌부와 사간원은 근무 방식이 많이 달랐는데 사헌부가 관원의 근무에 상당히 엄격한 잣대를 요구하는데 반하여 사간원의 관원들은 굳이 출근시간을 지킬 필요가 없었으며 출근하지 않아도 큰 제제를 받지 않았다. 또한 상관의 지시를 받지 않아도 되었고 굳이 지킬 필요도 없었다. 이와 같이 같은 감찰기구임에도 불구하고 사헌부와 사간원의 근무 방식이 달랐던 이유는 무엇인가. → 꽤 강조해서 말했던 거 같다. 한 10분 정도? 그래서 조선시대는 500년을 갔다.

19 조선시대 암행어사는 왕으로부터 임명이 되면 3가지를 받았다. 하나는 마패로 말을 빌리거나 신분증명으로 사용했으며 다른 하나는 임무수칙으로 자신이 가야할 지방에서 무엇을 감독하고 무엇을 보고해야 하는지에 대한 임무가 기록되어 있다. 마지막 하나는 “자”인데, 암행어사가 자를 가지고 간 이유는 무엇일까. → 자의 용도는?  뭘 재려고....

20 조선시대 토지의 단위는 결(結)이었다. 결은 1등전부터 6등전까지 6단계로 나누어지며 1등전의 절대면적인 6등전 절대면적의 1/4에 불과했다. 즉 1결은 절대면적이 아니라 토지의 수확량에 따른 단위였다. 오늘날에는 토지의 단위를 절대면적(㎥나 평)을 사용하지만 조선시대에는 토지의 수확량에 따른 단위를 사용했다. 1결의 절대면적이 6가지로 구분되어 제각각이면 사용하는데 불편했음에도 조선시대 내내 결이 사용된 이유는 무엇일까. → 조선시대에 가장 중요했던 것은. 세금 거두는 것. 세금은 토지에서. 토지에서 나는 것은 쌀. 그럼 중요한건?

21. 조선시대 사람들은 자기가 사는 마을에 이름모를 역병이 들면 도망을 가기나 굿을 했다. 당시 의학으로는 역병을 치료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였으므로 피하는 것이 최상의 방책이었다. 그러나 도망치지 못하고 역병에 걸리면 무당을 불러 제사를 하거나 굿을 했다. 당시에는 무당이 역병을 치료해 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현대의학에서는 바이러스나 여러 감염체가 병의 원인이므로 병원균만 치료하면 되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무당의 의사인 셈인데, 조선시대 사람들은 무슨 이유로 무당이 역병을 치료해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까. → 지금도 마찬가지다.

22.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조선후기 지방의 양반들은 지역사회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우선 서원을 건립했다. 서원은 국가에서 인정을 받은 건물로 토지와 노비를 하사받았다. 물론 서원 중에서 문중서원을 건립하여 자신을 조상을 모시고 지역사회는 자신들 위주로 주도하고자 했다. 또한 조상에 대한 추숭, 정려, 신원, 추증을 위해 노력했다. 유명한 조상의 경우 신도비를 세우거나 행장을 만들어 선조의 유적을 드높이기도 했다. 문중에서는 족보를 만들거나 조상의 문집을 간행했는데 족보와 문집은 문중의 이름을 높이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지방의 양반들은 돈이 없더라도 서원을 건립하거나, 조상의 행적을 재평가하고 선조의 유적을 현창하며 문중의 권위를 홍보하려고 했다. 이와 같은 양반들의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일까. → 양반은 조선왕조에서 한번도 권위를 인정 받은 적이 없다. 그러면? 지역 유지들이 라이온스 클럽에 가입하려는, 돈이 있으면 지방의회 의원이 되려는 이유와 같다.

23.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을 통해 보수적인 성리학자들의 든든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지방 사회의 성리학자들의 근거지였던 서원에 대해서는 이들의 지지를 뒤로하고 철폐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지방 양반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과 서원철폐를 같이 할 수 없는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흥선대원군이 이와 같이 상반되는 정책을 시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 딜레마. 왜 그랬는지 우리는 한번도 고민해 본 적이 없다. 흥선대원군의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24. 대학에서 배우는 역사란 무엇인지 쓰시오. → 글쎄. 왜 배운다고 생각하세요?

25. 조선왕조가 500년 동안 지속된 이유는 무엇인지 쓰시오. → 나도 궁금하다. 그래서 내가 조선시대를 연구하는 이유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