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고사 문제-한국사새로읽기 01반

1. 해방 당시 유관순의 인지도는 매우 낮았다. 역시 유관순이 대중의 시야에 포착된 것은 해방 이후다. 유관순은 1946년 10월경 처음으로 알려져 이화여중을 중심으로 하여 기념사업회가 조직되어 활동 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부도 조직되지 않은 해방 직후 유관순이 세상에 알려지는데에는 박인덕이 중요한 연결고리였다. 박인덕은 이화 출신으로 유관순이 이화학당 재학시절 선생님이었는데 형무소에 복역중인 유관순을 만나고 그의 행적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해방 이후 이화여중 교장이었던 신봉조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다음은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두 사람의 대담이다. 다음 대담을 보고 유관순이 선택된 이유를 쓰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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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봉조
: 거기에 박인덕 선생님이 언젠가 오셨는데 내가 이화학교 졸업생 중에서 굉장히 국가민족에 공헌 사람 있으면 그런 분을 선생님이 말씀해 달라고 했지요.
박인덕 : 내가 서슴지 않고, "아, 우리 이화의 학생으로 있던 유관순이"라고 했지요. 왜 유관순이를 택했느냐고 그래서, 나도 그 때 서대문 감옥에 5달 동안 있었거든요. 나하고 바로 앉은 건너 방이예요. … 내가 가르쳤으니까 알았지요. 나를 보고 나도 저를 보고 눈을 맞췄단 말이에요 (유관순에게) "어떻게 여기 왔니" 하니까, (유관순이가) "제가 천안가서 독립운동을 하는데, 그러니까 봐서 하는 거지요, 사람이 있아 없나 순사가 있나 없나. 오래 기다리니까 할 말이 뭐 있나. 마침 띄엄띄엄 다하나 거예요"
신봉조 : 천안에서 당하던 일을.
박인덕 : 하루는 들으니까 유관순이가 죽었대요. 어떻게 죽었냐니까 만세 날마다 부르다가 저놈들이 때려 죽었대요. 목숨을 바쳤다는 거야. 그래 내가 그 후에 우리나라가 해방되면 내가 선생으로 한국여성의 애국자로 유관순을 나타내겠다 하는 차에 신교장을 그 때 만나서 그랬지. 그 피가 졸업하고 나가는 여학생의 독립운동, 우리나라가 있는 한 유관순이를 알려야 되겠다. 그 때 내가 잔타크 생각을 했어요. 한국의 잔타크라고 생각했어. 내가 이 세상에 가장 기쁘고 통쾌한 것은 유관순이를 알리고 가는 거예요. 항간에서 김마리아씨를 추대하자고도 했지요. 물론 그도 많은 옥고를 당하고 맞고 터지고 했지만 다 하고 나와 정신했죠. 유관순이는 친히 서대문형무소에서 일본놈 손에 매맞아 죽었어. 하나 밖에 없어. 대단해요. 정말 코리아의 잔딱크구나 생각했어요. 생명을 내 놨으니까요. 어린애가.
신봉조 : 박인덕 선생이 열렬하게 하던 그 말씀이 고대로 살아서 전기가 되어 한국 민족은 물론 전세계에 알려진 거죠.
박인덕 : 신교장이 이렇게 말했어요. 유관순이 이화에서 났으니 이화가 얼마나 자랑스럽냐교. 4천년 이래 참 처음 여학교이고 이 사실로 인해서 이화가 영원히 산다고 그랬죠.
신봉조 : 박인덕 선생님은 유관순을 알린 유일한 사람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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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음은 세조가 정변을 일으켜 단종을 쫓아내고 2개월이 지난 뒤에 지시한 내용이다. 위와 같은 지시한 이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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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承政院)에 전교(명령)하기를, “삼공(三公-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은 세쇄(細碎-자잘한)한 사무를 친히 보지 않고, 육경(六卿-6조)은 그 직무를 나누어서 다스리는 것이 고제(古制)이다. 이제부터 육조(六曹)의 공사(公事-공적인 업무)는 직접 계달(전달)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윤당(允當-당연)합니다.” 하였다.(<세조실록> 권2, 원년(1455) 8월 1일 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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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구려는 한국의 역사인가 아닌가. 그리고 그 이유를 설명하세요.

4. 다음은 궁궐과 관청에 각종 그릇을 납품하던 상인 지씨(池氏)의 일기인 <하재일기>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다음의 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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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년 1월 2일. 맑음. 아침을 읽찍 먹은 뒤에 박대감을 찾아 뵙고 모시고 이야기 하였다. 조금 있으니 대감께서 갑자기 묻기를, “너의 조상 중에 이름난 분이 누가 계시는가?”라고 하기에, 내가 답하여 고하기를 “미천한 후생에게 무슨 이름난 조상이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대감께서 말씀하기를 “그렇지 않다. 고려조에 지씨 성 중에 이름난 신하가 있었는데 너의 선조가 아니던가?”라고 재삼 애써 물으시기에, 나는 할 수 없이 고하기를 “고려 공민왕 때에 지용기는 정책공신으로 부원군에 봉해졌고, 평장사 지경은 저의 시조입니다”라고 하였다. 대감께서는 “지윤은 너의 선조 아닌가?”라고 하기에, 나는 일찍이 지씨 선조에 지윤이란 분이 계셨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선세(先世-선조)입니다”라고 하였더니, 대감께서 “그럼 우리 집안과는 대대로 내려오는 원한이 있으니, 다시는 나를 찾아오지 말거라”라고 하셨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몹시 놀라고 의아스러워 즉시 인사라고 돌아왔으나. 그 선세 사적에 대하여 아직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박 대감께서 취중에 하신 말씀이라 끝내 의심이 풀리지 않으니, 몹시 답답하고 답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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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다음의 사진은 1904년 서울의 모습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은?


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