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한반도의 성의식

사편(史片) 2009. 1. 3. 21:44 Posted by 아현(我峴)
고대의 성의식은 어떠했을까요. 문득 동방예의지국이니 성리학적 성의식이 많이 떠오르겠지만, 조선시대와 고대시대는 같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최근 나온 “쌍화점”이라는 영화를 통해서도 아시겠지만 고려시대의 그것은 또 다르게 인식이 되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은 머나먼 고대 한반도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성에 대한 인식은 어떠했는지 보고자 합니다.

고대의 성의식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으로 다른 문명에서 고대 동아시아 문헌 중에 성과 관련된 문장을 어떻게 번역했는지를 살펴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일본 최초의 신화적 연대기인 <고사기>(古事記-712년)를 1882년에 한 영국인이 번역을 했습니다. 그러나 첫 장면을 어떻게 할지 몰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영국은 ‘외설적 출판물 금지법’이 적용되고 있어서 잘못 번역했다가는 감옥 신세를 면하기 어려웠던 것이죠.

왜 번역하기 어려웠을까요. 이유는 간단한데 첫 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나와 있습니다. [‘이자나미’라는 여신이 “내 몸에 덜 채워진 것이 하나 있다”라고 상대방에게 초대를 하자, ‘이자나기’라는 남신은 “내 몸에는 너무 튀어나온 부분이 하나 있으니 그대의 덜 채워진 곳에 내 것을 넣어 이 세상을 낳으면 어떨까”라고 구체적인 제안을 한다] 고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8세기 일본에서는 이 정도의 표현은 야한 측에 들지 않았습니다. <만엽집>(784년)에는 이보다 더한 애적 행각의 노골적인 묘사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영국인은 이 부분을 라틴어로 처리하여 엘리트만 읽을 수 있도록 처리하였습니다.

그럼 고대 한반도는 어떠할까요. 한국인 일본보다 훨씬 철저한 유교사회였지만, 사찬 사서들에서는 고대사회의 성기숭배의 진실된 모습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삼국유사>의 지증왕 부분을 보면 음경이 상징화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비범한 사이즈라서 마땅한 배필을 얻지 못하다가 음부도 그만큼 클 모량리 여성을 어렵게 찾아내 왕비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삼국사기>에서는 지증왕은 순장제도를 없애고, 지방 행정제도를 정비하고 우경을 권장하며 신라라는 국호를 사용한 모범적인 유교적 통치자로써만 읽을 수 있을 뿐입니다.

세계의 어느 원시공동체와 마찬가지로 고대 한반도에도 성기 숭배는 다산과 풍요를 상징했습니다. 인간의 번식과 땅의 풍요는 곧 농경의례에서 성기의 등장으로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대전의 괴정동에서는 방패 모양의 청동기가 나왔는데, 눈에 띄는 것은 밭을 가는 남성의 커다란 성기입니다. 밭갈이와 파종이 성교와 같은 본질의 과정으로 이해되어 나온 현상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인간 집단의 범식을 어디까지나 여성의 성기가 좌우하기 때문에 남근과 여근 사이의 차별성은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경주 미추왕릉 지구에서 발견된 항아리 장식 토우를 보면(이 항아리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임신한 여인이 가야금을 켜고 큼직한 여성의 몸과 남성의 몸이 하나가 되어 교접하는 장면이 보이는데, 다산의 기원에서 벌거벗은 여체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여근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강하여 유교적인 성격이 강한 <삼국사기>에서도 이러한 부분은 잘 드러납니다. 선덕여왕과 옥문곡(玉門谷)의 고사는 상당히 유명하죠. 백제군이 남근이라 옥문곡이라는 여근으로 들어가면 곧 죽게돼 있으니 쉽게 잡을 수 있다고 하는 성교와 생사를 연결시키는 당대 신라인의 의식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부식이라도 옥문곡 만큼은 무시하지 못한 경주지방의 중요한 전승이었을 것입니다.

신성한 여근을 간접적으로 등장시키는 이야기는 <삼국유사>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락국의 신화적 시조인 김수로에게 아유타국에서 시집왔다는 허황옥이 김해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한 일은 입고있던 비단 바지를 벗어 산신령에게 바친 일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원효스님이 관음이 늘 머문다는 낙산사의 자리로 가는 도중에 관음보살의 화신인 한 여성이 생리 피가 묻은 곳을 빨고 있던 물을 ‘더럽다’라고 하여 거절하자 그에게 아직도 아집이 남아 있다는 것이 들통나 관세음보살의 참보습을 만나볼 수 없다는 이야기도 있죠. 아이를 달라는 사람에게 아이를 주고, 눈이 먼 아이에게 새 눈을 주는 관세음보살의 생명력의 상징은 바로 ‘생리혈’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임신한 여성의 모습을 토우로 담은 신라에서는 관세음보살을 임신하거나 출산한 여인으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신리인들이 상상했던 관세음보살이 얼마나 육체적인 존재인지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후 한국에는 엄숙한 성리학과 새로 들어온 개신교가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또한 간통법 또한 한국에서는 여전히 실정법으로 존재합니다. 나체사진을 올리면 긴급체포되어 형사처벌 할 수 있는 곡이 바로 한국입니다. 그렇다고 성희롱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죠. 이는 <고사기>를 번역하던 영국인이 살던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사회입니다. 엄숙한 성의식을 요구하는 현대사회보다 성적 개성성이 건전하고 비폭력적이며 양성평등적이었던 고대사회의 성문화가 더 발전된 형태는 아니었을까요.

* 참고문헌: 박노자, 고대는 남근석의 나라, <한겨레21> 740호, 2008,12.

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