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을 보는 남과 북의 시각

사편(史片)/근현대사 2011. 1. 6. 02:40 Posted by 아현(我峴)

3·1운동을 보는 남과 북의 시각(임경석, <통일시론> 2, 1999)

1.
3.1운동은 서울이 아니라 평양에서 먼저 시작되었다고 한다. 북한에서 나온 <조선전사>에는 그렇게 쓰여 있다. <조선전사>는 1979~82년 사이에 발간된 총 35권의 책으로 주체사상에 의거하여 쓰여진 북한의 공식 역사서이다. 대한민국으로 비유하자면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나온 <한국사> 50권과 비슷한 성질의 책이다. <조선전사> "3.1인민봉기의 폭발"이라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역사적인 3.1봉기는 평양에서의 대중적인 독립만세시위투쟁을 첫 봉화로 하여 먼저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3월 1일 평양에서는 미리 짜놓은 계획에 따라 낮 12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퍼지자, 그것을 신호로 하여 청년학생들을 비롯한 수천 명의 각계 각층 군중이 장대재에 있던 숭덕여학교 운동장으로 물밀듯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정각 오후 1시 애국의 열정으로 불타는 수천 명의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 청년학생 대표가 단 위에 뛰어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뒤이어 조선은 독립국가라는 것을 엄숙히 선포하였다"

이를 보면 평양에서 처음 시작되었음이 눈에 띈다. 그럼 서울은? "정각 오후 2시 30분"에 시작했다고 한다. 평양은 오후 1시, 서울은 2시반인 것이다. 이 시차를 왜 주목했을까. 평양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이고,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이기 때문에? <조선전사>는 존경과 흠모의 대상인 3.1운동의 발상지를 평양으로 규정하고 싶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지 모르겠다.

이뿐이 아니라. <조선전사>는 시위운동의 주도자가 누구냐에 주목했다. 책에 따르면 평양의 시위 군중은 청년학생 대표가 이끈 것으로 되어 있다. 3.1운동을 수령의 혁명전통과 연결짓고 싶었던 것인데 평양의 청년 학생층을 각성시키고 조직한 사람이 바로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이라는 주장이 있다. <조선전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평양에서의 대중적인 반일독립만세시위투쟁은 애국적인 청년학생들, 특히 우리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이신 김형직 선생님께서 일찍이 혁명의 씨앗을 뿌리시고 반일독립운동의 믿음직한 거점의 하나로 꾸려 놓으신 평양 숭실학교의 애국적 청년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일어났다"

중요한 점은 바로 숭실학교다. 김형직이 3.1운동이전에 평양 숭실학교의 학생층 속에서 혁명사업을 전개했다는 점과 숭실학교의 학생들이 3월 1일의 평양 만세시위를 주동했다는 점이다. 결국 3.1운동은 자연스럽게 김형직에 의해 주동된 것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전사>가 3.1운동의 전 과정을 김형직이 지도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김형직은 반일 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였지만, 아직 수령은 아니었다. <조선전사>에 따르면 3.1운동은 분산성과 자연발생성을 띤 군중봉기였다. 북한 역사학계는 3.1운동의 내적 약점이 수령과 혁명당의 영도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래한 것이라 파악한다. 그러므로 대중운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할 영도 세력 및 수령이 자연스럽게 필요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2.
<조선전사>가 제시한 3.1운동사 인식은 주체사상의 명제들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3.1운동을 통해 수령의 등장이 필연적 요구였음을 입증하고자 한다. 그럼 <조선전사>의 평양 시위 발발 시각은 사실일까. 서울 시위가 민족대표의 변경 문제로 지체되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틀린 말은 아니다. 본래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식으로 하고자 했으나 후에 인사동 소재 음식점인 태화관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학생 지도부에게는 이 사실이 전해지지 않았고, 학생 지도부는 민족대표에게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할 것을 권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다. 결국 서울 시위발발 시각은 예정보다 늦어진 것이다. 그에 반해 평양 시위는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또한 김형직의 혁명사업 참여는 어떨까. 그는 조선국민회라는 반일비밀결사결성에 참가하는데 이 단체는 평양신학교와 숭실학교 학생들의 운동이었다. 그러나 1918년 초에 경찰에게 검거되고 김형직도 2월 9일자로 검찰에 송치되었다. 그러므로 다소 과장되긴 했어도 <조선전사>의 역사인식이 사실에 근거를 갖추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럼 <조선전사>의 해석은 어떨까. 역사적 근거가 존재한다고 해도 그에 입각한 주장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사실과 명세 사이의 논리적 연관이 부적절하게 설정된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만세 시위는 전국 여러 곳에서 동시에 발발했으므로 평양과 서울만의 비교는 별 의미가 없다. 또한 조선국민회는 시북지방의 강력한 기독교적 분위기 속에서 만들어진 단체로 김형직 개인의 영향 하에서 일어난 것으로 판단하기에는 논리적인 무리가 있다. 김형직을 포함한 조선국민회 구성원들과 서북지방 기독교 세력의 영향력 아래 반일 역량이 성숙했다고 판단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3.
3.1운동에 대한 연구는 양도 많고 종류도 다양하다. 3.1절 기념행사는 정치적으로 양분되어 치루어졌다. 이승만과 한민당 계열을 주축으로 하는 "기미독립선언기념국민대회준비회"와 조선공산당이 주도한 "3.1기념전국준비위위원회"로 나눠었다. 기념행사가 분열되어 치워진 것처럼 3.1운동을 보는 연구 시각도 양극회되었다. 이승만과 김구, 한민당 계열은 3.1운동의 독립정신은 상해임시정부로 구현되었고 그 법통을 계승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것은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되었고 남한의 주류 인식이 되었다. 반면 조선공산당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가 전면에 움직였으나 형식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또한 통일적이고 의식적인 지도가 없이 진행되었고 그 때문에 평화적 시위운동의 방법으로 일관되고 말았다고 보았다. 즉 3.1운동은 자연발생적 대중봉기라는 것이다.

4.
3.1운동 서술은 단지 학문적 논의의 대상일 뿐 아니라 분단체제의 정치적 현실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수령 대망(待望)론"과 "임시정부 법통론"은 남북한의 체제 대립에 잇닿아 있었다. 냉전과 분단체제는 3.1운동 인식을 학자의 서재 속이 아니라 무기고 속에 배치했다. 각각의 역사인식은 남한이나 북한의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한 무기로 활용됐던 것이다. 이는 북한도 마찬가지고 남한도 마찬가지다.

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