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된" 유관순의 표상

사편(史片)/조선시대 2011. 1. 1. 10:57 Posted by 아현(我峴)

* 3·1운동의 표상 '유관순'의 발굴(정상우, <역사와 현실> 71, 2009

유관순은 3·1운동 당시 고향인 병천 아우내장터의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검거되어 이듬해 10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고,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은 인물로 3·1운동을 계획,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민족대표 33인을 뛰어 넘은 3·1운동의 대표적인 표상이다. 우리는 유관순을 통해 3·1운동을 기억할 정도이다. 그렇지만 북한에서는 3·1운동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상이한 상을 가지고 있으며, 유관순 역사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고 한다. 즉 유관순을 통해 3.1운동을 떠올리고 일제의 탄압과 민족의 저항정신을 떠올리는 것은 "남한"만의 현상인 것이다.

유관순을 기억한다는 것은 3.1운동의 표상과 기억의 방식과 연동된다. 그러므로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3.1운동 자체가 아니라 3.1운동이 "어떻게 기억되어 왔는가"가 된다. 누구(혹은 어떤 집단)에 의해 유관순이 알려졌고, 어떻게 부각되었으며, 이때 유관순은 어떤 모습으로 재현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3.1운동에 대한 주요한 기억방식은 3.1운동=유관순의 형성의 기원을 파악함과 동시에 민족해방운동에 획기를 이루는 3.1운동을 해방이라는 공간에서 어떤 집단이 어떠한 방식으로 전유하고자 했는가를 살펴보는 일도 중요한 일이 된다. 여기서는 두 가지가 주된 초점이 된다. 하나는 유관순을 수용할 수 있는 여건, 다른하나는 유관순을 부각시킨 이들은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해방이후 유관순 확산의 기반들-일제 하의 기록과 익숙한 "잔다르크"

유관순이 어떻게 대중의 시야에 들어왔는가를 살펴보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인에 의한 기록물 가운데 유관순에 관한 것이 남아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다음은 1919년 9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된 <신한민보> 기사의 일부이다.

<천안시위 운동의 후문 - 30여명을 일시에 총살>
지난 4월 경에 천안군 병천시에서 장날을 이용하여 시위운동이 있었다함은 … 김구응, 박종만 양씨의 주모 하에 수천명의 군중이 맹렬한 시위운동을 행할 세 … 김구응씨와 왜경찰이 서로 정론할 때에 왜적이 말이 몰려 제가 제총으로 자살하겠다 하더니 총날을 김씨의 복부에 하고 발포하야 당장에 죽인 후 … 늙은 모친까지 찔러 그만 세상을 하직하였다.
<한 이화여학생 체포 - 소녀의 양친은 원수에게 피살>
서울 이화학당 학생 ○○○여사는 자기의 양친이 오랑캐 왜적에게 피살을 당하여 분기의 맘을 단단히 먹고 각처로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왜적이 사냥개에게 발각되어 중상을 입고 애적의 손에 붙들려 감옥에 피수하였더라.

이화여학생의 수감사실은 유관순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확한 언급이 있는 것은 아니다. 먼저 천안에서의 만세운동은 유관순이 아닌 김구응과 박종만의 주도였다는 사실을 신문은 밝혀주고 있다. 유관순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일제 아래 유관순과 관련된 기록은 한국 내에서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유관순이 해방 이후가 되어서야 급격히 대중의 시야에 들어간 것은 틀림없다.

유관순은 아직 대중에게 생소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고나순을 잔다르크에 비유한 것은 유고나순을 쉽게 대중에게 안착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유관순의 전달자로 잔다르크가 선택된 것은 일제치하에서 잔다르크가 한국인에게 상당히 익숙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1910년대가 되면 이미 신문과 교과서, 출판을 통해 잔다르크는 조선인에게 익숙한 인물이었다. 해방 이후 당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유관순이 3.1운동의 대표적인 표상으로 발굴되어 유포된 시점에서 최초로 출판된 유관순의 전기인 <순국 처녀 유관순전>의 제1장 제목은 바로 "조선의 잔다르크"였다.

유관순의 발굴과 기념을 위한 사업 - 연결고리로서의 "이화"와 기념사업회

해방 당시 유관순의 인지도는 매우 낮았다. 역시 유관순이 대중의 시야에 포착된 것은 해방 이후다. 유관순은 1946년 10월경 처음으로 알려져 이화여중을 중심으로 하여 기념사업회가 조직되어 활동 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부도 조직되지 않은 해방 직후 유관순이 세상에 알려지는데에는 박인덕이 중요한 연결고리였다. 박인덕은 이화 출신으로 유관순이 이화학당 재학시절 선생님이었는데 형무소에 복역중인 유관순을 만나고 그의 행적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해방 이후 이화여중 교장이었던 신봉조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다음은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두 사람의 대담 내용이다.

신봉조 : 거기에 박인덕 선생님이 언젠가 오셨는데 내가 이화학교 졸업생 중에서 굉장히 국가민족에 공헌 사람 있으면 그런 분을 선생님이 말씀해 달라고 했지요.
박인덕 : 내가 서슴지 않고, "아, 우리 이화의 학생으로 있던 유관순이"라고 했지요. 왜 유관순이를 택했느냐고 그래서, 나도 그 때 서대문 감옥에 5달 동안 있었거든요.  나하고 바로 앉은 건너 방이예요. … 내가 가르쳤으니까 알았지요. 나를 보고 나도 저를 보고 눈을 맞췄단 말이에요 (유관순에게) "어떻게 여기 왔니" 하니까, (유관순이가) "제가 천안가서 독립운동을 하는데, 그러니까 봐서 하는 거지요, 사람이 있아 없나 순사가 있나 없나. 오래 기다리니까 할 말이 뭐 있나. 마침 띄엄띄엄 다하나 거예요"
신봉조 : 천안에서 당하던 일을.
박인덕 : 하루는 들으니까 유관순이가 죽었대요. 어떻게 죽었냐니까 만세 날마다 부르다가 저놈들이 때려 죽었대요. 목숨을 바쳤다는 거야. 그래 내가 그 후에 우리나라가 해방되면 내가 선생으로 한국여성의 애국자로 유관순을 나타내겠다 하는 차에 신교장을 그 때 만나서 그랬지. 그 피가 졸업하고 나가는 여학생의 독립운동, 우리나라가 있는 한 유관순이를 알려야 되겠다. 그 때 내가 잔타크 생각을 했어요. 한국의 잔타크라고 생각했어. 내가 이 세상에 가장 기쁘고 통쾌한 것은 유관순이를 알리고 가는 거예요. 항간에서 김마리아씨를 추대하자고도 했지요. 물론 그도 많은 옥고를 당하고 맞고 터지고 했지만 다 하고 나와 정신했죠. 유관순이는 친히 서대문형무소에서 일본놈 손에 매맞아 죽었어. 하나 밖에 없어. 대단해요. 정말 코리아의 잔딱크구나 생각했어요. 생명을 내 놨으니까요. 어린애가.
신봉조 : 박인덕 선생이 열렬하게 하던 그 말씀이 고대로 살아서 전기가 되어 한국 민족은 물론 전세계에 알려진 거죠.
박인덕 : 신교장이 이렇게 말했어요. 유관순이 이화에서 났으니 이화가 얼마나 자랑스럽냐교. 4천년 이래 참 처음 여학교이고 이 사실로 인해서 이화가 영원히 산다고 그랬죠.
신봉조 : 박인덕 선생님은 유관순을 알린 유일한 사람이예요.

해방직후 당시 이화 출신으로 국가에 헌신한 여성을 세상에 알려야겠다는 신봉조 개인의 바람과 병천만세운동 이후 서대문형무소에서 유관순과 박인덕의 우연한 만남, 이 두 가지가 맞아 떨어진 순간 그때 유관순은 그녀가 살던 시기를 훌쩍 뛰어 넘어 재탄생할 수 있게 되었다. 박인덕과 신봉조는 일제 말기 친일을 하던 행적이 있던 사람으로, 친일하던 지식인들은 자신의 이러한 과거를 변명하며 해방이라는 새로운 시공간에 참여할 요건을 충족시켜야만 했다. 즉 자신들의 친일 과거를 덮고 새로운 도덕적 귄위를 부여해줄 표상으로서 유관순을 발견한 것이 아닐까 싶다.

유관순이 선택된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이화출신이라는 점이다. 곧 기념사업회가 구성이 되고 사업이 추진되었다. ① 기념비, 동상 및 기념관의 건립 ② 도서를 출판하여 유관순의 정신을 국내외의 동포에게 보급할 것 ③ 교육기관을 설치하여 유관순의 정신을 기조로 한 국민교육을 실시할 것 ④ 유관순 전(傳) 영화화 ⑤ 매봉을 중심으로 녹화(綠化) 운동 전개

당시 문교부장이자 유관순기념사업회 회장이었던 오천석은 <유관순 전기> 서문에 "시방 우리나라에 제일 근심거리가 되는 것은 우리 겨레의 사상이 혼란하여 통일되지 못하고 청년남녀의 정신이 떨어지고 해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기미년 독립운동 당시 16세 소녀 유관순이 깨끗하고도 굳세인 애국정신을 가지고 용감스럽게 싸우다가 마침내 생명을 바쳐서 나라를 순한 사실을 가졌다는 것은 진실로 세계에 대한 우리의 자랑거리"라고 썼다. 또한 유관순 전기 곳곳에는 기독교적 색채가 드리워지기도 했다. 전기에 보면 "조선의 잔다르크"이며 밤에 몰래 나와 조국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는 유관순이 모습을 시작을 한다. 유관순은 청년들에게 부족한 애국심을 보여주는 좋은 선례였기 때문에 건국정신을 확립하기 위해 간행되었고, 그러한 가운데 기독교적 색채가 가미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은 초등학교 교과서에 그대로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