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덕과 신봉조의 대담

사편(史片)/근현대사 2010. 12. 31. 17:40 Posted by 아현(我峴)

* 다음은 ‘미국의 소리’ 방송에서 전 이화여고 교장 신봉조 선생과 유관순 열사의 은사였던 박인덕 선생이 대담한 것을 옮긴 글이다.


<신봉조, 박인덕 대담 - 1978. 10. 7.>


사회자(이하 사): 유관순양을 세상에 알려지게 한 두 분 선생님이 여기 계신데, 어떻게 세상에 나타나게 되었는가 하는 그 때 동기를 신봉조 당시의 교장선생님과 박인덕 선생님이 직접 좀 말씀을 자세히 해 주세요.

신봉조(이하 신): (이화의) 유명한 프라이홀, 프라이홀은 한국에서 많은 여성을 길러낸 명문 건물인데, 거기에 박인덕 선생님이 언젠가 오셨는데, 내가 이화학교 졸업생 중에서 굉장히 국가민족에 공헌 사람 있으면 그런 분을 선생님이 말씀해달라고 했지요. 그것은 프라이홀 남쪽 2층 조그만 방에서 그랬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가 언제지요?

박인덕(이하 박): 그 때가 태평양 끝난 후, 해방을 당한 후에, 이화를 갔는데, 가서 신봉조 교장을 만나 ??거든요, 지금 아까 설명하신 대로 바로 그곳에서. 첫째 신교장이 뭐라 했는고 하니 “아, 박선생 우리가 이렇게 해방되기까지 여러 남녀가 희생을 당했는데, 여자의 대표로 나서야 하겠는데, 어떻게 생각을 하시냐”고. 내가 서슴지 않고 “아, 우리 이화의 학생으로 있던 유관순이”라고 했지요. 왜 유관순이를 택하느냐고 그래서, 나도 그 때 서대문 감옥에 5달 동안 있었거든요, 유관순이가 충남인가요?

사: 천안이지요.

박: 아, 천안. 징역을 받고 왔거든요. 7년. 애국운동 하다가 일본 사람한테 잡혀서 왔는데, 나하고 바로 앉은 건너방이예요. 대개 오후 5시 되면, 문을 다 쫙 열고 호명을 합니다. 그러면 간수가 여럿이 오지요. 아무개 아무개 다 있는데, 이렇게 보니까, 유관순이가 앉았거든요. ‘아이고 쟤가 어떻게 와 갇혔나’ 말은 못하지요. 거리가 있으니까.

신: 그런데 그 얼굴을 아신 것은 선생님이 가르쳤기 때문에 아신거죠?

박: 네, 내가 가르쳤으니까 알았지요. 걔 하나만이고 다른 사람들은 보통 죄수들, 기결수들이고, 유관순이 하나만 있는데, 아! 걔가 머리를 따 내리고 와서 ‘아! 쟤가 어떻게 왔나’ 속으로,  그러는데, 서로 말은 못하지요. 그런데, 저도                                                                            나를 보고 나도 저를 보고 눈을 맞췄단 말이예요. 그런데 저녁에 대한독립만세를 불러요. 어디서 시작됐냐 하면 유관순이 방에서 유관순이가 시작한거예요. “꺄!! 대한독립 만세”하면 거기 있는 감방에 있는 사람들이 뭐 다같이 부르거든.  그러면 간수들이 다와서 “누가 주모자냐?” 유관순이가 “나요. 내 어머니 아버니가 네 놈들 총살에 죽었소. 내가 그걸 본 사람이야”

신: 사실 천안에서 어머니 아버지가 그러니까 음력 삼월 초하루, 서울에서 양력 초하룬데, 유관순이 천안에서 일으킨 것은 음력 삼월 초하루 아우내 장터란 시장에서 유관순씨가 독립운동을 일으켰는데, 어머니 아버지가 헌병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박: 그래요. 유관순이가 그걸 목격한 거예요. 우리 어머니 아버지를 저놈들이 총살해 죽였단 말이예요. 그뿐만 아니고 어쨋든 우리 민족을 저놈들이... “나는 죽더라도 죽기까지 싸운다.” 그러면 끌어 내갑니다. 얼마나 때렸는지. “죽여라. 난 죽어도 상관없다. 내 목숨 죽어서 내 민족이 구원을 받는다면, 해방된다면 너희놈들을 ?i아낸다면 나는 열번 죽어도 백번 죽어도 좋다.” 그 어린 아이가 그렇게 말을 해요. 참,  사실 나는 그렇게 못해요. 날마다 합니다. 날마다 만세소리가 나면 꼭 그방에서 나는 거예요. 그랬는데, 하루는 지방 법원에 갔어요. 같은 날 갔어요. 따로따로. 오동마차 타고. 지방 법원가서 심문을 당하는 거거든?

신: 오동마차라는 게.... 감옥에서 마차를 타고 갔군요. 지금 같으면 버스를 탔을텐데, 그땐 오동마차?

박: 네 오동마차.

신: 오동마차란 말 들은 것 같아요

박: 내가 오동마찰 탔으니까 알거든요. 우리가 거기 앉아서 지방 법원에서 부르기만 기다리는 거예요. 하루이틀 일주일 한달 두달 아무 소식 없는거거든요. 나도 거기를 가서 참, 한,  두달 기다렸나봐요. 하루는 불렀어요. 지방법원에 가면 미결수들이 심문받으러 가서 부르기 전에 기다리는 방이 있어요, 근데 고걸 나무로 쪼옥 줄행랑모양으로, 그래가지곤 하나 겨우 들어가 앉지 못하고 서서 한시간이 되거나 두시간이 되거나 하루 종일 서 있는 거예요. 한방에 한 사람씩.

사: 한 방에 한 사람씩

박: 한 방에 한 사람씩. 근데..

신: 한 방도 아니지, 한 궤짝에 하나씩.

박: 그래요. 그래 거기 있는데, 누가 벽을 ‘똑똑’, 나무로 했으니까, 하면서 “누구십니까?” 그러거든요.

사: 옆 방에서, 아니 옆칸에서.

박: 네, 옆 칸에서. 그 때도 어떻게 했느냐 하니 밖으로 사람이 지나가는 게 어른어른 뵈요.

저들이 우릴 지키려니까 우리도 보거든(볼수 있거든). 순사들이 그러니까 그거(간수) 없는 동안. “누구십니까” 그래서 “나 박인덕이야” 그러니까. “아! 선생님, 제가 유관순이예요.”, 옆 칸에 있었던거요. “어떻게 여기 왔니” 하니까 그 때 그                                                                                                                                                      말을 하는 거예요. 제가 천안 가서 독립운동을 하는데, 길을 만들어 10시 20리, 그러니까 봐서 하는 거지요, 사람이 있나 없나 순사가 있나 없나. 오래 기다리니까 할 말이 뭐 있나. 마침 띄엄띄엄 다하는 거예요.

신: 천안에서 당하던 일을.

박: 네. 어머니 아버지가 일본놈에게 총에 맞아 죽는 걸 내 눈앞에서 봤다. 피를 토하고. “선생님, 나는 각오했습니다. 이 몸을 독립운동 위해서 나는 죽어도 상관없습니다.” 잡혀서 7년형을 받았고 상고했대요. 그래서 여길 왔대요. 그걸 받아서도 기결수로 두지 않고 미결수에 둔 것은 상고했으니까 아직 미결이라 말이야. 그래서 거기 와선 있는 걸 서로 봤으니까 만나서 얘기할 수 있는 건 거기 밖에 없죠. 아주 긴장해요 아이가. 결심하고.

  내가 먼저 불려 들어갔어요. 난 나간다는 거야. 삘링스가 내 석방을 위해 30원 보석을 내서 나는 그날 돌아오는데, 걔는 언제 했는지 모르겠는데. 돌아와서 그날 저녁 점고할 때 또 보는데, 어쨋든지

사: 그 서대문 형무소에서

박: 예, 그 복도 건너서 보는데, 어떻게 맞고 들어오는지. 하루는 들으니까 유관순이가 죽었대요. 어떻게 죽었냐니까 만세 날마다 부르다가 저놈들이 때려죽었대요. 걔는 죽도록 하는 거야. 목숨을 바쳤다는 거야. 그래 내가 그후에 언제든지 우리 나라가 해방되면, 내가 선생으로서 한국 여성의 애국자로 유관순을 나타냈겠다. 하는 차에 신교장을 그 때 만나서 그랬지. 이화가서 유관순기념관을 보면, 그 때 생각나고. 유관순이 일본놈 손에 맞아 죽었지, 그 피가 살았어. 그 피가 졸업하고 나가는 여학생의 독립운동, 우리나라가 있는 한 유관순이를 알려야 되겠다. 그 때 내가 잔타크 생각을 했어요. 한국의 잔타크라고 생각했어요. 나이도 비슷해

신: 같아요. 열여섯살.

박: 네, 나이도 같아요. 신교장, 내가 이 세상에 가장 기쁘고 통괘한 것은 유관순이를 알리고 가는거예요. 항간에서 김마리아씨를 추대하자고도 했지요. 물론 그도 많이 옥고를 당하고 맞고 터지고 했지만 다 하고 나와 정신했죠. 유관순이는 친히 서대문형무소에서 일본놈 손에 매맞아 죽었어. 하나 밖에 없어. 대단해요 정말, 코리아의 잔딱크구나 생각했어요. 생명을 내 놨으니까요. 어린애가.

사: 신박사님은 어떻게 유관순을 알리게 되었나요.

신: 그 때 윤봉춘 감독이 유관순 영화를 만들었어요. 영화니까 뭐 각색. 윤색, 문학적 그런 게 있었죠. 서울을 위시해 방방곡곡에서 영화를 보고 굉장한 감동을 받았어요. 애국자의 일제시대 당하던 생생한 사실이 영화로 나간 것이 처음일거요. 영화사상 최고의 인원이 동원된거요. 그러니 유관순하면 영화 보고 모르는 사람이 없는거지. 그 영화보고. 그 다음엔 유관순이 하도 유명하니까. 몇 해 후에 또 다른 사람이 유관순 영화를 만들어 국도극장에서 상영했지. 그때는 배우가 도금봉이란 사람이예요. 윤봉춘 유관순의 배우 그 아인 죽었어요, 이름은 잊었어. 
  그 이후엔 잡지 그런데서 기회있을 때마다 유관순 이야기가 글로 나오고, 교과서도 나오고, 시를 쓴 사람이 동아일보의 설의식이라는 분이 ‘순국처녀 유관순’이란 시를 써서. 그걸 얻어 뒀더가 그게 그 후에 여러 군데 좋은 시가 생겼  고. 소설화 한 사람이, 박화성이 ‘타오르는 별’이지. 수백페이지 굉장한 소설이지. 유관순에 대한 대목은 다 들어갔지만, 소설화해서 재판인지 몇판인지 그렇고. 그 이후엔 이순석이라는 조각간데, 대리석으로 ‘순국처녀 유관순’이란 제목으로 조각을 만들었지. 그 조각의 카피가요 이화학교 강당가면 조그만 게 하나 있고. 그것이 지금 어딨냐면 태능에, 지금 이순석 선생이 대리석으로 “순국처녀 유관순”이란 제목으로 조각 만들어 태능에 있는 선수촌 근처에 유명한 조각들이 있는 데 있고. 교과서에도 들어가고, 외국에도 잔닥크 인 코리아, 코리안 잔닥이라고 해서 널리 알려졌어요. 지금은 국민학교 아이라도 유관순 모르는 사람 없대요. 전세계에서 두 사람이라면 불란서의 잔탁크와 한국의 유관순이라는 거 널리 알려졌다는 거. 박선생님 그 때 말씀, 그게 시초가 되어, 나는 유관순 말도 못들어봤어. 이화학교 교장이면서. 그건 일본사람들이 일제 시대에 유관순이라든지 그런 사람을 알릴 이치가 없죠. 늘 유관순씨를 생각할 때는 박인덕 선생을 기억하죠. 박인덕 선생이 열렬하게 하던 그 말씀이 고대로 살아서 전기가 되어 한국 민족은 물론이고 전세계에 알려진 거죠.

박: 신교장이 이렇게 말했어요. 유관순이 이화에서 났으니 이화가 얼마나 자랑스럽냐고. 4천년 이래 참 처음 여학교이고 이 사실로 인해서 이화가 영원히 산다고 그랬죠. 누군가 이젠 정말 알려야 해요. 그동안 이렇게 시작한 걸 알리지 못했죠.

사: 덧붙여 이화의 자랑을 한다면, 외국에 나가면 한양가를 애국가로 알아요. 애국가처럼 모르고 누가 지었는지 모르고 덮어놓고 그걸 애창하고 고국을 생각하고 그래요. 그랬는데 누가 그걸 작사한 지 몰라 항간에서 생각나는대로 윤치호씨라고 또 안창호씨가 지었다 그랬죠. 그런데 박인덕 선생님이 이화에 계실 적이 유관순이랑 그 때에....

신: 가만 있자, 그 얘길 좀 해야겠네. 많은 사람들이 그걸 안창호씨가 지은 줄 아는데, 해방후에 박인덕 선생이 지은 걸 알고, 내가 그걸 먼저 알고 먼저 알렸지요.

박: 3․1운동 나기 전에. 그 때 유관순이도 다 있을 때죠. 5월이예요. 프라이홀 4층에서 음악을 했거든요. 그 날 초하룻날인데, 날이 아름답고 좋아요. 그래서 뭘 가르칠까 하다가. 명곡 100곡집을 보다가 일리노이 주가가 있어요. 근데, 곡조가 쉬워서, 내가 작사를 해서 붙여야겠다 하고, “한강물은 쉬지 않고 흐른다 한양아 한양아..” 했더니 애들이 너무 좋아해요. 그래 2, 3절을 더 넣지요. 그랬더니 그게 사람들이 많이 불러서 애국가가 됐어요.

신: 참, 박인덕 선생님은 유관순을 알린 유일한 사람이예요. 스승과 제자니까 알 수 있었구요. 어떻게 참, 감옥에서 건너편에 있을 수 있는지.

사: 혹시 감방 호수 아세요?

박: 감방에서 걔는 13호, 나는 7호에 있었어요. 다시 말하지만, 유관순이를 알리게 되어 난 참 기뻐요.

사: 오늘 이렇게 두 분을 모시고 귀한 말씀을 듣게 되어 감사합니다.

* 출처 : <유관순연구소 소식> 제44호, 2006년 10월 → (클릭)

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