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평정치의 이념적 배경

사편(史片)/조선시대 2010. 12. 4. 19:48 Posted by 아현(我峴)
 
탕평정치의 이념적 배경(김백철, 제1장, <조선후기 영조의 탕평정치>, 태학사, 2010)

1. 탕평정국
  * 탕평정치의 대두는 군주의 의리를 척도로 하는 새로운 정치운영 체계의 등장을 의미
  * 황극탕평론의 궁극적인 지향점을 유교적 이상사회의 현실구현이었으며 정치 부문에서 구현된 구체적인 정책은 환국으로 충역이 엇갈린 서로 다른 붕당의 인사들을 모두 군주의 의리에 새로이 귀일시켜 두루 등용하고자 하는 인사정책으로 제시
  * 탕평이란 용어는 17세기 들어 점차로 인용 사례가 늘어나다가 18세기에 정치개념화 - 이이가 처음 제기하고 박세채가 정립
  * 탕평과 황극을 인사정책과 관련하여 이론화한 것이 바로 박세채 - 박세체의 시무만언소
  * 환국정치는 본격적인 탕평정국에 접어들기 위해 극복해야 할 정치유산
  * 영조의 절박했던 문제는 자신의 왕위 정통성에 대한 시비를 없애는 것과 노소론 모두를 국왕의 충성스런 신하로 만드는 것

2. 탕평정치의 이념과 모색
 1) 요순정치의 추구
  * 영조는 숙종과 마찬가지로 박세채의 황극탕평론을 채택하여 즉위초부터 탕평교서를 반포하면서 적극적인 의지 피력
  * 전통의 재인식 - 정치구도의 재편과정에서 그 상징성과 정통성을 재천명하는 수단으로서 전통에 대한 계승이란 사업을 미묘하게 접목
  * 숙종대까지 아직 요순대 고사가 절대적인 권위로서 인식되지 않음, 그러나 영조년간이 되자 요순은 더이상 고대의 아득한 인물이 아니었으며 현실정치에서 표방가능한 정치목표이자 군주와 신료들이 함께 내세운 수신상이 됨
  * 국왕이 탕평을 표방할 때 요순을 정치지표로 내세운 것은 환국기의 충역시비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가치 체계를 창출하는 것 외에도 사림들의 절대가치인 요순을 국왕이 적극적으로 채택하여 활용한다는 의미
  * 신료들의 요순 강조는 이제 국왕과 요순을 동일시하는데까지 발돋음
  * 가장 두드러진 것은 탕평정국에서 새로운 가치 명분의 패러다임을 세우고자 한 영조의 정통성 재천명사업 - 조종에 대한 격상된 평가가 전제
  * 영조의 정책에 대해서 항상 비판적인 자세를 지녔던 소론 박문수의 태도변화 주목
  * 영조 40년대 정국에서는 이미 요순지치를 뛰어넘은 것으로 생각
  * 영조는 스스로 군사를 자처하여 자신의 권위를 신성화시키기 위해 조선전기 사림들이 제시한 이데올로기를 역으로 이용
  * 자신과 경종과의 관계 설정 : 자신이 사심이 없기에 요순을 표방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왕위 계승에 아무런 혐의가 없다는 논리
  * 다음으로 요순의 덕목으로 효제를 십분활용 : 요순의 효제는 군신관계를 설정하는 논리로 활용, 신료들이 내세운 가치가 요순이고 영조의 탕평이 요순을 표방하자 국왕은 이제 요순 그 자체로 인정받은 → 군부일체론

2) 문물제도 정비론
  * <경국대전> 修明 논의 → 속편 형식 전환 → 국조오례의 속편 논의 → 속대전과 속오례의 완성 → 大訓
  * 인사정책을 중심으로 하는 조제보합의 탕평책에서 제도 중심으로 옮겨가게 되었음을 의미
  * 요순에 대한 재인식이 결국 조종에 대한 계승의식을 낳았고 이는 세조조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짐
  * 요순의 이상사회를 실제로 세종조에 구현해 낸 것으로 이해하고 요순을 모범으로 삼는 정치지표를 세종에게 전이시킨 점
  * 요순지치 → 조종의 良法과 美制 → 세종대 문물 이라는 구도
  * 새로운 전통인식 과정에서 매개물로 '주례'를 내세움
  * 요순의 주례와 세종의 경국대전이 하나로 이해, 따라서 이를 수명하고 속편을 편찬한 영조는 자연 이 길을 계승한 군주로 자리매김
  *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국왕의 명분과 정통성을 부여받는 방법

3. 탕평정국의 주례
 1) 주례의 부각
  * 국조의 유교적 전통이해 방시으로서의 회귀는 자연히 국초의 문물회복에 초점이 모아짐
  * 영조년간 요순의 강조와 주례의 부각은 성인 군조의 문물제도, 정비사업에까지 파장을 미침
  * 전통시대 주자학에서 '주례'를 이단서로 이해했다고 하는 것은 근대적 시각에 의해서 전통시대 상이 상당부분 제약당했던 사례로 생각됨, 조선시대 노론계의 '주례'인용도 빈번
  * 순정성리학을 주장하는 노론계가 당연히 '주례'를 기피할 것이라는 주장은 반복되어 왔으나 실제 자료와는 상이한 양상이 나타난다.
  * 영조대 탕평정국에서 '주례'를 빈번히 정치일선에 내세운 것은 주나라도 상정되는 유교적 이상사회의 권위를 빌려오고자 한 것

 2) 경연의 주례 진강
  * 심경은 성인의 내적 수양을, 주례는 성인의 외적 공업을 상징하는 경서
  * 영조 초반 탕평은 인위적 재편위주, 명분상 도저히 함께 출사할 수 없는 난점 때문 → 국왕은 소론계 완론들을 주축으로 삼으면서 조제보합 시도
  * 이 시기 진강이 이루어지면서 '주례'는 법제 정비 외에도 사안별로 구체적인 정책 입론에도 이용
  * 낭관이 통청권 폐지와 쌍거호대는 영조대 인사정책의 핵심

 3) 군주의 새로운 '주례' 인식
  * 영조는 전통-유교적 이상정치와 조선초기의 문화전통-에 대한 나름대로의 평가와 계승의식을 지녔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단지 문화전통에 대한 계승만이 아닌 현실적인 필요라는 점에서도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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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 유교적 이상사회인 요순정치를 표방하여 당대 자신의 사업으로 삼아 구현해 내고자 하는 의도
    ② 주례는 국초의 전범으로 이해
    ③ 왕세자에 대한 훈육이라는 점과도 연관
    ④ 주례의 표방은 영조의 정통성 재천명 사업으로 생각
  * 국초 세종의 문물 정비에 준하는 사업을 이미 영조 20년대에 끝내고, 30년대에는 자신의 명분을 정립하여 열성의 중흥 군주들과 부왕의 사업을 이어보려는 전통 계승의식으로 이해.

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