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일본의 치명적 발명품, 무사도(박노자, <한겨레21> 838호, 2010년 12월 6일자)

세계의 어느 나라를 봐도 국민국가에 유리한 쪽으로 전통의 이미지를 조작하지 않은 곳은 없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박정희가 대표적이고 그와 더불어 박종홍은 어용적인 사상을 만들어냅니다. 197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선비정신'이 대표적입니다. 선비의 지배이데올로기로 표현되는 선비정신은 단지 성리학일 뿐인데 말이죠.

그러면 선비들은 고매한가. 오히려 조선의 지배층이었던 양반사대부들은 고매한 선비였다기 보다는 소유욕과 승부욕, 출세욕을 분출할 수 밖에 없는 지배층이었습니다. 상것들의 재산을 빼았거나, 도망간 노비들을 찾아다닌다거나, 관직에 올라가기 위하여 많은 청탁을 하기도 하죠. 영국 탐험가 비숍은 그래서 이들을 "흡혈귀 간은 존재"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성호 이익은 선비들의 불같은 출세욕을 거의 망국적 질환으로 보기도 합니다.

조선후기 선비들의 타락은 개항기 계몽주의자부터 지금의 근대적 지식인들의 한탄과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박정희는 자신의 책에서 선비문화를 위시한 전통시대의 역사를 퇴영, 조잡, 침체의 연쇄사라고 싸잡아 폄하를 했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 관주도의 문화정책은 선비정신이 선양되고 율곡과 퇴계가 각광을 받아 지폐인물로 선정되면서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박정희에게 근대 이전의 충효 전통이 그 자신의 의도(장기집권)을 합리화하는 기제로 요구되었습니다. 정치의 반동화가 관 주도 사상 흐름의 복고화를 부르고 복고적 민족주의 차원에서 선비문화에 전통의 후광이 입혀지는 것이죠. 즉 박정희는 선비나라의 군주가 되는 꼴입니다.

박정희의 이러한 생각은 대개 부국강병을 부르짓던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선비정신이라면 일본은 무사도라는 것이 있죠. 메이지 시대 일본인들에게 무사도가 일본의 위대한 전통임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무사도가 근대적 발명품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에도시대(1603~1868) 일본에서는 사무라이 즉 지배층은 인구의 10%도 안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무도(武道) 문화는 일본인 전체가 향유하던 것이 아니죠. 그리고 에도시대는 점차 유교화되어가던 농업관료제 사회로 무사도의 나라라도 부르기에도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진 것은 청일전쟁에서 동북아의 군사적 패권국가로 등장한 이후였습니다. 박정희가 초기에 전통문화에 무관심하고 적대적이었듯이 메이지 초기 일본에서도 전통을 부정적으로 인식하여 사무라이문화를 전근대의 유산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러일전쟁을 준비하면서 점차 군사화되고 군국조의를 합리화하는 전통이 절실하게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등장하게 된 것이 별로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던 무사도였습니다. 1900년대 이후 무사도에 관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난 이후 군국주의 이데올로기를 핵심으로 등장한 무사도 담론은 전후 한때 혹독한 비판을 받아 그 자취를 감춘듯 했으니 1960년대 무사도가 다시 등장을 하게 되고 경제성장이 멈춘 1990년대 포스트모던의 유행으로 선과 악의 구분이 흐려지면서 일본에서는 무사의 멋진 칼이나 주먹이 다시 노골적인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 상대의 가슴에 시원하게 칼을 꽂거나 몸을 쾌활하게 풀어 상대를 멋있게 때려눕히는 폭력적인 장면이 상당히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제 무사도는 정신이 아닌 눈요기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죠.

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