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관영상업의 한계

사편(史片) 2008. 11. 14. 00:22 Posted by 아현(我峴)

관영상업의 한계를 잘 드러내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나리포창 운영의 변화이다.

18세기 조선정부는 재정이 부족해지자 상품화폐경제를 이용하여 제주도의 진휼을 시행하고 있었다. 1704년(숙종 30)에 전라도 영암 갈두진에 제주 진휼을 위한 전담 곡식창고를 만든 것이 바로 그 시초이다. 그러나 인근 지역에서 진휼곡의 확보가 어려워지고 제주도의 곡식 대금이 원활하지 않자 정부는 곡식 대신 화폐를 활용하는 방식을 구상하게 되었다. 이처럼 중앙정부는 재정지출을 최소화하면서도 영호남 연해읍과 제주민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고자 했다.

갈두진에 만들어진 창고의 운영이 원활하지 않자 1720년(숙종 46)에 금강에 있던 나리포창을 임피로 옮겨 제주 진휼을 위한 전담 창고로 바꾸었다. 이후 1787년(정조 11)에 나주로 이설할 때까지 모두 12차례에 걸쳐서 운영규정을 개설하였다.(나리포창의 운영에 대해서는 <나리포사실>에 자세하다. 이 문서는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이처럼 운영규정이 수시로 변하면서 운영이 지지부진해졌는데 그 원인은 바로 관영상업이 갖는 한계에 있었다. 관영상업은 농민에 대한 인신적 지배를 질서 체제의 근간으로 하는 사회구조의 변화 없이는 효율적인 운영이 어려웠다. 결국 농민에 대한 직접적 수탈을 확대하고 강화하는 측면만 부각될 수 밖에 없었다. 오히려 관영상업을 경영함으로써 그 이윤으로 제주진휼곡을 확보하려 했던 원래의 의도와 달리, 그것은 다시 나리포와 그 주변 거주민들에게 부담이 전가되는 형태가 되고 말았다.

이후 18세기 말이 되면 관에서 주도하는 제주와 육지간의 물자유통을 통해 제주의 진휼문제를 해결하려는 기조를 버리고 그 역할을 민간차원의 교역으로 넘기는 형태로 정책이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관영상업은 대청무역에서도 마찬가지의 양상을 보였다. 정부주도의 관모제는 몇년이 지나지 않아 세모제로 변환되어 역관중심에서 상인중심으로 그 무역의 주도권이 변화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직 관영상업의 성격에 대해서는 뚜렷한 정부의 정책이 무엇인지, 그 결과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밝히지 않는 이상 더 나아가는 해석은 무리일 듯하다.

참고문헌 : 이욱, "18~19세기 중반 제주지역 상품화폐경제 발전과 성격", <국학연구> 12, 2008.

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