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의 실체적 접근 1

사편(史片)/조선시대 2010. 10. 30. 00:19 Posted by 아현(我峴)

의병의 실체적 접근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2010년 하반기 학술대회에서 진행된, '한국역사 속의 의병, 그 실체적 접근'을 정리한 것입니다.

1. 임진왜란기 의병의 활동과 양상(계승범)

* 의병의 개념 정의 문제 - 보통 의병하면 義로운 군병 내지는 義를 위해 일어난 군병이라는 추상적을 뜻을 가지지만 아직 개념 정의가 명확하게 정리된 것은 아닙니다. 당시 조정에서는 "국가를 위해 토적에 나서지만, 국가의 도움 없이 병력과 군량을 스스로 감당하며 자체 지휘체계를 갖춘 비공식 부대"로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서구학계에서는 의병을 대개 rightous army라고 직역하기도 하지만 실제적인 의미로 본다면 guerilla라고 하는게 더 정확하다고 하네요.

* 연구동향으로 본 임진의병의 활동 추세 - 대체로 180여편의 연구성과들이 나왔는데 대부분은 특정인물이나 특정지역에 대한 연구가 상당수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지역별로 살펴보면 경상도의 경우 37편의 논문이 있는데 이 중에서 7편은 경주지역에 한정되어 있고, 다른 지역도 거개는 마찬가지입니다. 인물도 그러해서 곽재우 관련 연구는 12편, 김면은 9편, 조헌은 6편이라고 합니다. 임진의병의 전반적인 성격에 대한 논문은 180여편 중에서 23편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편중된 역사연구는 결국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의 성격을 밝히는데 크게 도움을 주지 못하고, 단순한 지역 및 인물 연구로 한계를 짓게 마련입니다.

* 전황의 추이로 본 임진의병의 군사적 실상 - 아마도 의병정신에 대한 지나친 강조로 의병의 실상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평가는 소홀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실제 의병은 초기 전란 1년 정도에만 일정정도의 업적 및 의미를 가지고 있지 그 이후에는 대부분 관군에 편입되어 의병으로서의 의미는 상당히 퇴각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 그 기여도는 어떻까. 전투력으로는 제2차 진주성 전투 이후 그 의미는 거의 사라졌으며 실제로 활약한 것은 전란 이후 8개월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 전투병력도 아직 잘 파악이 되어 있으며 무기체계와 전술체계도 잘 모르는 것이 현재의 상황일 것입니다.

2. 망우당 곽재우에 관한 불편한 진실과 임진 의병 활동에 대한 재평가(김성우)

* 곽재우 관련 기록들 - 곽재우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자료는 <망우선생문집>에 있는 연보입니다. 문집 전체의 1/5가 연보일 정도로 상당한 분량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연보의 내용과는 전혀 다른 사실이 기록된 자료가 존재하는데 바로 <광해군일기>에 있는 곽재우 졸기입니다. 졸기를 보면 곽재우가 성리학을 알지 못해 요행히 진사시에서 등수에 들었다고 하며 의령에서 돈을 모으는데 골몰한 전형적인 인색한 부호라고 나옵니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하고는 전혀 다르죠. 기존에는 은둔 처사형 성리학자라고 불렸습니다. 또 다른 자료로는 바로 배대유의 傳입니다. 배대유는 곽재우와 더불어 의병을 하는데, 배대유의 전기에서는 곽재우를 문무를 겸비한 전형적인 유학자로, 노년에는 짚신 차림으로 물고기를 낚는 일로 세월을 보낸 은둔현 처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배대유의 전기에는 몇가지 오류와 과장이 있습니다.  하나는 실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일 사실이 다르고 모호하게 기재되어 있고 둘째는 4도체찰사 이원익과의 관계가 모호하게 처리되어 있다는 것이죠. 그럼 대체 그의 실제 모습을 어떤걸까요.

* 전쟁 이전 시기의 삶의 모습 - 연보에 의하면 곽재우는 실용학문과 무업에 관심이 있었다고 합니다. 문학이 안되면 무예에 힘쓰는데 당시에는 보편적이었죠. 공부를 시작한지 21년 만인 34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지만, 합격자들 답안이 문제가 되어 무효가 됩니다. 뼈아픈 일이었죠. 근데 연보에는 정시 2등에 합격했다고 나옵니다. 사실이 아니죠. 그래서 졸기에는 정확하게 진사시에 들었지만 합격하지 못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듬해 아버지의 사망으로 시묘살이를 하고 의령에서 줄곧 살게 됩니다. 졸기에는 이때 농업에 투신해서 돈을 많이 모았다고 나옵니다. 그래서 아마 꽤 부호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근데 이때 전쟁이 일어나죠. 그는 의병을 일으키는데 이에 대한 포상으로 선조는 그에게 관직을 줍니다. 이미 과의교위의 품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군대복무에 대한 반대급부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1592년 4월 22일 곽재우가 창의하여 초계현과 의령 신반현의 관곡과 무기를 접수하는데 합천군수는 우병사와 감사에게 그를 토적으로 고발합니다. 의병이라고 안본 것이죠. 결국 공권력의 위세에 눌린 곽재우는 일방적으로 밀리게 되지만, 경상감사였던 김수가 근왕병 활동에 실패하자 오히려 곽재우가 격문을 돌려 김수의 공개처단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곽재우가 일본군과 붙어 승리한 직후에는 더욱 기세가 등등해지죠. 김수의 곽재우에 대한 공개적인 비난은 다음의 장계에서 잘 보입니다.

"곽재우의 분노와 원한이 사라지지 않아 낙강유생을 꾀어 당을 만드니 날마다 많은 무리들이 모여들었다. 이름을 의병이라 칭하고 겉으로 왜적을 토벌하는 흔적을 드러내지만, 안으로는 불측한 계략을 품고 있었다"

낙강유생이란 향교의 유생 중에서 사서 강독 시험을 보아, 외우지 못하는 유생은 군대로 보내는 것을 말합니다. 시험에서 떨어진 유생을 낙강유생이라고 하는데 전쟁 이전에 감사 김수가 낙강교생에 대한 충군정책을 강하게 피는 바람에 이때 유생들에게 많은 비난을 사게 되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바로 곽재우와 관련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김수는 곽재우를 이들과 엮어서 비난했던 것이죠. 그러나 전쟁 이후 곽재우는 지역 사람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켜 김수 또한 비난하는 것을 보면 그가 경제력 면에서 상당한 부를 가지고 있었고 또한 무기를 구비하여 일본군과의 접전에서 승리한 것을 보면 그의 힘이 작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은둔형 처사나 고매한 성리학자는 아니었다고 볼 수 있죠.

* 창의 초기의 활동 - 창의는 쉬운일이 아니었습니다. 보통 국가의 명령이 있거나 지방관의 요청이 있어야 창의가 가능한데, 곽재우는 이런 일이 없이 먼저 창의를 해버립니다. 당시까지 양반의 무장은 관이나 국가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사안이었습니다. 선조로부터 창의교서를 받고 의병을 일으켜도 상당한 제약이 따르므로 스스로 무장한다는 것은 상당한 모험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까 합천군수가 그를 토적으로 몰아세운 것도 그러한 이유였을 것입니다.

* 종전 이후의 정치적 향방 - 곽재우에 대한 서술도 당파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습니다. 곽재우의 전기를 보면 김성일, 유성룡, 이원익에 대한 의도적인 편하와 김영남, 정인홍 등에 대한 우호적인 서실이 드러납니다. 즉 곽재우가 지내던 지역은 북인계가 장악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남인과는 사이가 좋지 않은 것으로 북인과는 사이가 좋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 곽재우는 남인과 상당히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그래서 곽재우가 종전 이후 정치적 성향을 결정짓는 사건에 대해서 서술이 모호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그가 1600년에 올린 상소가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 물러나갈 청하면서 다음과 같은 3가지 이유를 듭니다. 1. 성지를 수축해서 방어하는 것이 옳지만 현재는 수군에만 의지하고 있다. 2. 화의론자들을 맹비난하고 있지만 화친은 병가의 위도로서 폐지할 수 없다. 3. 영의정 이원익은 어진 정승으로 사직신인데 그를 파직시켰다. 2번과 3번은 남인들에 대한 북인의 정치적 공세인데, 북인이라고 판단되는 그가 남인의 의견이나 남인 자체를 비호하고 있는 것이죠.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그는 망우정을 짓과 아들과 함께 지독하게 가난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거의 전재산을 의병에 투척해버렸으나 종전이후에 경제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광해군이 그를 부르기는 했으나 북인정권 아래에서 관직 생활을 하기란 쉽지 않았죠. 광해군은 그를 현자로 대우하였지만, 영창대군 사사를 반대하는 상소로 정치적 삶은 마감하게 됩니다. 오히려 북인관료들은 그를 역모사건에 얽히게 하려고 했죠. 이런 면에서 보면 그는 거의 완벽한 남인계에 해당하지만, 지금 남아 있는 기록 속에는 그를 북인으로 만들려고 하는 자취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기록이 각색된 것이죠.

곽재우가 이정도라면 다른 의병의 기록은 어떨까. 경상도 3대 의병장인 김면의 문집의 왜곡사례, 정유재란 당시 곽재우를 비롯하여 화왕산성을 사수한 동지의 명부인 <화왕입산동고록>의 왜곡사례도 아주 일부에 불과합니다. 아직 연구가 안되어서 그렇지 상당히 기록의 왜곡이 많다고 보여집니다. 화왕산성문제는 지난 글에서도 썼던 내용입니다. 참고해 보시면 되요.

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