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의 토지론과 조선후기 유자

사편(史片)/조선시대 2010. 10. 29. 00:14 Posted by 아현(我峴)

주자의 토지론과 조선후기 유자 - 지주제와 소농경제의 문제 (김용섭, 신정증보판 조선후기농업사연구2, 지식산업사, 2006)

1. 서언

* 조선후기에는 시대의 진전, 주자학 연구의 발달과도 관련하여 주자학 내부에 반주자학적 경향의 학풍이 싹트고 있었다. 이 시기 유자들은 농업, 토지문제를 둘러싸고 주자학적 입장과 반주자학적 입장으로 갈리고 있었다. 경제제도를 지주제로서 그대로 이끌어가려는 견해와 자경농 중심의 소농경제체제로 변혁하려는 견해의 대립이 있었다.

2. 송대의 농업, 토지문제

* 송대에는 집권체제가 확립되고 관료제도가 발달 → ① 토지겸병의 주체가 증가, 토지집적은 권력을 배경으로 하는 것 → ② 부세불균의 문제 발생 → ③ 토지겸병의 결과로서 향촌사회가 무전농민과 유전자라 하더라도 극빈의 영세농으로 충만하고 있었다는 사실
* 끝으로 우리가 들게 되는 것은 위와 같은 농업구조 형성의 결과로서 농민항쟁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 이 항쟁은 송대 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 대토지소유자와 지주층, 농민층의 대립관계의 심화 속에서 발생

3. 농정이정책과 주자의 토지론

* 남송은 외세를 두려워하고 있었으나 내환도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음 ->내정개혁, 즉 농정의 이정문제
* 이정의 방략 - ① 부세제도를 이정함으로써 사태를 수습하려는 것, ② 토지제도까지도 개혁하려는 것

부세제도 이정책
* 이들은 중소지주층의 입장에서 그리고 그들을 대변하는 인물들로서 농민경제의 안정과 국가재정의 호가보를 내세워 이를 강행
* 한전제, 방전균세법, 경계책 등의 정책
* 한전법은 대소관료의 면역특권의 한계를 정하는 제도
* 방전균세법은 왕안석의 이른바 변법, 신법의 일환으로 시행된 것
* 경계책은 남송에서 시행된 토지측량정책

@ 토지제도 이정책
* 정전론, 균전론, 혹은 한전론으로 제기
* 정이와 장재의 정전론이나 소순의 한전론 그리고 임훈의 정전론과 한전론을 종합한 일종의 균전론이 제론되는 것이 바로 이때의 일

@ 주자의 토지론과 부세론
* 부세제도를 이정함으로써 이 시기의 농업모순, 사회혼란을 수습하려는 것, 토지개혁에 관해서는 부정적
* 그는 농민충의 항쟁보다는 지배층의 저항을 더 두려워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점에서도 토지제도는 손대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함 → 토지개혁의 비현실성을 역설
* 토지개혁의 실현 가능성을 부정하는 주자의 자세는 철저하여서 타인의 설을 극렬하게 반대, 맹자에 대해서 조차도 비판적.
* 토지개혁을 꼭 하려면 반드시 정전제를 행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현행대로 그대로 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함
* 사회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의 문제 - ① 그 모순을 변혁으로써가 아니라 지주, 전호 간의 상호협력으로써 해결하자는 것, 그는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향촌민에게 이를 극구 강조, ② 현체제 안에서 제도 운영을 잘해 나가면 된다는 점, 擇人의 문제가 있고, 부세제도의 불합리를 이정해 나가는 문제.
* 구체적으로 가장 큰 제거 대상은 영세농민이 토질르 방매하고 몰락해 있으면서도 세금을 그대로 내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호세가가 토지를 매입하여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세금을 안내고 있는 현상
* 대토지소유자들의 토지소유권, 지주경영을 그대로 인정한 채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부당한 탈세행위만을 제거하려는 것이지만, 그는 이것이 농민보호에 큰 효과가 있는 것으로 이해
* 주자의 이정책의 큰 한계 - 몰락농민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지주층의 입장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 그의 이정책은 불철저하고 소극적인 것.

4. 주자토지론에 대한 조선 유자의 찬반

* 주자토지론에 대한 찬반이 조선전기에는 아직 표면화되고 있지 않았다 - 주자학 이해문제
* 주자학에 대한 자료적 검토는 퇴계와 율곡 단계에서 본격화 - 이 시기 지식인들은 기자와 그 정전에 많은 관심을 보임
* 두 가지 방법론 - 균전론과 한전론을 말하게 하고 그 뒤에는 기자와 기자정전에 주목.
* 주자학 안에서 주자토지론에 대한 찬반이 갈리게 되는 것은 조선후기에 들어와 국가재조의 문제가 주요 과제로 제기되면서부터의 일이다.

@ 제1단계(16세기 말~17세기 초)
* 이때 주자의 견해에 충실하였던 학자는 주자의 학과 견해를 충실히 검토하고 있는 사람들
* 율곡은 그 개혁의 필요성, 즉 정전제의 복구에 대하여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는데, 김장생등의 후학은 그에 선행하는 주자의 설에 충실함 → 서인, 주자토지론에 대해 찬성
* 주자의 토지론에 이의를 제기하게 되는 것은 한백겸이 기전유제설을 내면서부터 비롯됨, 주자설에 대한 직접적인 반론이 아니라 주자설을 따르는 논자들에 대한 반대였으며또 주자를 변호를 하는 것이기도 하였지만, 결국 주자토지론을 완곡하게 부정하는 것이 아닐 수 없었음 → 동인계

@ 제2단계(17세기 중엽~18세기 중엽)
* 주자토지론에 대한 찬반 양론은 더욱 왕성하게 전개, 이론이 나올 수 없게 하기 위한 방대한 문헌정리
* 지지논자들은 사계를 통해 율곡의 학통을 이은 서인, 노론의 송시열, 한원진에 의해 전개, 주자의 가르침의 본지를 확정하려 함, 근원적으로 차단하려는 것
* 주자설을 충실히 따르려는 논자들은 토지개혁의 불가행을 말해 왔고, 그 개혁을 주장하는 논자는 반주자적일 수 있는 것이기도 했음
* 주자의 정전난행설을 그대로 따름, 남당은 우리나라 지주제에는 불합리한 점이 없다고 생각, 부세제도를 이정하고 산택을 이용하는 것으로서 해결할 수 잇다고 판단
* 서인 내부에서도 이와 같은 문제를 부당하게 보는 논자들은 이를 개혁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주자토지론 추종에 반대 → 소론을 형성, 대표적으로 한태동.
* 주자의 토지론에 반대하고 조선의 농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토지개혁 방안을 제기한 것은 이른바 남인계 실학파에 속한 인물들 → 윤휴, 유형원
* 기전의 발견은 토지개혁을 주장하는 논자들에게 실로 절대적인 힘이 아닐 수 없음
* 반주자학적 토지개혁론을 국가재조를 위한 하나의 정책방안으로까지 제시한 것은 유형원, 지주제를 부정하는 변혁의 논리라는 점에서 주자토지론을 지지하는 견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아닐 수 없음
* 이익은 유형원의 학문을 사사하고 계승해서 유형원보다 더 철저하게 주자토지론을 비판하고 있었으며 한원진과 동시기를 살면서 한원진의 토지론과 반대되는 견해를 전개
* 17세기 후반에는 송시열과 유형원의 견해로서 대립, 18세기 전반에는 한원진과 이익의 견해가 대립

@ 제3단계(18세기 중엽~19세기 중엽)
* 주자토지론에 반대하고 토지개혁을 주장하는 견해가 절정에 달하는 시기
* 남인이나 소론의 인사들 뿐만 아니라 노론에 속하는 인사들 속에서도 그 당색에서 강조해오던 주자토지론 추종을 거부하고 토지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한느 사람이 나오게 됨
* 노론의 인사로서 반주자학적 토지론을 제기한 사람 가운데는 양응수, 홍대용, 박지원, 홍길주 등이 있었음
* 소론에서 제기한 개혁론으로서는 서명응과 그 손자 서유구의 견해를 들 수 있음
* 남인계 인물로서 토지개혁론을 제론한 사람으로는 유정원, 정지성, 정약용을 들 수 있음

5. 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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