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새로읽기 02반 중간고사 시험문제(2010년 10월 18일, 의공학관 114호, 11시30분~12시20분)

1. 고려시대 과거제는 귀족만 볼 수 있었다. 고려정부는 신분차별적인 정책을 피게 되었고, 귀족만이 관직을 독점했다. 그래서 귀족제라고 한다. 그러나 조선은 고려와는 달리 양반 뿐만 아니라 일반 농민들에게도 과거를 볼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였다. 노비와 같은 천민이 아니면 누구나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를 보면 대부분 양반들이었고 농민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응시자격이 주어졌음에도 양반들만 과거에 합격을 하고 농민들에게서는 과거합격자를 찾아볼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2. 다음 사진은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한국의 전방후원분이다.


첫번째 사진은 일본의 것이고, 두번째 사진은 한국의 것이다. 이를 근거로 일본에서는 일본의 지배층이 한국 남해안 지방에 건너가 한국을 통치했다고 하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고 있고, 한국에서는 특별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전방후원분은 한국식이 아니라 일본식 무덤이기 때문이다. 현재 전방후원분은 일본 대부분 지역과 한국 남해안에서만 나타난다. 그러나 백제의 지배층의 상당수가 일본에 건너가 일본인과 교류하고 있던 사실로 보아 일본의 주장은 합리적이라 할 수 없다. 위 두 사진을 보고 당시 일본과 한국 남해안 지역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어떻게 하면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3. 조선시대에는 비가 여러 달에 오지 않으면 다음과 같은 몇가지 조치를 취했다. 가장 먼저 하늘에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 그리고 각 지역에 수감되어 있던 죄수(罪囚)를 풀어주었다. 또한 임금의 식단인 수라(水刺)에 올라오는 반찬의 수를 줄였고, 왕비의 방에 들어가는 것을 멀리했다. 비가 오지 않는 것과 이후에 행한 조치는 별로 상관이 없어 보이는데, 조선시대에는 그렇게 했다. 이유는 무엇일까?

4. 천주교(카톨릭)이 조선에 들어온지 200여년이 흘렀다. 초기 천주교는 학문으로 들어오다가 후에는 농민들 사이에서 천주교도가 점차 늘어났지만, 조선사회 안에서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진산사건(珍山事件)을 계기로 처음으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 사건은 1791년(정조15) 전라도 진산군(현재 충남 금산군 진산면)의 선비였던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이 윤지충의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신주(神主)를 불사르고 카톨릭식으로 제례(祭禮)를 지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문제가 야기되었다. 이 사건으로 당사자는 각기 사형으로 당했다. 그 동안 문제가 되지 않던 카톨릭교도에 대한 인식이 이 때와서 문제가 되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5. 한국전쟁 당시 초반의 전세를 뒤집어 UN군과 한국군은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갔다. 그러나 곧 중공군의 반격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미국군은 그냥 후퇴하지 않고 당시 북한의 수도였던 평양의 노동당 건물에 있던 대부분의 문서들을 수집하여 가지고 후퇴했다. 그래서 현재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는 당시 수집했던 북한 관련문서들이 남아 있다. 이를 “북한노획문서”라고 한다. 이러한 행동은 북한도 마찬가지여서 전쟁 초반 낙동강까지 진출했을 때 남한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가지고 갔다고 한다. 그러나 남한은 북한에서 어떠한 문서도 수집하지 못했다. 미국과 북한이 각기 점령지역에서 문서를 수집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