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주차 강의(한국사새로읽기)

건양대강의/2010.2학기 2010. 10. 13. 17:40 Posted by 아현(我峴)

7주차 강의(한국사새로읽기)


* 지식채널e

- 294 : 두가지 죽음
- 387 : 콜라와 햄버거 그리고 미국의 정신
- 603 : 몇 가지 오류 2부

첫번째 "콜라와 햄버거 그리고 미국의 정신"은 현재 미국사회의 인식에 대한 한 단면을 보여주는 동영상이었습니다. 물론 모든 미국인이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 영상에서 보여주고자 한 것은 미국이 지키고자 하는 그 가치가 무엇이었는가 하는 점이라 봅니다. 미국은 흔히 자유와 평등이 있는 사회라고 합니다. 민주주의라고 지칭하기도 하는 이 사회의 특징은 자유와 평등은 기본적인 신념으로 삼는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자유와 평등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칭하는 말일까요.

자유는 모든 자유를 지칭하는 말이 아닙니다. 보통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 무엇을 보통 '자유롭다'라고 하지만 이때의 자유는 방임과 거의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 사회 안에서 추구하는 자유의 개념은 아닙니다. 대한민국 헌법에도 묘사되어 있듯이 자유는 내 자신의 의사를 마음놓고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지칭합니다. 평등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재산과 지위에 대한 평등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사회주의로 나가자는 말이 될 테고, 민주주의 아래에서의 평등은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바라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 때의 평등은 바로 자신의 능력을 발취하는데 그 기회를 동등하게 부여해 준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즉 만약 사회 초년에 출발선이 다르다면 그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무리 출중하다고 해도 그에 합당한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동영상에서 보여준 상속세 폐지 반대운동은 바로 그 평등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워런 버핏이나 빌 게이츠는 부모의 돈을 바탕으로 부와 명성을 이룬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구어 나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자식에게 그대로 부와 명성을 전해준다면, 다른 미국인들에게는 그 만큼의 피해를 입히게 됩니다. 전혀 평등하지 않은 상황에서 사회를 맞이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것은 바로 미국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고 그러한 것들이 점점 쌓이면 미국식 민주주의가 위협을 받게 되는 것은 자명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가끔 북한의 3대 세습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현대판 왕조국가니, 전주김씨 북조선 왕조라고 하느니 비아냥댐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유래없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3대 세습이 마치 북한에만 그러한 것처럼 몰아가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3대 세습은 북한만이 아닌 우리 안에서도 충분히 찾을 수 있는 일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국가이냐, 회사이냐, 정치이냐의 차이일 뿐 형태는 똑같습니다. 미국의 정치인들을 보면 3대 세습의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부시 부자의 경우 아버지와 아들이 대통령을 역임했고, 국회의원들 중에는 정치가문이라고 하여 정치인을 다수 배출하는 가족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일본도 현재 그러한 절차를 밟아 나아가고 있죠. 대한민국의 경우에도 2대 정치인 세습을 부지기수인데, 3대가 아직 없는 것은 대한민국이 역사 짧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40년정도 시간이 흐르면 아마 대한민국에서 3대 세습 정치인이 나올 것은 거의 자명하다고 봅니다. 정치계와는 달리 경제계는 이미 3대 세습이 거의 유형화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삼성을 들 수 있죠. 삼성을 만든 이병철을 비롯하여 그 아들 이건희, 그리고 손자인 이재용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수년간 3대 세습의 과정을 눈으로 지켜보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3대 세습이라고 비난하지 않습니다. 다만 상속세 포탈에 대해서만 비난을 하는데, 왜 세습 그 자체에 대해서는 비판을 하지 않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상속세를 정상적으로 모두 국가에 납부했다고 하더라도 주식회사를 마치 개인 재산인양 아들에게 세습하는 것은 어떠한 형식으로든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두번째 동영상인 "두가지 죽음"은 한국인의 인간에 대한 이해를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주제는 "명예"입니다. 그러나 주제를 넘어서 조금 더 깊이 읽을 수 있는 동영상이라고 생각됩니다. 동영상은 팽형(烹刑)을 보여줍니다. 팽형에서 "팽(烹)"은 삶아 죽인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팽"이라는 한자에는 밑에 화(火)자가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불로 솥을 끓이는 것이죠. 팽형은 사람을 죽이는 형벌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동영상에서 보여준 팽형은 실제로 죄인을 삶아 죽이는 것이 아니라 형식화된 팽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솥의 물은 미지근하게 끓여서 죄인은 발만 담그고 나옵니다. 그리고 재판관은 그가 죽었다고 선언합니다. 마치 죽은 사람만양 가족들은 여기게 되고, 장사도 지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몸이 죽은 것과 몸은 죽지 않았는데 인간의 다른 것이 죽었다는 사실을 구분했다는 점입니다. 보통 생명이 다했다는 사실을 숨이 끊어진 것으로 판단하지만, 조선시대 사람들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영혼이 죽은 것을 몸이 죽은 것과 달리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죽었다는 표현으로 "혼이 나갔다"고 합니다. 그 때의 혼(魂)이란 바로 인간의 몸에서 나갔다는 것을 말하므로 인간은 육체인 몸과 혼(魂)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혼(魂)과 대비하여 육체로서의 몸을 백(魄)이라고 지칭합니다. 합하여 혼백(魂魄).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통해 혼과 백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추석이나 설날에 제사를 두번 지냅니다. 한번은 집에서 한번은 산소에서. 집에서 지내는 제사는 신위나 지방을 통해서 지냅니다. 방에서 제사를 하기 때문에 창문을 활짝 열어두고 향을 피웁니다. 향은 하늘로 올라가 하늘에 계신 조상의 혼을 불러오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오신 혼은 바로 신위와 지방으로 들어가고, 우리는 이 신위와 지방에 절을 하게 됩니다. 제사를 마치면 신위는 다시 사당에 모시고, 지방은 불을 피워 손으로 하늘 높이 올립니다. 지방에 모셔진 혼을 다시 하늘로 올려 보내는 의식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집에서 제사가 끝나면 이제 산소에 가서 성묘를 합니다. 산소에서 제사를 하기 전에 약간의 술을 산소 주변에 붓게 되는데 산소에 모셔진 백을 부르기 위함이라 합니다.

한국인은 인간을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혼과 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죽음에 이르게 되면 혼은 몸에서 빠져나와 하늘로 올라가고 홀로 남아 있는 백은 육체와 더불어 땅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즉 제사는 하늘과 땅으로 분리된 조상에 대한 의례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팽형이 형식화되어 진행되었던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요. 팽형을 해도 후에 사면복권이 되지 않는 이유는 자결을 했을 때는 백은 죽어도 혼은 살아 남아 있을 수 있어 명예를 지켰다고 생각하지만, 팽형을 당하게 되면 백은 살아도 혼을 죽게 되어 더 이상 명예를 회복시킬 수 없다는 조선사람들은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이건 순전히 제 생각)

역사에서 세 가지 사실의 의미

이번시간의 강의는 사실에 대한 것입니다. 역사는 기본적으로 역사적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는 학문입니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으면 그건 역사가 아니라 소설이 되겠죠. 역사에 기초한 역사소설이라는 것도 결국 얼마나 역사적 사실에 근접해 있는가에 따라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또한 같은 인문학이지만 철학과도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사실로서의 유무와 관련을 가집니다.

역사에서 의미하는 사실에는 세 가지가 존재합니다. 하나는 “과거의 사실”로 과거에 있었던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며 이는 곧 진실이나 진리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다른 하나는 “사료로서의 사실”로 과거의 사실 중에서 그대로 흔적으로 남아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사실을 말합니다. 고문서나 고서, 그림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마지막으로 “역사적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 사료로서의 사실 주에서 역사가들에 의해 객관적으로 재구성된 사실을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역사는 바로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첫째 “과거의 사실”은 과거의 진실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진실을 이야하고자 하는 노력을 역사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철학에서 말하는 절대적인 이상향인 이데아나 유토피아, 철인(哲人) 혹은 성인(聖人)의 경지가 역사에서 말하는 진실에 해당합니다. 절대적인 진리를 찾고자 하는 노력이 철학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역사에 대한 진실이 무엇인지 알려고 노력하는 학문이 역사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그 진실은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으며 앞으로도 알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철학에서 이상세계 혹은 이상적인 인간상을 상정해 주고 이에 나아가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주듯이 역사에서도 과거의 진실을 염두해 두고 그 모습에 가깝게 과거의 재현하려고 하는 모습이 역사라는 학문의 목표가 됩니다.

다만 그것에 나아가려는 의지만 있을 뿐 실제 그렇게 이루지는 못합니다. 철학자였던 마르크스도 자신의 자본론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속성에 대한 분석을 통해 사회주의, 공산주의로 나아간다는 이론을 정립하였으나 실제 공산주의는 도래하지 않습니다. 단지 이상일 뿐이죠.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철학은 미래에 대한 이상향임에 비해 역사는 과거에 대한 이상향이라는 점입니다. 과거의 사실은 실제로 과거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타임머신이 있지 않는한 과거의 일을 100%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있었지만 과거 그 자체는 이상향으로 남을 뿐 모두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사실은 과거의 진실이 되고 맙니다.

둘째 “사료로서의 사실”은 쉽게 말해 현재 남아 있는 과거의 자료들입니다. 과거의 자료는 무수히 많습니다. 전문적인 역사자료인 고문서나 고서 이외에도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이 사료로서의 사실에 해당합니다. 거창하게 우리 민족의 역사를 이야기 할 것없이 가깝게 우리 가족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우리 부모님의 옛 모습이 궁금하다면 부모님의 사진첩을 살펴보면 됩니다. 나의 현재 모습과 나와 같은 나이대에 찍은 부모님의 사진을 본다면, 나와 얼마나 닮았었는지 어떠한 모습을 달랐었는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며, 부모님과 내가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지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과거 부모님의 생각을 알고 싶다면 부모님의 일기나 편지를 살짝 들여다 보면 됩니다. 현재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그 당시 부모님의 삶에 대한 인식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변화했는지 흘겨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바로 사료로서의 사실에 해당하게 됩니다. 사료로서의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후일 나의 모습을 재구성하고 싶을 때 그에 해당하는 연결고리를 남아 있는 자료로서만 이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찮은 물건이라도 그것만 가지고도 옛 일을 되살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국가 차원으로 끌어 올리면 "국립문서보관소"라는 것을 접하게 됩니다. 대한민국에서는 국가기록원이라고 지칭을 하며 중국에는 당안관이라는 기관이 있습니다. 기록의 중요성은 현대국가에서 좀더 가치있는 일로 평가를 받습니다. 그래서 정부에서 생산되는 모든 자료는 그것의 보관에 대한 필요성 때문에 "문서보관소"에 보관을 하게 됩니다. 현대 정부에서 어떠한 정책들을 시행하는데 전례를 참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옛 기록들을 찾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정책에 대한 평가와 판단도 아울러 보관소에 남아 있는 기록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이는 국내의 문제 뿐만 아니라 국제 관계에서도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됩니다. 미국은 북한과의 정책에서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북한노획문서"를 활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여담입니다만 북한의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에 있는 문서를 보아야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한국에는 북한관련 문서가 없기 때문이죠.

셋째 “역사적 사실”은 재구성된 과거를 말합니다. 재구성의 과정은 앞서 말한 “사료로서의 사실”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며 재구성의 목표는 “과거의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사료로서의 사실과 과거의 사실 사이에 역사적 사실이 어느 중간에 존재하게 됩니다. 이러한 인식 하에서 역사를 생각해 본다면 역사는 과거 그 자체일 수 없으며 과거의 담론(인식틀)에 해당하게 됩니다. Keith Jenkins는 “역사의 의미는 원래부터 과거에 내재해 있던 것이 아니라 외부에 의해 과거에 부여된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역사는 과거 그 자체가 아니라 과거에 대한 담론이고 진실게임은 역사도 아니고 아무의미 없는 일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역사는 기억에 대한 투쟁이며, 기억의 정치학이기도 합니다. 되도록 과거의 기억에 가깝게 나아가고자 하는데 역사의 의미가 있으며 과거에 그러한 사실이 있었는지의 유무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고조선의 영역을 찾으려 한다고 합시다. 고조선에 대한 기록은 단군신화에 대한 기록이나, 후일 단군조선이 기자조선으로 그리고 다시 위만조선으로 이어지다가 망했다는 사실 뿐입니다. 고조선이 어느정도의 영토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자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유일한 단서는 고조선이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 존재하던 시기입니다. 이 시기는 BC 20세기부터 존속했다고 하지만 실제 고조선이 번성을 누리던 시기는 대개 BC 7세기 정도부터 시작하여 BC 1세기 경에 이르는 기간입니다. 이는 중국의 역사서를 통해서도 쉽게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변방지역의 국가가 강성하지 않았다면 중국 역사서에 나오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죠. 이 시기에 중국 역사서에 고조선이 집중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고조선이 강성하던 시기를 파악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면 영역은 어떠할까. 역사서를 통해서는 쉽게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대신 땅 속에서 발굴되는 유물을 통해 유추가 가능합니다. 이 시기 유물로 이 지역에서는 비파형동검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이 동검이 거의 출토되지 않았다는 점을 착안했을 때 이 지역을 이 시기에 다스린 국가는 고조선이 유일했으므로, 이 동검을 통해서 고조선의 영역이 비파형 동검이 출토된 지역이었다고 단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키스 젠킨스가 말한 역사의 의미에 대한 정의는 역사를 이해하는 방식에 대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과거 스스로는 역사를 말해주지 않습니다. 누가 과거에게 말을 걸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죠. 고조선의 영역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조선에 대해서 알려주는 역사적 자료들은 스스로 고조선의 영역이 어느정도로 넓었는지 말해주지 않습니다. 직접 알려주는 자료가 없기 때문이죠. 결국 외부의 관심을 통해서 과거를 들여다 보고 답을 찾아야 합니다. 이 때의 외부는 바로 그 역사적 사실에 관심을 가진 나 자신이 됩니다.

그동안 역사에 대한 관심, 과거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 역사는 모두 국가였습니다. 고등학교 국사교과서는 국가에 의해 과거에 부여된 역사적 사실이었습니다. 국가의 관심이었기에 역사의 의미는 당연히 민족성을 고취시키고, 국민성을 부여하는데 있었습니다. 외부(국가)에 의해서 주어진 과거를 고등학교 학생들은 암기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러나 대학에서는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사라집니다. 우선 국가는 더이상 대학생에게 그런 역사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국가가 차지하던 외부의 자리를 이제 대학생 자신의 자리매김 하게 되고, 역사의 의미는 스스로 부여해야 합니다. 이 말은 곧 대학생은 왜 역사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되죠.

여러분은 왜 역사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아현.

* 늦게 올려 미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