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차 강의(새로읽기+전통문화)

건양대강의/2010.2학기 2010. 9. 13. 23:54 Posted by 아현(我峴)

3주차 강의(한국사새로읽기+한국의전통문화)

강의 내용이 본의하니게 두 수업이 다시 공통으로 되었습니다. 다음 시간부터는 전통문화 수업은 달라질 겁니다. 죄송해요.

* 강의 주제 : 교양과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대학의 학문 체계는 전공과 교양으로 구분이 됩니다. 전공은 말 그대로 오로지 하나의 힘쓰는 것을 말합니다. 대학에 오면 누구나 전공을 가지게 되며 전공에 힘쓰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대학에 오는 목적이 전공을 깊이 있게 공부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대학의 학문체계는 전공과 더불어 교양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교양은 좁은 의미로는 문화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쌓는 넓게는 인격을 배양하는데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양을 의미하는 culture라는 단어의 어원에서 보듯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한 당연한 기술인 '밭갈기'를 통해서 생활을 영위해 가듯이 현대 사회에서는 일정한 교양 지식을 통해 더 인간답게 살고자 합니다.

그러면 대학에서 가르치는 교양의 의미는 무엇일까. 본래 현대의 대학 체계는 중세대학의 학문구조에서 연원을 하고 있습니다. 교양에서는 산수, 기하 등의 7개 과목을 가르치고 있었고, 이를 모두 이수해야만 법학, 철학, 신학의 전공 과목을 선택하여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교양과목은 전공을 더 전공답게 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였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천문을 바라보는 당시 사람들의 두 가지 인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구가 하늘의 중심이라는 천동설과, 태양이 하늘의 중심이라는 지동설이 있습니다. 모두 밤에 하늘을 바라보며 별자리 운행의 변화를 통해서 밝혀진 사실들이지만 하늘에 대한 인식에 따라 같이 바라보아도 생각이 달랐던 것입니다. 당시에는 신학이 지배하던 세상으로, 이 우주는 모두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밤하늘에 보이는 별자리도 하느님의 창조하신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천문에 대한 인식은 지주가 중심이 되는 천동설이 지지를 받게 됩니다. 지동설을 주장할 경우 하느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과 논리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천문학의 천동설은 신학에서 말하는 천지창조의 설명을 더욱더 선명하게 별자리를 통해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죠. 천문학은 신학이 신학답기 위한 교양학문이 되는 것입니다. 천문학 자체가 목적이 아닌 것이죠.

뉴턴의 과학관도 이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뉴턴은 자신의 지적능력을 물리학에 발휘하였습니다. 그러나 물리학이 연구의 그 자체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였고 질량이 있는 모든 물질들 사이에서는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법칙화하여 F=ma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죠. 지구상의 모든 힘은 그 질량과 가속도의 곱에 비례한다고. 하지만 그는 독신한 신자로 그와 같은 발견이 곧 천지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뜻이라 여겼습니다. 즉 하느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그것이 하나의 법칙으로 모두 설명될 수 있다고 믿었고 그것을 연구한 끝에 F=ma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즉 그는 신학을 더 잘 이해하고 자연세계에 담겨진 하느님의 창조의 말씀을 만유인력의 법칙이라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뉴턴이후가 되면 중세시대와는 전혀 다른 근대과학의 시대를 열게 되었다고 평가를 받았지만, 뉴턴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죠. 그의 유명한 저서인 프린키피아에는 다음과 같이 우주의 정의가 있다고 하죠. "천체는 태양, 행성, 혜성 등으로 매우 아름답게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은 지성을 갖춘 강력한 통치자의 의도와 통일적 제어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지극한 하나님은 영원, 무궁, 완전하신 분이시다"

그럼 정말 교양은 전공에 도움이 되는 과목일까. 안타깝게도 현대 대학의 학문체계는 서양 중세 대학의 학문체계와 같이 교양과 전공으로 구분되고 있지만, 그 실제 속사정은 너무 차이가 큽니다. 교양은 전공을 이수하기 이전에 들어야 하는 과목이지만, 일부 대학에서는 1학년 교양 수강을 금지하기도 하죠(어느 대학일까나....). 그리고 교양필수라고 하여 교양과목을 분화시키고 있는데, 실제 교양필수는 기초학문을 들어야 하지만, 점차 대한민국의 대학들은 이상하게 영어와 컴퓨터를 교양필수로 들어야 하는 과목으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과연 필수로 들어야 하는 과목일까 한번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교양선택은 단순 이수 학점으로 전락하게 되는데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교양을 선택하더라도 내가 듣고 싶은 과목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맞추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죠. 그럼 과연 교양과목은 전공과 관련이 있는가. 이 교양과목은 학생들에게 어떤 이로움을 제공해줄 것인가. 대학에서 의미하는 교양강의란 무엇인가. 더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대체 강사는 어떻게 교양을 가르쳐야 할까요.

본래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학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문(文)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때의 '문'이라는 글자는 단순이 글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고대 중국의 어원을 올라가면 '무늬'라는 말에서 기원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무늬, 흔적, 자취 등 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죠. 신석기 시대 빗살무늬토기를 보면 신석기인들에 의해서 토기에 빗살모양의 무늬가 그려져 있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것만 보아도 빗살무늬토기 자체가 바로 인문학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석기인들의 흔적이자 자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문학을 다시 정의하기 되면 인간이 남긴 자취 혹은 그 흔적에 대한 모든 학문을 지칭하게 됩니다. 인문학과 대비되는 것은 자연과학이겠죠. 인문학이 人이 중심이 된다면 자연과학은 단순하게 物이 될 것입니다.

인문학은 그럼 왜 배워야 할까요. 그리고 인문학은 나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고 있을까요. 현대 대학사회를 보면 인문학이 위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위기일까. 지금 현재의 상황으로 보아서는 대학 사회 안에서만 위기인 듯 보입니다. 대학 교양강좌로 역사관련 과목은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역사과목을 잘 수강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여러가지 일 것이지만, 가장 큰 문제는 강사의 강의 방식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중고등학교 때처럼 암기과목으로 가르치게 된다면 분명 대학생들은 교양과목을 역사로 수강하지 않을 것입니다. 부단한 노력이 필요함에는 분명하다고 봅니다. 인문학은 돈 안되는 학문일까. 대학 안에서 보면 그렇죠. 그러나 이상하게 대학 사회 밖에서는 인문학 강좌가 오히려 늘어나고 있습니다. TV에서는 사극드라마가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으면 전혀 식을 줄 모르고 있죠. 서점가에서도 역사관련 저서들이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럼 대학에서는 그렇지 못한데 대학 밖에서는 그렇게 인기를 끌고 있을까. 아마도 우리는 잘 모르는 지적 목마름이 사람의 마음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닐까 반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문학이란 단순하게 인간에 대한 학문이라기 보다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습니다. 단순한 지적 만족감으로는 인문학의 인기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인문학 관련 책과 개념, 지식만으로는 부족하죠. 인문학의 장점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끊임없이 질문하는 삶 그 자체에 있을 것이고 그 곁에는 항상 인문학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했을 때 그 질문은 아마도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의 다른 의미일 것입니다. 누구나 갈망하고 고민하고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질문입니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우리는 죽을 때까지 그것을 고민할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니라 사랑이란 무엇인가라고 하면 대학생들은 많은 고민들을 합니다. 대체 난 누구를 사랑하고 있을까. 누구와 사랑해야 하는가. 나는 왜 사랑하는가. 사랑 이후의 그 허전함은 어떻게 달랠 것인가. 사랑이 필요한가. 사랑을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의 사랑은 과연 그(그녀)에게 무엇이었던가. 그(그녀)도 나와 같은 사랑을 하고 있을까. 그 모든 질문이 인문학적 질문에 해당하죠.

* 지식채널e(한국사새로읽기)
  362 - 1968(68혁명) 1부 - 주동자가 없는 시위
  369 - 1968(68혁명) 2부 - 실패한 혁명
  431 - 2008, 대한민국에서 20대로 산다는 것

* 지식채널e(한국의전통문화)
  362 - 1968(68혁명) 1부 - 주동자가 없는 시위
  369 - 1968(68혁명) 2부 - 실패한 혁명
  076 - 나에게 잠을 허하라
1968년 혁명에 대하여 잠깐 설명할 필요가 있을 듯 합니다. 강의시간에도 꽤 이야기를 한 듯 하니.

1968년 당시 프랑스는 아주 행복한 시절이었습니다. 우리나라 IMF를 맞이하기 이전 90년대 모습과 비슷합니다. 정부도 기업도 국민 개개인도 모두 잘 살던 시절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안에서 싹틔우고 있었죠. 세대문제였죠. 기성세대는 부단한 노력을 통하여 경제적으로 먹고 살기 편한 세상을 만들어 냈지만, 청년을 비롯한 신세대들은 그것을 넘어서 그 무엇을 요구하기 시작했죠. 또한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 여성들도 이에 동참하게 됩니다. 기성세대의 권위주의, 서열주의에 대한 도전이 시작된 것이죠. 그것이 68혁명의 원동력이 됩니다.

현대사회를 설명하는 가장 큰 축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민주주의가 최상의 정치제도는 아니며, 자본주의가 최상의 경제구조가 아니라는 사실을 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선거제도를 통하여 그것의 본질을 실현합니다. 그러나 선거는 투표권자의 투표에 의해 진행이 되는데, 이때의 전제가 되는 것은 바로 현명한 선택입니다. 투표권자가 현명한 판단력에 따라 올바른 사람을 뽑는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투표권자가 모두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과 나이 지긋하고 인생의 굴곡을 모두 겪은 50~60대 어른이 같은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70대 치매에 걸린 노인보다 판단력이 빠른 고등학생이 더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자본주의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를 보통 성장의 관점에서만 바라보지만 성장과 더불어 같이 생각해야 하는 것이 바로 분배의 원칙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나라에서 주력하는 것은 성장이지 분배는 아닙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통 나타나는 부익부 빈익빈은 그러한 가운데에서 나타납니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딜레마죠. 미국이 자본주의 사회이면서도 그 나마 사회불안 요소가 적은 것은 기부와 분배를 통한 적절한 정책을 이어나가기 때문입니다. 상속세를 폐지하려고 했을 때 최고 갑부였던 빌게이츠가 반대했던 것도 성장과 분배의 문제 한 가운데에서 설명할 수 있는 현상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함께 성장하고 같이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제도적인 장치들이 마련되어야 하는데 그 본질을 잘 모르면 자본주의가 극단에 놓일 수 있죠. 문제는 거기서 발생하게 됩니다.

아주 초기적인 현상이지만 그러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폐해야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1968년 프랑스에서 있었고, 대한민국에서도 혁명에 까지 이른 것은 아니지만, 차츰 변화의 흐름에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무상급식이 그렇죠. 초기 무상급식이 나왔을 때에는 사회주의적인 발상이라는 원색적인 비난이 있었습니다. 지난 5월 교육감 선거에서는 후보들의 대부분 공약에서 무상급식이 언급되었고 현재는 그 진행중에 있습니다. 아무도 무상급식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불과 얼마 되지 않은 기간에 국민들의 인식이 변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비록 작은 변화과정이지만 대한민국에서도 이제 국민들이 사회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사실이 큰 의미를 두어야 할 것이며 앞으로 다른 분야에서도 그러한 변화들이 진행될 것이라 봅니다.

이상이에요. 빠진 내용 없나 모르겠네요. 아울러 강의한 ppt도 올립니다.


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