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의 재구성과 그 의미

사편(史片)/조선시대 2010. 9. 2. 11:36 Posted by 아현(我峴)

실학의 재구성과 그 의미

* 정호훈, “17세기 실학의 형성과 그 정치사상”

그는 조선후기 실학의 특성을 17세기 상황 속에서 풀어가고자 했다. 조선후기 실학 연구사에서 17세기를 전후한 시기는 실학의 태동기 내지는 형성기로 파악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가 주목한 인물은 한백경과 이수광, 그리고 유형원과 윤휴이다. 16세기를 지나면서 주자학만이 조선사회에 발달된 것은 아니라 생각했다. 이미 주자학 이외에 다른 학문이 임진왜란 이전부터 수입되었고 일정정도 유행도 거쳤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한백겸과 이수광을 들었다. 한백겸의 “동국지리지”나 이수광의 “지봉유설”은 그러한 과정의 산물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한백겸의 경우 고대의 법제에 깊이 천착을 했으며 삼대 이상 정치의 대체를 확인하고자 하였다고 보았다. 이수광의 경우에는 “지봉유설”을 통해 백과전서적인 내용에 천착하고, 객관 세계에 대한 실제적인 지식 탐구를 분리해내 실용 학문의 차원으로 나아갔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아래, 초기 실학적 사유라 할 수 있는 윤휴와 유형원의 학문이 나왔다고 보았다. 유형원의 경우 고대적 사유체계에 성리학적인 사유의 틀을 활용하여 사회 변화의 이념을 만들어내려고 하였다. 그의 “반계수록”은 이러한 여러 경전에서 제시하는 삼대 사회의 이념과 법제를 근거로 구상된 것이었다.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반에 한백겸과 이수광의 학문으로 바탕이 만들어지고, 17세기 중후반에 윤휴와 유형원의 학문에 의해 본격적으로 그 연구가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후자는 학문의 수준을 한단계 끌어올려다는 평가는 받는다. 하지만 문제도 있다. 실질적으로는 모두 성리학자이므로 실학자라 끌어낼 수 있는 그 무엇이 문제가 된다. 한편 북인계 남인학자들의 경우 북인과의 관련도 더 살펴보아야 한다. 또한 정호훈이 말하는 실학적 사유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삼대의 이상 사회를 갈구했다는 것 외에는. 윤휴와 더불어 남인의 대표적인 산림인 허목도 언급이 되지 못하고 있다.

* 유봉학, “조선후기 경화사족의 대두와 실학”

실학 내지 실학자라고 한다면 유형원처럼 낙향하여 궁핍한 시골에서 정국 구상을 골몰한 사람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서울의 경화사족 중에서도 실학자는 많다. 그러나 그동안에는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정약용도 실질적으로 보면 경화사족이 아니었을까. 박지원은 확실하지만. 숙종대 이후 주자학적 생활 방식이 한국 전통문화의 핵심이 되었다. 특히 서울의 발달에 따라 경향(京鄕)이 분리되기 시작했으며 경화사족은 지방의 유학들과 구별되는 새로운 문화 예술을 가지게 되었다. 영조대 이후가 되면 경화사족에서 경화거족이 나타나 일부 가문에서 고급관료는 배출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에 따라 새로운 생활 방식을 찾아내고 사회지도의 책임의식에서 새로운 학문이 모색되었다. 민생문제 해결에 기여하는 경제지학이나 명물도수지학이 그렇게 나타났다. 또한 유통경제의 발달에 따라 경제가 성장하고 심지어는 양반상인론이 경화사족 안에서 제기되었다. 박지원의 글들이 그러하고 앞선 유형원의 글에 주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학문적 경향을 우리는 대개 북학이라 하고, 일부에서는 서학을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정조대에 이르러 이러한 학풍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났고, 그 중심에는 정조가 있었다. 정조는 오히려 주자학 정리에 열심이었으므로 사상적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정약용처럼 경화사족 학자의 학문적 성과가 국가의 정책으로도 수렴되기도 하였으나 실제 오래가지는 못하였다. 정조 사후 서학에 대한 탄압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새로운 사조에 대한 거부는 상당히 완강한 것이었다. 이러한 전반적인 경화사족의 새로운 학문 경향을 실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앞서 정호훈의 글에서 나온 유형원이나 이수광 같은 경우와는 그 학자적 배경 뿐만 아니라 시대도, 이상향도 다른 실학을 과연 같은 실학이라 할 수 있을까. 고민해볼 문제다.

* 김문식, “조선후기 유학 텍스트 연구와 경세학적 경학”

유학 텍스트 연구를 통해 경학의 경향을 밝히는 글이다. 조선초기에는 주로 사서오경의 텍스트로 “오경정의”, “십삼경주소”, “사서오경대전”이 보급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널리 보급된 것은 “사서오경대전”인데, 세종 1년(1419)에 수입되어 10년후 강원감영, 경상감영, 전라감영에서 인쇄되었다. 이후 인쇄보급에 따라 사서오경 텍스트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여러 학자들이 사서오경에 구결(口訣)을 붙임으로써 읽고 익히기 쉽도록 하였으며, 혹은 주석이나 경설을 모아 편집하기도 하였다. 경학 연구의 절정은 청대 고증학 서적의 수입에 따라 전개되었다. “사서오경대전”이 일정한 한계를 노출함에 따라 경서의 주석을 새로 집성하는 고증학이 들어오게 되었다.

유학 텍스트와 더불어 따로 떼어 설명해야 하는 것이 주희 텍스트에 대한 연구이다. 주희 텍스트는 고려 충렬와대 안향에 의해 처음 소개된 이래 16세기에 이르면 “주자대전”과 “주자어류”가 간행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저서의 보급에 따라 주희 텍스트에 대한 주석서들이 나왔다. 이황은 명종 13년(1558)에 “주자서절요”를 지음으로써 주희 저서 중 중요한 구절을 뽑아 정리하기도 하였다. 이는 송시열에 의해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와 더불어 이황 텍스트의 보급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유성룡에 의해서 “퇴계선생문집”이 완성이 되었고 이후 수차례 간행 보급되었다. 이후 추가적으로 이황의 글이 발견됨에 따라 첨삭이 더해져서 여러 판본이 나왔다. 물론 이황 텍스트에 대한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러한 경세학적 경학 연구의 출현은 유학이라는 학문의 특성에 기인하는 측면이 강하다. 유학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문으로 경학 자체는 유학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경세학은 유학의 당연한 귀결이라는 것이다. 조선의 학자들이 성리학을 수용하면서 경학에 눈을 뜨고 그 텍스트의 연구에 골몰하게 된것도 다 이와같은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송시열이 주자의 글과 언행 하나하나에 신경쓸 수밖에 없었던 것도, 대표적인 실학자인 정약용이 사서의 주석을 다시 새겨보려한 것도 모두 유학의 기본적인 특성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대체 유학자들에게 실학이란 무엇일까. 경세학적 경학도 과연 실학의 특성으로 포함될 수 있는 것인가.

* 구만옥, “조선후기 자연 인식의 변화와 실학”

이 글은 조선후기 자연관의 변화에 따른 실학의 양상을 추적한 글이다. 주자학에서 자연이라는 단어는 요즘 흔히 쓰이는 객관적 대상물로서의 실체적 자연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부분 사물의 본연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써 천리(天理)에 부속적으로 쓰였다. 현대 학문에서 인간과 자연은 분리되어 인문학과 자연과학으로 별도의 학문체계를 구축했지만, 전근대 성리학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인간과 사회, 그리고 자연을 모두 통일적으로 이해하고자 했던 주자학에서 인간사회 운영의 원리인 도리(道理)와 자연법칙인 물리(物理)는 일관된 것으로 천리(天理)였다. 그러므로 주자학적 자연관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도리로부터 물리의 해방, 인간학으로부터 자연학으로의 자립화가 전제되어야 했다. 정제두가 그러하였고, 정약용도 일부 그러한 언급을 하였다. 물론 조선후기 주자학 내에서 일정한 흐름은 있었다. 하나는 박학적 학문의 경향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연 세계에 대하 관심이 증대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후자에 주목할 수 있는데, 전자의 경우에는 송시열이 대표적으로 많이 알고 익히는 것이 중요했을 뿐이며, 후자의 경우에는 실학작 자연학의 가능성이 모색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용후생(利用厚生)이나 백공기예(百工技藝)를 중시한 홍대용 같은 학자를 들 수 있다. 그러면 그들이 이야기 하는 실학적 성격은 어느정도 수준에서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들이 끼친 영향은 어느정도 일까. 그들은 왜 과학기술 분야에 관심을 가졌을까. 자연학에 대한 관심이 있었던 그들은 대체 누구일까. 아직은 연구가 깊이 진척되지 못했으므로 더 고민해 봐야할 것이라 본다.

* 배우성, “지리학과 실학”

지리학의 관심과 인식이 확대를 통한 실학적 경향을 살펴본 글이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지리지와 지도 편찬에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영조대 편찬된 “여지도서”의 경우 지도를 갖춘 실용적 지리지라는 점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그리고 “동국문헌비고”의 편찬은 여러 항목에 대한 집대성의 결과라고 평가할만 하다. 신경준의 도로고(道路考)와 같은 것이 그러하다. 이와 더불어 중국에 대한 지리지식인 “대명일통지”가 들어오기도 하였고, 서구식 세계지도가 보급되기도 하였다. 선교사들이 가지고 온 유럽판 세계지도가 한자로 번역되어 중국에 소개된 것은 명나라 말기였다. 그리고 그것이 조선에 들어왔다. 대표적인 것이 마테오리치의 “곤여만국전도”로 타원형 세계지도였다.

조선후기 지리서 중에서 가장 높이 평가받는 것은 이중환의 “택리지”이다. 이 책은 그냥 지리서가 아닌 인문지리서로 지칭된다. 그러나 특이하게 이 책에는 인심(人心)조가 있다. 당쟁과 탕평의 구조를 분석한 것이다. 지리서라고 하기에는 특별한 내용이지만, 그것이 오히려 이 책의 특징을 설명해 주고 있다. 대부분 이중환을 실학자로, “택리지”를 실학적 저작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과연 그것이 근대지향적인 실학의 대표적인 저술이라 할 수 있을까. 그는 여러지역을 분석하면서 풍수지리적인 발상으로 접근하고 있으며 특정지역에 대해서는 상당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저서가 근대지향적, 혹은 민족지향적이지 않은 이유중에 하나는 원본에는 당황스런 사실들이 기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역사상 이 나라에 진정한 사대부는 없었다”고 쓰여있는데, 최남선이 교열한 “택리지”에는 이러한 구절이 삭제되어 있다.(우리가 시중에서 보는 택리지는 최남선이 교열한 것으로 필사본 택리지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즉 이중환을 사대부의 행실을 닦길 원하던 성리학자였다. 그러므로 그가 택리지에서 선택한 살만한 곳은 일반 백성 누구나 살만한 곳이 아닌, 분명히 ‘사대부가 살만한 곳’이었다. 즉 이중환의 시각은 사대부가 잘 사는 세상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서구식 세계지도의 보급에 따른 반향은 어떠했을까. 실제로 성리학자들은 서구식 세계지도를 얼마나 신뢰했을까. 일본 홋가이도를 통해 살펴보면 당시 조선에서는 이 섬을 하이(蝦夷)라고 불렀는데, 서구식 세계지도에 그러진 하이섬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지 않았다. “성호사설”을 지은 이익의 경우 오히려 자신이 그 위치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서구식 세계지도에 대한 반응은 “천하도”라는 독특한 지도를 통해서 나타났다. 천하도는 중앙의 대륙에 안쪽에 바다 그리고 그 바다를 둘러싼 대륙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명은 중국과 조선, 일본, 유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상상의 나라들이다. 천하도의 이러한 배치는 중국 고대 추연의 세계관과 비슷하다고 평가받는다. 그리고 상상의 지명들은 대부분 “산해경”에서 따온 것으로, 산해경은 중국 고대의 신화서로 알려진 책이다. 즉 이단서적으로 간주되었던 “산해경”의 지명을 따라 중국 고대의 세계관에 관심을 가지게 만든 것이 바로 서구식 세계지도라는 것이다. 즉 새로운 지리적 문화의 충격은 고대 세계에 다시 관심을 가지게 만든 것이다. 그러면 과연 실학적 지리사상이란 무엇일까. 천하도를 통해서 살펴본 서구식 세계지도의 충격은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 고동환, “조선후기 도시경제의 성장과 지식세계의 확대”

조선후기 도시경제가 성장하고 도시문화가 발달하였다. 지식세계 자체의 변화는 이러한 배경으로 진행되었다. 지식은 상품과 마찬가지로 도시를 중심으로 생산, 유통, 소비되기 때문이다. 조선후기 지식세계의 가장 큰 변화는 물론 지식 그 자체가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크게 세 가지 차원에서 진행되었다. 하나는 학문적 연원이 다양화되었다는 점이고, 하나는 지식의 유통 속도가 증가하고 유통 체계가 확립되어 갔다는 점이고, 마지막으로는 지식계층이 확대된 점이다. 이러한 지식체계의 변화는 물론 실학사상의 형성에 큰 배경이 되었다고 그는 설명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그러했는지는 확증할 수 없다. 그는 반계 유형원이나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의 예를 들면서 설명하고 있지만 그것은 결과론일뿐 직접적인 연관성은 보이지 않는다. 유형원은 유년시절 서울 근교에서 살았지만, 말년 대부분은 전라도 부안에서 지냈으며 “반계수록”도 그곳에서 저술했다. 정약용도 경기출신이지만, 대부분은 유배생활이었으며 상당수의 저작은 전라도 강진 유배시절 작성되었다. 그러므로 도시경제의 성장에 따른 지식세계가 확대되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실학자의 양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좀더 구체성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최근 실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들이나 재구성을 시도하는 글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아직도 실학이 무엇인지는 학자 개개인마다 해석하는 틀이 다르다. 틀이 다르니 실학을 정의하는 구상도 다를 수밖에 없으며 실학에 대한 평가도 달라지고 만 것이 아닌가 한다. 실학에 대한 설명이 하나의 책이라도 어느정도 접합이 되었으면 좋았겠지만, 아직도 학계 안에서 실학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이 불가능함을 재확인한 것이 아닌가 생각도 든다.

출처:"다시 실학이란 무엇인가", 푸른역사, 2007.

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