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 연구의 어제와 오늘

사편(史片)/조선시대 2010. 8. 29. 22:52 Posted by 아현(我峴)

실학 연구의 어제와 오늘

1. 1930년대 민족주의 국학자들이 본 실학

조선후기 학풍으로 실학이라는 학파를 학술용어로 쓰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민족주의 국학자들이다. 1934년 정약용이 서거한지 99주년이 되는 해에 다산의 학문을 정리한 것이 계기였다. 이어 조선학 운동이 벌어지는데 이는 공산주의적 혹은 부르주아적 민족주의가 아닌 계급통합적 신민주주의라고 한다. 실학의 현실성은 여기서 찾아진다. 그러나 이러한 학풍은 정약용이라는 특정 인물을 중심에 두고 설정된 것이었다. 그리고 정약용을 연구한 학자들도 자신들의 학맥과 연결되는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래서 초기 실학 연구는 목적론적인 시각에서 접근했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실학이라는 용어는 일본학계의 연구도 무시할 수 없다. 정약용에 대한 연구는 일본 학자도 일찍이 관심의 대상이었다. 아사미 린타로(淺見倫太郞)은 1922년 그의 저서인 <조선법제사고>에서 정약용을 실학자라고 불렀으며 “이조 말 확실히 한 사람의 정약용을 낸 것은 반도의 행복이었고, 왕국의 불행이었다”라고 지적했다. 1930년대 정약용을 중심에 놓고 실학을 탄생시킨 배경은 분명 시대적 한계가 있었다. 즉 민족주의자들의 현실적 요구의 일본학계의 영향이 그것이다.

2. 1950년대 천관우의 실학개념

초기 실학 연구를 극복한 인물은 천관우와 홍이섭이었다. 천관우는 1952년 그의 학부졸업논문인 <반계유형원연구>에서 실학의 개념을 다시 정리했다. 그는 실학을 실정(實正), 실증(實證), 실용(實用)을 특징으로 하는 조선후기 신학풍이라 평가하고 이후 여러 학자들이 나와 실학의 맹아카 싹트였고, 북학파에 의해서 전성기를 이루었다고 보았다. 그의 실학연구는 300년으로 확장되었으며 각기 준비기, 맹아기, 전성기로 실학의 시대성을 평가했다. 그러나 과도기적인 사상으로서의 실학이 과연 19세기에 그 소임을 다하고 근대로 넘어가야 하지만 실제로 그렇지 못했다. 그의 실학접근은 봉건과 근대의 대칭구도를 특징으로 하는데,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실학개념에 대한 글에서도 실학을 민족지향, 근대지향으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홍이섭은 정약용을 통해 실학을 연구했다. 그의 박사학위논문을 통해 봉건적인 것에서 근대적인 것으로의 이행 과정에서 정약용을 평가했다. 그는 주자학은 봉건적 사유로, 실학은 주자학에서 벗어나려는 사상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실제로 홍이섭의 연구는 아사미 린타로의 영향이 크다고 평가할 만하다.

3. 1958년 한우근의 실학개념

실학을 반주자학으로 정의한 천관우와는 달리 개념을 재정의한 한우근의 연구가 있다. 그는 그의 글에서 실학개념을 버리고 실록과 문집을 통해 새로 정의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실학은 조선후기 고유의 용어가 아니라 조선시대 내내 사용되었던 용어였다. 조선전기에는 주자학과 정주학을 가리키는 용어로 실학을 사용했다. 주자학이 실학이라 불린 이유는 고려시대 사장학에 빠진 유학을 진정한 유학으로 보지 않고 고려말 신진시대부에 의한 유학이 진짜 유학, 즉 실학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면 그 동안의 실학은 어떻게 바꾸어야 할까. 한우근은 ‘경세치용의 학’이라는 용어를 제한했다.

4. 1970년 이우성의 실학개념

이우성은 그의 논문에서 실학을 경세치용(經世致用), 이용후생(利用厚生),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세 분야로 나눌 것을 제안했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실학의 분류법은 그의 연구에서 비롯되었다. 경세치용은 유형원과 이익 등의 초기 실학자를, 이용후생은 18세기 북학파의 사상을, 실사구시는 19세기 청대 고증학을 받은 학자들을 지칭했다. 그러나 위 세가지 개념은 본질적으로 서로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고 충분히 중복되어 사용한다는 문제점이 있다.

5. 1980년 지두환의 실학개념

1970년대 이후 실학 연구는 주춤해졌는데 이유는 2가지였다. 하나는 당시 군부의 근대화정책에 대한 반발로 실학 연구가 주춤해진 것(개인적인 이 이유는 받아들이기 힘들다)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에 드는 실학자를 찾아내려는 방법론의 문제였다. 성리학에 대한 연구가 깊어지면서 성리학에 내포된 긍정적이고 진보적인 요소들이 밝혀졌다. 그리하여 실학에 대한 재평가는 불가피해지고 있었다. 실학을 반주자학이라고 재단했기 때문이다. 지두환의 연구는 그러한 연장선상에 있었다. 그는 두 가지 점에서 종전의 실학 용어와 다른 점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조선시대 실제 사용된 실학은 과거시험에 있어서 강경(講經)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즉 한우근이 주장한 사장학에 반대되는 주자학의 개념과 상통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북학이 근대지향적이고, 북학만이 진정한 실학이라는 것이다. 즉 그의 실학개념은 전형적으로 근대지향에 기준을 두고 있어서 천관우의 초기 연구와는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6. 대안1:실용적 성리학이 실학

그럼 실학이란 무엇인가. 주자학이 실학이라거나 강경이 실학이라는 말은 조선전기에만 해당한다. 조선후기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전의 주자학과는 다르게 실용적인 학문, 수기치인의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학문을 실학이라고 부르는 편이 낫다. 즉 유형원처럼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어떠한 방법으로 바꿀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실학이라는 것이다. 무엇을 하던 실질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수광의 지봉유설, 유형원의 반계수록, 안정복의 임관정요, 유수원의 우서가 그러한 서적들이다. 정조대 여러 학자들이 기기들을 통해서 화성을 건설하고, 북학파들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도 그 한 축이다. 조선후기의 실용적 성리학을 실학이라고 정의할 때 그 외에 거의 실용적이지 않은 의리학이라 예학은 그냥 성리학자일까. 현재로서는 실학이라 부르기는 힘들 듯 싶다.

7. 대안2:교조적 주자학은 과연 있었는가.

조선전기 주자성리학이 조선중기의 율곡에 이르러 조선성리학으로 변화하고 18세기 후반 이후 북학으로 발전한 것은 과연 타당할까. 18세기 후반 이후 북학이 성리학과 구별되는 성질의 학문체계였을까. 16세기에 사림이 등장하면서 15세기 국가체제를 비판했다. 그리고 향촌사회 안의 문제는 주자의 향약과 사창제를 적극 수용하고자 하였다. 16세기 성리학은 율곡의 성학집요로 집대성되었다. 그러나 그는 주자의 언설만 인용한 것이 아니라 북송과 남송대의 학자 견해도 종합하여 수용했으며 조선의 전통적인 계(契)와 절충시킨 제도를 운용하기도 하였다. 17~18세기는 서인 위주의 사상계로 단순화되고 있었으나 실제 하나의 흐름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주자를 비판한 윤휴나 박세당이 있었으며 왕양명이나 육구연의 심학(心學)이 들어오기도 하였고, 서양 선교사가 가져온 지식을 서학(西學)이라는 이름으로 수용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주자학 내지 성리학이라고는 하였으나 각기 특성이 다른 성리학이 있었다고 하는 것이 나을 듯 하다.

8. 대안3:서울 지역의 육경고학이 실학의 연구

육경고학(六經古學)은 주자학 중심의 사서삼경을 넘어서 육경(六經;시경, 서경, 역경, 춘추, 예기, 주례)에 주목하는 것으로 주자의 주석에 구애되지 않는 경전의 시도를 말한다. 그리고 육경고학자들은 여러 학문에 대해 매우 관용적이고 포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이나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은 바로 이러한 학풍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개 경기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남인으로 정조도 이들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육경고학풍이 남인에게만 수용된 것은 아니었다. 노론계를 이끌었던 김창협과 김창흡도 이와 깊은 관련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당파보다는 지역적인 특성이 육경고학풍의 특성이라 이름지을 만하다. 노론에서 일어난 북학의 이용후생론도 결국 서울과 인근 지역을 무대로 발생하였다.

9. 대안4:중세와 근대의 이분법 극복

실학연구에서 극복되어야 할 문제는 중세와 근대의 이분법으로 규정하려는 태도이다. 그동안 실학은 중세에서 근대로 나아가려는 사상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조선후기를 자본주의 사회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조선후기 지성사의 흐름 안에서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조선후기 사회는 부국강병보다는 유교적 이상주의에 입각한 대동사회를 꿈꾸고 있던 사회였으므로 사회성격을 규정지으는데 신중해야 한다. 즉 조선후기 지식인들에게 조선사회는 유교적 이상사회가 되기를 바랬다고 볼 수 있고, 실학자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을 평가할 때는 이러한 점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한영우는 근세적 유교사회라는 점을 제시하고 조선후기 사회를 유교적 이상주의를 바탕으로 근세 유교국가의 중흥을 이룩한 시대라고 평가했다.

10. 대안5:실학은 시대에 따라 변화했다

한영우는 육경고학에 대해서는 실학이라는 말을 써도 좋다고 보았다. 물론 육경고학자 안에서도 중농적 개혁안을 제출한 학자도 있고 중상적 개혁안을 주장한 학자도 있다. 그 중에서도 18세기 후반 북학은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며 개혁적인 당당한 실학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보았다. 북학은 19세기 전후하여 청대 고증학을 수용하면서 학문의 실증성과 과학성이 전보다 한층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세기 고증학은 근대 학문의 선구로서 크게 기여했지만, 학문의 실증성이 깊어질수록 실청성이 상대적으로 약화된 것은 실학의 한 변모라고 하였다.

11. 대안6:미래의 신실학

한영우는 실학에 대하여 현대적 입장에서 무엇을 계승할 것인가의 문제로 실학이라는 조선후기 사상을 정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는 제시하지 않았다. 위와 같이 실학에 대한 연구를 정리한다면 우리는 이제 실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실학이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있었다면 실학이란 과연 무엇을 지향하고 있었으며 조선후기 사회에서 어떻게 평가받아야 할까요?

참고문헌 : 한영우, “실학 연구의 어제와 오늘”, <다시, 실학이란 무엇인가>, 푸른역사, 2007.

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