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실학과 성리학과의 관계

사편(史片)/조선시대 2010. 8. 2. 00:40 Posted by 아현(我峴)

초기 실학과 성리학과의 관계-반계 유형원의 경우

1. 머리말

실학의 철학적 배경으로 성리학과의 관계에 시선을 돌리는 일이 당시 주목됨. 실학연구자들 중에서 손쉽게 실학의 원류를 전대의 성리학의 한 종파인 율곡 이이에게 연결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실학과 성리학의 관계, 특히 실학의 철학적 배경으로서의 성리하고가의 사상적 연원 관계를 논할때 보다 신중한 검토가 필요. 이에 반계 유형원을 주목하게 됨.

2. 반계실학의 철학적 배경

성호 이익의 <반계유선생전>에 따르면 학문이 반계수록의 철학적 바탕이 됨. 오광운의 반계수록 서문을 보면 도학의 학, 즉 이기론과 경학을 알아야 반계 철학적 바탕을 이해함. 반계는 성리학자들의 체용론을 그대로 인용하여 육경은 體이고 법제와 교화는 用이라 보았다.

또한 유형원이 친구 정동직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반계를 한때 唯氣論이라 할 만큼 기철학에 경도되어 있어 주자에 대한 불만이 컸다고 한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공부하면서 성숙해질 무렵 사상의 전환을 하게 된다. 즉 理와 氣를 선후관계로 보아서는 안되며 理의 일차성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즉 주리론인 것인데, 다만 그는 정자의 말을 인용하여 理를 實理라고 강조했다.

실리를 강조하고 실리에 의해 사실에 대처해 나간다는 반계의 학자로서의 자세는 곧 후일 실학의 방향을 열어놓은 것이라 볼 수 있지만 반계의 기본 사상 기본논리는 전통적 성리학에서 나온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공리적 동기를 철저히 배제했다고 보았는데 후일 이용후생파에서 나타나는 프래그마티즘적(실용주의적) 성향은 반계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 한다. 즉 천리를 따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반계의 생각이다.

반계는 토지제도에 以地爲本과 以人爲本이 있다고 보았다. 이에 당과 고려가 以人爲本을 정책으로 삼아 計丁給田함으로써 사람이 많고 토지가 적으며, 토지가 많고 사람이 적은 폐단이 생겨 토지제도가 문란해졌다고 보았는데, 중요한 지적이라 본다.

반계실학의 철학적 배경은 성리학에 깊은 관계가 있을 뿐 아니라 구체적 사안인 토지제도의 문제에 있어서 성리학의 이론에서 착상했던 것으로 본다.

3. 반계 이기론의 맥락

반계는 이기문제와 인심도심론 에 관한 자기의 견해가 율곡과 비슷하다는 것을 자인하기도 했다. 그는 퇴계의 설명방식에 약간 의심은 품고 있으면서도 기본적으로는 퇴계의 설을 지지하여 요순 이래 정통적 견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율곡의 논리를 비판하여 고인의 본지가 아니라고 했다.

사단칠정 내지 인심도심에 대해서 반계는 율곡의 理氣共發說을 취하지 않았다. 반계는 결국 퇴계를 옹호하게 된 것이다. 반계의 이러한 생각은 대개 구암 한백겸의 사단칠정설에서 유래했다. 그래서인지 반계의 이기설을 보면 한백겸과 너무나도 상통하는 점이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4. 맺음말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반계의 학문은 성리학에 깊은 造旨를 가졌고 이 성리학적 요양 속에 시대현실에 대처하려는 새로운 학문 방향을 정립하게 되었다. 2) 반계는 주리론자로서 리는 실리라고 강조하고 실리로써 천하의 실사에 대처하려 하였다. 반계수록의 대저술도 이러한 실사 대처의 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3) 반계의 이기론 즉 그의 철학적 이론은 율곡 쪽을 비판하고 퇴계 쪽을 옹호하였다. 그의 선배인 구암과 같은 입장이었다.

그러나 더 생각해봐야 할 문제도 아울러 제시했다. 1) 실학은 성리학을 태반으로 하여 발생한 것이다. 2) 종래 우리는 주기론-기철학이 실학의 사상적 연원이라고 막연히 여겨오고 있었는데 반드시 그렇지 않다고 볼 수 있다. 3) 실학의 원류를 특별한 이유없이 안이하게 율곡에게서 찾으려는 것은 재검토되어야 한다.

* 이우성, "초기 실학과 성리학과의 관계-반계 유형원의 경우", <동방학지> 58,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