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진보적 역사관의 성립

사편(史片)/조선시대 2010. 7. 14. 17:00 Posted by 아현(我峴)

조선후기 진보적 역사관의 성립 - 유형원의 변법사관

1. 머리말

실학은 조선왕조의 집권체제가 그 해체과정에 접어들고 있던 17세기 초부터 뚜렷이 등장하고 있었다. 잘 알려진대로 반계 유형원은 실학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17세기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었다. 반계수록은 유교의 유구한 예법, 전장의 정신을 계승하는 위에서 작성된 국가경영 이론이며 그것이 지향하는 실증적, 개혁적, 진보적 방법과 목표는 바로 실학의 이념을 대변할 뿐더러 실학의 수준과 목표를 획기적으로 끌어올리는 학문, 사상적 성과였다.

2. 반계수록의 이념과 전사 인식
 1) 반계수록의 성립과 개혁이념

반계수록은 그의 이러한 유자로서의 책무의식과 진보적 사상가로의 개혁 구상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는 정제서, 경세서였다.

유형원은 북인에 연결되는 남인 계통. 그를 조정에 추천한 사람은 서인의 실력자였으며, 그가 정제론에서 많이 인용한 선유의 견해 역시 남인계가 아니라 서인으로 분류되는 이이와 조헌의 것이었다. 그렇지만 유형원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공전론의 기본구상은 남인계 한백겸의 견해에서 시사받은 것이 많다. 주자와 주자학에 대해서도 매우 자유롭고 객관적이었다. 유형원은 사적 대토지소유의 확대에 의한 생산관계, 지주전호제의 모순에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사전제=토지소유제를 공전제=토지국유제로 개혁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2) 고려, 조선, 중국 전사의 인식과 정제의 연구

今制에 대해서 고제와 고법을 선호했듯이 우리나라의 것보다 중국의 것을 더 선호한 듯이 보인다. 유형원의 고제와 전고와 전사와 중국사에 대한 저항은 단순히 복고, 모방, 사대의 태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미래, 창의, 자립의 사유 자세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경국대전의 규정을 긍정하고 이를 근거로 조선후기에 이르러 제도가 왜곡된 실상을 강조하기도 했다. 유형원은 무엇보다도 토지제도의 개혁을 위해 중국과 고려의 옛 제도를 면밀히 검토하는 가운데서 나라의 법제에 미비하거나 불합리한 점이 많다는 사실을 더욱 확신하였다. 유자 일반의 정서가 대개 그렇지만 유형원도 중국의 진왕조에 대해서는 유독 부정적으로 보았다. 고려의 제도에서 주목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조운이었다.

유형원은 현실의 국가 물물 제도가 안고 있는 폐단이나 문제점을 예의 분석하고 그 대안을 모색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고제와 전사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기준을 유교 주자학의 윤리설이나 의리, 명분론의 시각이 아니라 국부, 편민이라는 실용, 공리의 측면에 두었다는 것이다. 유형원의 이러한 고제, 전사 인식 태도를 통해서는 도덕지상주의 역사관으로부터 합리적 공리주의 역사관으로의 轉回, 즉 명분론과 화이론에 기초한 주자학의 상하수직적 중국중심주의 역사관이 해체되면서 상호평등적 다원주의 역사관이 형성되는 계기가 마련되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3. 변법사관의 구조와 성격
 1) 개혁과 진보 : 변법의 개념과 의의

유형원은 금제의 잘못된 점을 전면적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므로 이이 등의 법구폐생설이나 변통론, 경장설을 그 선구적인 견해로 적극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위에서 그 나름의 변통 논리, 변법관을 세우게 되었다.

과거의 좋았던 제도를 참작해서 현재의 잘못된 제도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더 좋아지는 방향으로 고쳐가는 일, 이것이 다름아닌 유형원이 생각하는 변법이었다. 본보기로서 삼대 이래의 법제, 물물제도를 대상으로 삼았다. 두가지 측면.

하나는 현실법제의 폐단이나 모순을 정확히 밝히는 비판의 근거로서 고법제를 원용하는 점이었다. 다른 하나는 현실의 폐법에 대치할 새로운 법제를 마련하는데는 역시 역사상의 전고와 정제가 다수 참고되고 응용되어야 했다는 점이다.

유형원이 비록 삼대 성왕과 법제의 의의를 강조했지만 그의 기본 사유가 복고주의, 상고주의가 아니며 오히려 미래지향적 사유에 투철했음이 확인된다. 즉 그의 역사이론은 진보적 변법사관.

 2) 변법론의 구조 : 본말, 도기, 체용설과 민본주의

사회, 역사 의식의 진보성을 특징으로 하는 유형원 사상의 또 다른 측면은 변법적 제도개혁론에서 드러나는 현실성과 구체성, 그리고 획기성과 체계성에 있다. 다시말하면 유교 주자학의 논리인 도기설을 빌려서 기존의 윤리도덕 중심의 보수적 도기설을 일정하게 극복해가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현실 제도의 개혁, 변법의 실행목표는 무엇보다도 민본, 위민에 있었다.

유형원이 그의 개혁론에서 지향한 민본, 위민은 삼대나 유교 경전의 정신에 충실하려 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을 직시하여 사회, 역사 발전의 정당한 방향을 정확히 인식한 양심적인 지식인의 태도에서 기인한다고 보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개혁의 실행주체는 반드시 국가이어야 한다는 것이 유형원의 생각이다.

 3) 변법사상과 변법사관

변법론, 변법사상은 대체로 이이, 한백겸에게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이이는 이 때 실무, 실공, 시세를 내용으로 하는 실학을 내세우며 폐단을 일으키는 법제를 개폐하는 변통, 경장에 당장 착수하자고 건의하였다. 한백겸이 정전제를 깊이 연구하여 새로운 토지이론으로서 기전설을 제기하는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았다. 시의, 무실, 실학을 내세우면서 현실의 폐법, 구제를 개혁하자는 변통, 경장의 논의는 이렇게 이이와 한백겸의 경우를 통해서 뚜렷이 확인된다. 16세기 후반부터는 변법적 사고가 분명히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누구도 변법이라는 말을 내놓고 쓰지는 않았다. 변법을 생각하는 논자들은 당장 삼강오륜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민생, 왕도, 인정이야말로 그 보다 더 중요한 바꿀 수 없는 원칙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익의 시기에 와서야 변법이 학술, 사상의 주체로 다루어지고 정치 현실의 인식과 대안의 모색이라는 차원에서 검토되는 계기를 맞은 것이엇다. 이익은 유자로서 법가 상앙의 변법을 긍정하고 왕패를 절충하는 부국강병의 사회개혁을 구상함으로써 실학의 학문 사상 운동을 한 단계 이끌어 올리는 역할에 나서게 된 것이었다.

동도서기론적인 사유는 근대개혁운동이 긍극적으로 실학과 지향했던 변법적 사유와 실천에 접근하는 하나의 계기, 혹은 단계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분명하였다. 사실 동도서기론의 논리적 모순과 시행착오는 대한제국기의 구본신참론에 이르러 비로소 극복되기 시작했다. 계몽사상가들이 표방했던 변법자강론 역시 일정한 의미에서 구본신참론의 확대되는 하나의 움직임이다. 실학의 변법론이 개혁적 인식논리, 진보이념이라면 변법론적인 역사의식은 바로 진보적 역사관에 직결되는 것이며 이것을 가리켜 변법사관이라 불러 무리가 없을 것이다.

* 김준석, "조선후기 진보적 역사관의 성립-유형원의 변법사관", <국사관논총> 93, 2000.

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