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글은 이순신이 통제사 자리를 원균에게 빼앗기는 상황의 기사 4건입니다. 위 기사를 보고 당시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A4 2장으로 정리하시면 됩니다.
1. 선조실록 84권, 선조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1월 23일(갑인)
○ 사시(巳時)에 상이 대신 및 비변사 유사 당상을 명초하여 인견하였다.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이르기를,“주문사(奏聞使-명에 보내는 사신)를 차견(差遣-임명하여 보냄)하는 것이 가장 좋다. 일본에 사신을 보내는 것이 대지(大旨-대세)이다. 중국이 간세(奸細)한 무리에게 기만을 당해서 성지(聖旨-명황제의 명령)에도 사신을 보내라는 말이 있다. 저 적들은 전에 보낸 우리 사신의 벼슬이 아주 비미(卑微-낮다)하다고 핑계하지만 이는 다만 우리 나라를 삼키기 위한 계책이요 중국의 뜻을 엿보려는 것이지, 사실은 사신의 직질(職秩-관직의 품계)의 고하(높고 낮음)에 있지 않다. 전일 주문한 자문(명황제에게 보내는 글)에는 단지 나라가 급박하다는 뜻과 적이 날뛰고 있는 상황만 언급했고, 이런 사정은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마땅히 적들의 뜻은 우리 나라를 삼키기 위한 것에 있고 사신의 직질의 고하에 있지 않다는 것으로 한편의 요지를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중국에서도 반드시 그렇게 여길 것이다. 또 내가 전혀 듣지 못했었는데 이제 비변사의 초기(草記-문서)를 보니, 임소조(林小鳥)【본래 중국 사람으로 일찍이 일본에 투항한 자이다. 】 등이 소서문(小西門)밖에 머물고 있었는데 양사(楊使)가 거느리고 중국으로 갔다 하니, 매우 놀랍다. 자문을 보건대 ‘성지(聖旨)를 받드니 양방형(楊方亨)이 왜인을 데리고 들어오라.’고 한 것이 있는데 이것이 그 일이다. 저 적들이 이미 중국의 책봉(冊封)을 받고도 사신을 보내 사은(謝恩-감사함을 표현함)은 하지 않고 단지 미복(微服-허름한 옷차림)으로 양 책사를 따라 함께 제도(帝都-명나라 수도)로 들어갔으니 사은사(謝恩使)라고 하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을 것이다. 모름지기 이런 뜻으로 주문(奏文-명나라에 글을 올림)하면 중국에서도 반드시 심유경(沈惟敬)의 무리가 말을 꾸며 협잡을 부린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반드시 그럴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혹시 속인 일이 있더라도 이 주문이 들어가면 중국에서도 반드시 의심하기를 ‘일본 사신이 조선을 거쳐 들어와 사은했다면 조선에서 어찌 모르겠는가.’ 할 것이니, 여기에서 그 정상이 탄로나 형적을 숨기지 못할 것이다.”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중국에서 우리 나라를 내지(內地)처럼 본 것은 예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만약 원수의 뜰에 사신을 보낸다면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보낼 수 없습니다.”하였다.
상이 노하여 이르기를,
“이번에는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비록 미혹(迷惑)하나 어찌 저 왜적이 원수임을 모르겠는가. 만약 예의로 말한다면 황신(黃愼)이 간 것은 예의이고 성지(聖旨)를 받들어 사신을 보내는 것은 예의가 없다는 것인가. 내 뜻으로는 크게 그렇지 않다고 여긴다. 만약 성지를 어겼다하여 불행한 일이라도 있게 되면 어떻게 결말을 짓겠는가. 이번에 사신을 보내는 것이 의리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가. 내 생각에는 사신을 차출하여 행장을 꾸려 준비하는 것만 못하다. 성제(聖帝-명 황제)께서 두 나라를 화해시키려고 힘쓰시니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성지(聖旨)가 이곳에 도착하면 즉시 당보(塘報-적의 형세를 알림)해야 합니다. 이런 길이 한번 열리면 막지 못할 걱정이 있을까 싶습니다. 반드시 주문(奏聞)해야 합니다.”
하고, 유영경(柳永慶)은 아뢰기를,
“비록 성지를 받든다고 하나 사실은 병부(兵部)의 제본(題本)입니다. 설사 성지를 받들더라도 땅을 할양하고 칭신(稱臣-신하라 칭함)하라 한다면 어찌 일일이 다 응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덕형은 아뢰기를,
“기회를 보아가며 보내는 것이 편리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석성(石星)은 좋지 못한 사람이어서 권간(權奸-권신과 간신)이라 해야 마땅하다. 처음에는 우리 나라 일을 위해 힘써 준 것은 좋으나 그가 성총(聖聰)을 속인 일은 매우 무상(無狀)하다. 이번 주문 내용에 모름지기 권협(權悏)이 가는 일과 이번에 논한 두 조항을 언급해야 한다. 다른 일은 성지를 기다린 뒤에 해야 한다.”
하고, 이덕형에게 이르기를,
“두 조항에 대해 아는가? 하나는 보내는 사신의 직질이 낮은 것을 트집잡는 말이고, 하나는 중국의 은전(恩典)이 망극한데도 사신을 보내 사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고, 이덕형에게 거듭 명하기를,
“지금 빨리 먼저 나가 기초(起草-문서를 작성함)하라.”【대개 이덕형이 이때 대제학(大提學)으로 있었기 때문에 이런 하교가 있은 것이다. 】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금년의 농사가 반드시 지난해보다 못할 것이다. 우리 나라 백성들은 자구(自救-스스로 구함)하기에 겨를이 없다.”
하니, 이산해가 아뢰기를,
“이후에는 힘껏 수군울 조치해야만 믿을 수가 있습니다. 신이 지난번 호서(湖西-충청도)에 있을 적에 마침 원균(元均)을 만났습니다. 원균이 말하기를 ‘왜적을 무서워할 게 무엇인가?’ 하기에 신은 처음 듣고는 망령되다 여겼습니다. 지금에 와서 보니 수군을 믿고 그런 말을 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번 김신국(金藎國)이【김신국이 군기 선유관(軍機宣諭官)으로 이원익(李元翼)에게 내려갔다가 돌아왔다. 】 돌아왔는데 신이 물었더니, 김신국이 말하길 ‘도체찰사 역시 수군을 믿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추(倭酋)는【행장(行長-소서행장, 일본장수 이름)을 말한다. 행장이 김응서(金應瑞)에게 청정(淸正)을 도모할 계책을 일러주었는데, 유성룡(柳成龍) 등이 적의 말을 경솔히 듣다가 그들의 계책에 빠질까 싶다며 경솔히 움직이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게 된 것이다. 】 손바닥을 보이듯이 가르쳐 주었는데 우리는 해내지 못했으니, 우리 나라야말로 정말 천하에 용렬한 나라이다. 지금 장계를 보니, 행장 역시 조선의 일은 매양 그렇다고 조롱까지 하였으니, 우리 나라는 행장보다 훨씬 못하다. 한산도(閑山島)의 장수는 편안히 누워서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몰랐었다.”【한산도의 장수는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었다. 】
하니, 윤두수가 아뢰기를,
“이순신은 왜구를 두려워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실로 나가 싸우기에 싫증을 낸 것입니다. 임진년 정운(鄭運)이 죽을 때에도 절영도(絶影島)에서 배를 운행하다 적의 대포에 맞아 죽었습니다.”
하고, 이산해는 아뢰기를,
“이순신은 정운과 원균이 없음으로 해서 그렇게 체류한 것입니다.”
하고, 김응남은 아뢰기를,
“정운은 이 순신이 나가 싸우지 않는다 하여 참(斬)하려 하자 이순신이 두려워 마지못해 억지로 싸웠으니, 해전에서 이긴 것은 대개 정운이 격려해서 된 것입니다. 정언신(鄭彦信)이 항상 정운의 사람됨을 칭찬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 이순신에게 어찌 청정의 목을 베라고 바란 것이겠는가. 단지 배로 시위하며 해상을 순회하라는 것뿐이었는데 끝내 하지 못했으니, 참으로 한탄스럽다. 이제 도체찰사의 장계를 보니, 시위할 약속이 갖추어졌다고 한다.”
하고, 상이 한참동안 차탄(嗟歎)하고는 길게 한숨지으며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이제 끝났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니, 윤두수가 아뢰기를,
“왜적은 만세토록 잊지 못할 원수여서 밤낮으로 복수를 생각해야 합니다. 심유경(沈惟敬-명나라 장수)은 분쟁(紛爭)을 푸는 것을 자기 임무로 삼고 있으니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모름지기 극진하게 대접해야 합니다. 이번에도 친히 접견하지 않았으니 그의 마음이 서운할까 싶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심사(沈使-심유경)는 천자를 속였으니, 이는 천하의 도적이므로 천하가 함께 성토(聲討)해야 한다. 천자를 기만한 죄는 덮어둘 수가 없는데, 다만 천자가 그 간사함을 통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나가서 영접하지 못한 것은 병이 있어서였다.”
하니, 유영경이 아뢰기를,
“심사는 중국 입장에서 보면 나라를 판 간흉입니다.”
하고, 윤두수는 아뢰기를,
“임금은 마땅히 천하의 도량을 가져야 합니다.”
하고, 이산해는 아뢰기를,
“인심을 책려하고 수군을 정돈하여 장래를 도모하는 것이 오늘날의 급선무입니다.”
하고, 정탁은 아뢰기를,
“심사의 접대는 반드시 극진하게 해야 합니다. 어찌 그가 부덕(不德)하다 하여 왕인(王人)을 박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심유경의 왕래로 인부와 말이 피폐하게 되었으니 천하의 죄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심유경이 어찌 인부와 말을 피폐하게 하였기 때문에 천하의 죄인이 되겠는가. 군부(君父)를 속이고 조정을 농락한 것이 그의 죄이다. 그래서 중국의 급사중(給事中)이 말하기를 ‘동봉(東封-조선으로 보냄)하는 날 심유경은 무슨 말로 대답할 수 있겠는가?’ 하였으니, 중국 사람들 역시 매우 미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니, 유영경이 아뢰기를,
“갑오년 사이에 사람들 모두가 석성(石星)의 화상(畫像)을 걸어놓고 생사(生祀)를 지냈습니다만 신은 홀로 천하의 대사를 그르칠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과연 신의 말과 같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하교하신 대로 먼저 사신을 의주로 보내 성지(聖旨)가 동쪽에 반포되기를 기다렸다가 즉시 들어가 주문(奏聞)해서 다시 성지를 받든 뒤에 서서히 사신을 보내야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유성룡과 김응남이 아뢰기를,
“일본에 사신을 보내도 실제 아무런 이익이 없으니 한결같이 보낼 수 없다는 뜻으로 주문하는 것이 무방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에는 보내지 않을 수 없다고 여긴다. 중국에서 만약 ‘천자(天子)의 사신도 왜적이 철수하기 전에 일본으로 들여보내는데, 너희 나라만 유독 철수하기 전에는 들여보내지 않을 수 있는가.’ 한다면 무슨 말로 답하겠는가? 나는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구걸하려는 것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사신을 보내고 한편으로는 무익하다는 뜻을 주문하고 그뒤에 처리하기 곤란한 일이 있게 되면 다시 중국에 주문하는 것이 무방하다. 내가 일찍이 깊이 염려한 것은 중국에서 반드시 대신(大臣)과 왕자(王子)를 보내라고 하리라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배신(陪臣)을 보내라고 조서(詔書)하였으니 역시 크게 관계된 일이 아니다. 보내서 방해로울 게 무엇인가. 지난간 일로 보건대, 황윤길(黃允吉-전쟁직전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신하)은 ‘적병이 곧 뒤따라 올 것이다.’ 하였는데, 그 당시 만약 보내지 말자는 의논을 받아들였다면 어찌 뒷날의 의논이 없었겠는가. 지금 만약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가 청정이 나올 경우 사람들이 반드시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이때 성지(聖旨)에 조선에서 일본에 사신을 보내면 일본이 즉시 철수할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상께서 이런 명을 한 것이다. 그러나 며칠이 되지 않아 청정(淸正)이 재침함으로써 그 의논이 마침내 중지되고 말았다. 이때 보내서는 안 된다고 힘껏 주장한 자는 김응남뿐이었다. 】
하자, 좌우가 모두 답하지 않았다. 상이 이르기를,
“심유경은 적의 진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가? 성지에는 두 나라 일이 끝난 뒤에 들어오라는 말이 있었다.”
하니, 김명원이 아뢰기를,
“신이 그의 차관(差官)의 말을 들어보니, 아직껏 진퇴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육문도(陸文韜)의 일은 우리 나라에서 참으로 잘 처리하여야 한다. 만에 하나라도 행여 그 계책에 빠지면 반드시 처리하기 힘든 일이 있을 것이다.”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의논이 저해되는 것이 많아서 쉽게 군사를 출발시키지 못하고 있으니 매우 걱정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에서 즉시 군사를 출발시키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이원익이 내려갈 때, 중국군을 청하여 오면 지공(支供)할 수 없으니 우리 나라에서 군사를 조발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군이 비록 경상도에서 적을 토벌하지 않더라도 만약 중국군이 온다면 인심이 의지할 곳이 있게 될 것이고 불칙한 사람이 간사한 모의를 꾀하더라도 반드시 두려워하고 꺼리는 바가 있게 될 것이다. 전라도(全羅道)는 인심이 매우 잘못되고 있다.”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전라도 유생(儒生)들이 과거에 응하려 하지 않으니 인심을 알 만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인심이 그러하니 우리 나라 사람이 어찌 간궤(奸軌)한 자가 없겠는가. 중국군이 오면 반드시 의지하여 괜찮을 것이다.”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전라도 사대부들은 현저한 벼슬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유념하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실 공(功)이 많은 도(道)이니 그 말이 옳다. 지난번 전교에 ‘급하지 않은 공부(貢賦)는 감해 주어 일분(一分)의 역(役)이라도 감하라’ 하였는데 이것이 급히 해야할 일이다. 호조(戶曹)에서 살펴 하라. 충청도와 전라도는 매우 염려된다. 임금이 이런 생각을 두어서는 마땅하지 않지만 역시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좌상(左相)도 이것을 걱정하는구나.”【전라도 사대부(士大夫)들이 좋은 벼슬을 얻지 못했다는 말을 가리킨다. 】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포수(砲手)와 화전(火箭) 등의 일은 모두 말단의 일입니다. 대저 가정에서 부자(父子) 사이에도 다 통하지 못하는데 더군다나 군부(君父) 사이겠습니까. 위에서 어찌 다 통촉하시겠습니까. 모름지기 백성들을 돌보시고 인재를 거두어 쓰소서. 계사년 환도(還都-서울로 돌아옴)하던 날, 상께서 옥식(玉食-임금의 음식)을 감생(減省-줄임)하시고 굶주린 백성을 모아 구제하시니 백성들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며 어가(御駕-임금의 행차)를 따라 돌아왔고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들도 감격하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신은 지금 상의 마음이 전과 같지 않으신가 염려됩니다. 땅이 비록 좁기는 하지만 수천 리의 땅인데 어찌 가볍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는, 체읍(涕泣-눈물을 흘림)하면서 절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라도 공물을 다 체찰사에게 붙이고자 하는데 어떻겠는가?”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지지(紙地-종이)·유둔(油芚-기름) 등은 구할 길이 없으니 감손(減損-줄임)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지지 수종(數種-여러종류)만을 호중(湖中-전라도)에 책임지우고 기타 공물은 감하는 것이 옳다.”
하고, 또 이르기를,
“청정의 글 가운데 ‘조선에 사신을 보낸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글로 보면 사람을 보낸 것 같은데 다만 거느린 군사들이 지금 바야흐로 벌목(伐木)하여 영책(營柵)을 수리하고 있다고 하였으니, 우리 군사가 엄습할까 두려워 그런말을 한 것입니다. 근래 그들 형세를 보면 바야흐로 소굴을 수리하고 있으나 2백척에 실은 군량이 쉬 동이 날 것입니다. 청정이 만약 임진년 때처럼 곧바로 달려온다면 이는 하책(下策)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찌 하책이라 하는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임진년에 우리 나라 사람들이 조금만 전쟁을 알았다면 반드시 적이 무인지경처럼 들어오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은 맞다. 부산의 적이 곧바로 전라도로 향하겠다고 선언하고 있으나 만약 우리 나라 백성의 의복으로 변장하고 경기(輕騎-경무장 기병)수천 명을 거느리고 곧바로 경성(京城)에 박두한다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그건 그렇지가 않습니다. 소신이 보는 바로는 이 적들은 용병(用兵)에 능합니다. 이 적들이 ‘완전한 행군을 할 것이다.’ 하며, 갈 곳이 있으면 반드시 기치를 세우고 비록 협로(峽路)라 하더라도 먼저 한 사람을 보내 살핀 연후에 올 것입니다. 신이 대동강(大同江)에 있을 때 보니 적 한 명이 먼저 오고 몇 사람이 또 와서 형세를 정탐한 뒤에야 들어왔습니다. 이 적들이 단지 수천 수백 명을 거느리고 온다는 것은 그럴 리가 만무합니다.”
하고, 김응남은 아뢰기를,
“유성룡의 말을 반드시 믿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경외(京外)에 수어(守禦-방어)할 만한 곳이 없는데 이런 걱정이 없을 것이라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유성룡은 아뢰기를,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수천 명을 거느리고 오는 것은 반드시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이 적들이 우리 나라에 쳐들어온 지 이미 6년이나 되었는데 그들의 군량과 군사의 수를 알 수가 없으니 저 적의 꾀는 진실로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근래 우리 나라의 일을 보면 장수는 많고 병졸은 적어서 호령이 여러 곳에서 나와 성사(成事)할 수 없습니다.”
하고는, 산해도(山海圖)를 탑전(搨前-임금 앞)에 바쳤다. 상이 이르기를,
“황해 감사의 말에, 우리 나라 해자(垓子)는 매우 좋지 못하고 중국의 성호(城壕)제도가 좋을 듯하다고 하였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중국의 해자는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것은 포루(砲樓)의 제도인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수원(水原)의 독성(禿城)은 사람들이 모두 들어가고자 합니다. 남한 산성 역시 좋다고 하는데 신이 가서 본 후에 정하겠습니다.”
하고, 윤두수는 아뢰기를,
“산성이 가장 좋습니다. 근방에 사는 백성들은 마땅히 들어가 지켜야 하지만 수삼일 정(程)되는 곳에 사는 백성도 역시 들어가 지켜야 한다고 하기 때문에 민심이 매우 요동된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심사(沈使)가 공주(公州)에 있다고 하는데 두 나라의 일이 끝난 후에 들어오라는 것으로 중국 조정에서 이미 성지(聖旨)를 받들었다면 적의 진영에 도로 들어갔는가? 어디에 있는가?”
하니, 김명원이 아뢰기를,
“이미 성지를 받들었으니 반드시 그곳에 있으면서 처리할 것입니다. 신이 어제 장언지(張彦池)가 등사한 병부(兵部)의 소첩(小帖)을 보았으므로 아룁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묻는 바는 병부에서 보낸 본초(本草)를 보고자 해서이다. 어제 본 것은 바로 조보(朝報)를 등사한 것 같았다.”
하니, 김명원이 아뢰기를,
“신이 어제 오종도(吳宗道)가 달려가 장언지가 있는 곳에 도착하여 두 사람이 마주 앉아 그 소첩을 등사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신이 보기를 청하여 써서 입계한 것입니다. 인신(印信)공문은 후에 당도한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심사가 만일 병부의 소첩(小帖)을 본다면 반드시 오지 않을 것이다.”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마땅히 그 이자(移咨)를 받들고 행장이 있는 곳으로 갈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마땅히 그럴 것이다. 수길(秀吉)이 만약 이번에도 듣지 않는다면 나중의 일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석 상서(石尙書)가 육문도(陸文韜)의 일을 온당치 않다고 하자 그 사람이 반드시 석 상서를 잡고자 하는데, 중국 조정에서도 역시 논의가 많다고 하니 때 맞추어 병사를 조발하지 못할까 염려된다.”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섭 유격(葉遊擊)이 들어간 것도 역시 그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만약 그렇다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이원익(李元翼)이 남하할 때에 하삼도(下三道)는 매우 탕패(蕩敗)하여 비록 중국군이 나오더라도 접대할 길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중국군이 나오면 비단 적을 토벌할 뿐만 아니라 인심을 진정시킬 수 있다. 지금 양호(兩湖)지방의 인심이 궤산(潰散-무너짐)되었다고 하니 매우 근심된다. 무뢰배들이 서로 모여 도적질을 하지 않는다고 어찌 보장하겠는가. 중국군이 만약 나온다면 거의 진정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전라(全羅) 한 도가 임진년 변란이 일어나던 처음부터 지금까지 내공(內供)을 조달하고 경비를 대느라 민력(民力)이 탕갈되어 이산함이 많을 것이라 하며, 충청도 역시 그렇다고 합니다. 이 두 도에 하서(글을 내림)하여 위유(慰諭-위로)하고 전라 감사로 하여금 인재를 뽑아 보내라고 해야 합니다. 최상중(崔尙重)을 수령으로 삼았으니, 정설(鄭渫)과 변이중(邊以中)도 역시 거두어 써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삼 명을 거두어 쓰는 것이야 어찌 중요하겠는가. 공부(貢賦)와 요역(徭役)을 일분이라도 감해준다면 괜찮을 것이다. 양호의 일이 매우 염려된다. 역당(逆黨)과 외얼(外孼)들 가운데 어찌 무뢰배들이 없겠는가.”
하였다. 김응남이 아뢰기를,
“신이 근심하는 것은 포루(砲樓)나 수전(水戰)·화전(火箭)에 있지 않고 인심을 진정시킬 수 없는 데 있습니다. 상께서 아래 백성들을 무휼(撫恤-어루만짐)하기를 잊지 마시고 양남 사람들도 마땅히 거두어 써야 합니다.”
하니, 이정형이 아뢰기를,
“호남 사람을 거두어 쓸 것을 일찍이 전교하셨습니다. 사람을 쓰는 것은 판서에게 달렸는데 신들은 문견이 넓지 못하고 빈자리도 적어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제 직접 들었으니 마땅히 거두어 써야 한다. 그리고 군공이 있는 사람, 납속한 사람도 써야 한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전라도의 인심이 궤산하면 호령하기가 어렵다는 뜻을 우상(右相-우의정)이 전에 말했는데 대신들도 들었는가?”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이원익이 그런 말을 했었습니다. 또 3∼4개의 큰 진(陣)을 만들면 적을 토벌하지 못하더라도 적이 오는 길을 차단할 수는 있다고 하였습니다.”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23책 152면
2. 선조실록 84권,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1월 27일(무오)
○ 상이 대신 및 비변사 유사 당상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선이 비록 2백 척이라 하나 매우 많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16진(陣)이 거의 다 나온 것입니다. 행장의 군사는 두치(豆恥-경상도 하동지역)의 길로 가서 정탐하여 전라도를 엿보려는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라도 등은 전혀 방비를 하고 있지 않다. 한 사람도 수군(水軍)으로 들어오지 않는다고 한다.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그곳은 호령이 행하여지지 않기 때문에 군사들이 즉시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동안 간사한 아전들이 용사(用事)하여 제장(諸將)의 호령이 하나도 시행되지 않았고, 혹시 한 가지 명령이 내려도 수개월이 걸려 오는 자도 있고, 오지 않는 자도 있으니 매우 부당합니다.”
하였다. 판중추부사 윤두수가 아뢰기를,
“이번에 도원수가 길에서 왜적 두세 명을 만났다 하는데, 혹시 적이 흉역(兇逆)을 부렸다면 얼마나 나라가 욕되게 되었을지 아득합니다. 마땅히 체찰사에게 하서하여 간이(簡易-쉽게)하게 출입하지 못하게 하고, 또 그런 영적(零賊)을 소탕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순신(李舜臣)은 조정의 명령을 듣지 않고 전쟁에 나가는 것을 싫어해서 한산도에 물러나 지키고 있어 이번 대계(大計)를 시행하지 못하였으니, 대소 인신(人臣)이 누군들 통분해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지중추부사 정탁(鄭琢)은 아뢰기를,
“이순신은 참으로 죄가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순신은 어떠한 사람인지 모르겠다. 계미년 이래 사람들이 모두 거짓되다고 하였다. 이번에 비변사가 ‘제장과 수령들이 호령을 듣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비변사가 그들을 옹호해주기 때문이다. 중국 장수들이 못하는 짓이 없이 조정을 속이고 있는데, 이런 습성을 우리 나라 사람들도 모두 답습하고 있다. 이순신이 부산 왜영(倭營)을 불태웠다고 조정에 속여 보고하였는데, 영상(領相)이 이 자리에 있지만 반드시 그랬을 이치가 없다. 지금 비록 그의 손으로 청정의 목을 베어 오더라도 결코 그 죄는 용서해 줄 수 없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이순신은 한동네 사람이어서신이 어려서부터 아는데, 직무를 잘 수행할 자라 여겼습니다. 그는 평일에 대장(大將)이 되기를 희망하였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글을 잘 아는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성품이 강의(强毅)하여 남에게 굽힐 줄을 모르는데, 신이 수사(水使)로 천거하여 임진년에 공을 세워 정헌(正憲-정2품, 정헌대부)까지 이르렀으니, 매우 과람합니다. 무릇 장수는 뜻이 차고 기가 펴지면 반드시 교만하고 게을러집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순신은 용서할 수가 없다. 무장(武將)으로서 어찌 조정을 경멸하는 마음을 갖는가. 우상(右相)이 내려갈 때에 말하기를 ‘평일에는 원균(元均)을 장수로 삼아서는 안 되고 전시에는 써야 한다.’고 하였다.”
하니, 좌의정 김응남이 아뢰기를,
“수군으로서는 원균만한 사람이 없으니, 이제 버릴 수 없습니다.”
하고, 유성룡이 아뢰기를,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깊습니다. 상당 산성(上黨山城-충청도 청주에 있는 산성)을 쌓을 때, 원균은 토실(土室)을 만들어 놓고 몸소 성 쌓는 것을 감독하였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수군의 선봉을 삼고자 한다.”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지당하십니다.”
하였다. 영중추부사 이산해(李山海)가 아뢰기를,
“임진년 수전(水戰)할 때 원균과 이순신이 서서히 장계(狀啓)하기로 약속하였다 합니다. 그런데 이순신이 밤에 몰래 혼자서 장계를 올려 자기의 공으로 삼았기 때문에 원균이 원망을 품었습니다.”
하고, 윤두수가 아뢰기를,
“이순신을 전라 충청 통제사(全羅忠淸統制使)로 삼고, 원균을 경상 통제사(慶尙統制使)로 삼으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균이 만약 적의 소굴로 직접 침입하면 누가 당하겠는가. 소공(邵公)과 이현충(李顯忠)의 일이 참으로 이와 같다.”
하였다. 김응남이 아뢰기를,
“모름지기 어사(御史)를 보내 그로 하여금 규찰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문신(文臣)으로 특별히 어사를 정해 그간의 사정을 살피게 해야 한다.”
하였다. 윤두수와 김응남이 함께 아뢰기를,
“이순신은 조용한 사람인 듯한데, 다만 속임수가 많고 전진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병조 판서 이덕형(李德馨)에게 이르기를,
“원균의 일을 급히 조처하라.”
하니, 아뢰기를,
“원균을 처음 수전(水戰)에 내보낼 때 의논이 일치되지 않아 이에 이르렀습니다. 근래 변방 장수의 일을 보건대, 이운룡(李雲龍)은 도적 한두 명을 보면 나아가서 싸우지 않고 단지 문보(文報)만 하였습니다 이런 사람이 평시 같았으면 어찌 그의 몸에 견벌(遣罰-벌을 받음)이 미치지 않았겠습니까. 원균을 좌도(左道-경상좌도, 부산부근)로 보내는 것이 무방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좌도로는 보낼 수 없다.”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서성(徐渻)이 술을 차려 잔치를 베풀고서 두 사람이 화해(和解)하도록 했는데, 원균이 이순신에게 말하기를 ‘너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다.’【다섯 아들이란 권준(權俊), 배흥립(裵興立), 김득광(金得光) 등을 말한다. 】하였으니, 그의 분해 하고 불평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이덕형이 아뢰기를,
“군사 일은 반드시 조리(條理)가 있어 마치 그물에 강(綱)이 있는 것과 같은 연후에야 두서(頭緖)를 알 수 있는 것인데, 전라도의 일은 매우 문란합니다. 신이 군사의 액수(額數-수)를 알고자 하여 무학(武學)이라 이름하여 팔도로 하여금 병조에 올리게 하였더니, 황해도 등은 이미 올려보냈는데 전라도는 잠잠하게 아무 소식이 없으니, 매우 허술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본에 사신 보내는 일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만약 사신을 보내지 않으면 후회하는 일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사세가 이미 급하게 되었으니, 보내도 도움이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세로 보아 하기 어려운 것인가, 의리로 보아 말하는 것인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사세가 이미 급하게 되었는데, 어찌 의리를 생각하겠습니까.”
하자,【이는 망발이다. 대신이 ‘어찌 의리를 생각하겠습니까.’라는 말을 입에서 내어 임금에게 들려줄 수 있단 말인가. 】 상이 이르기를,
“의리는 아무리 위급한 때라 해도 어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난번 황신(黃愼)이 갈 때에는 무슨 의리가 있었기에, 오늘날 성지(聖旨)를 받들어 사신을 보내느 것만 유독 의리가 아니란 말인가.”
하였다. 이산해가 아뢰기를,
“신이 병으로 사실(私室)에 누워 있는데, 미아(迷兒)가 급히 와서 말하기를 ‘일변(日變-해의 변화)이 비상하다.’ 하였습니다. 변이 매우 참혹합니다. 양변에 극(戟)이 있었는데 그 극은 천문지(天文志)에 미세한 것이라고 하였지만 이것은 쏘는 빛이 매우 크니 극이 아닙니다. 또 붉은 기운 또한 흉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러한 때에, 어찌 천변(天變-하늘의 변화)이 있어야만 경계하겠는가. 계사년 정월 초하루에 흰무지개가 해를 꿰었는데 누군들 크게 두려워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때 평양에서 크게 이겼으니, 이번에는 청정의 목을 벨 징조가 아니겠는가.”
하자, 이덕형이 아뢰기를,
“계사년에 신과 제독(提督)이 군중에서 나와 흰무지개를 바라보고 모두 기뻐하였습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영인본】 23책 154면
3. 선조 84권,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1월 27일(무오)
○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비변사 대신 및 유사 당상인 영돈녕부사 이산해(李山海), 의정부 영의정 유성룡(柳成龍), 판중추부사 윤두수(尹斗壽), 의정부 좌의정 김응남(金應南), 지중추부사 정탁(鄭琢), 경림군(慶林君) 김명원(金命元), 호조 판서 김수(金晬), 병조 판서 이덕형(李德馨), 병조 참판 유영경(柳永慶), 이조 참판 이정형(李廷馨), 상호군 노직(盧稷)을 인견하였다. 좌승지 이덕열(李德悅), 주서 조즙(趙濈), 사변 가주서(事變假注書) 이순민(李舜民), 검열 심액(深詻)·이유홍(李惟弘)이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심 사신(沈使臣)이 이곳에 그대로 머물겠는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1순(旬-10일) 동안 머물겠다고 하였는데 확실하게 알 수 없습니다.”
하고, 김명원이 아뢰기를,
“떠날 날짜를 아직까지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제 신에게 이르기를, ‘수레 30량(輛), 사인(舍人)·가정(家丁) 80여 명을 마땅히 먼저 보낼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김수가 아뢰기를,
“접반사가 묻기를 ‘반드시 10일 전에는 미리 떠날 기일을 알아야만 인부와 말을 조치할 수 있다. 대인(大人)은 서쪽으로 갈 것인가. 남쪽으로 갈 것인가?’ 하니, 그가 답하기를 ‘내가 10여 일 머물면서 부산(釜山)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남쪽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김명원이 아뢰기를,
“오늘 도감(都監)이 접대할 때에 당상(堂上)이 마땅히 다시 물어보아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가 비록 남쪽으로 간다지만 별로 하는 바가 없을 것이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대개 저 적들이 연속해서 나오니 근일 남쪽은 한 곳도 믿을만한 곳이 없는데, 체찰사와 원수는 논의가 일치되지 않아 장관(將官)들과 수령(守令)들이 어느 쪽을 따라야 할지 모르고 있으니, 이것이 매우 걱정입니다. 군사를 조발하고 군량을 운반하여 믿을 만한 곳을 수어(守禦)하면서 한편으로는 농사를 지어야만 조치할 수가 있으나, 적이 만약 급히 나오면 나라가 위급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번에 고언백(高言伯)의 군사가 비록 남쪽으로 내려갔으나, 각 고을이 판탕(재정부족)되어 궤향(餽餉-먹여살림)을 하기가 아주 어려우니, 군사들이 피곤하면 어떻게 해볼 수 없습니다. 오늘의 위급함은 끝내 어찌될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의 숫자가 많지 않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전일 이곳에 머물던 16진(陣)이 반드시 다 나올 것입니다. 이 적들이 진주(晉州)의 경계를 출입하면서 전라도를 침범할 것같이 하니, 아군이 혹 서로 싸우게 된다면 반드시 그것으로써 흔단을 삼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라도는 방어할 생각이 없는 듯, 수사(水使-수군절도사)는 수군이 오지 않는다고 핑계하고 있으니, 이는 무슨 말인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임시로 군대를 모집하여 수가 차지 않으면 길 가는 사람까지도 모두 붙잡아 새끼로 묶어 보냅니다. 또 체찰사의 호령은 그런대로 따르지만, 감사(監司) 이하의 호령은 사람들이 따르지 않습니다. 군기(軍機)는 일각이 위급한데 더군다나 이처럼 완만해서야 되겠습니까. 양남(兩南)의 일은 그렇지만, 충청도는 조금은 두서(頭緖)가 있으니 괜찮을 듯합니다. 병사(兵使) 이시언(李時言)이 삼년성(三年城)을 지키고자 하여 이미 그곳에다 군사를 모으고 군량을 옮겼다고 합니다. 삼년성의 길은 황간(黃澗)·영동(永同)과 접해 있어 적의 길을 차단할 수가 있습니다. 전라도 남원(南原)은 요충지이니 만약 이복남(李福男)이 그대로 그곳을 지키면 반드시 방어할 일이 있을 것인데, 지금은 최염(崔濂)이 가서 지키고 있습니다. 전주(全州)역시 요충지인데, 이 두 고장이 궤멸되면 다시는 해볼 수 없습니다. 지금 백성들이 어떻게 해야할지를 모르고 있는데, 만약 산성(山城)을 지키려고 하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 점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각 고을에다 산성을 만들어 농사를 지으면서 지키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목천(木川)의 백성들이 산성을 쌓기를 원하고 충주(忠州) 역시 그렇습니다. 수백 리 지경에 산성 하나로는 어려운 형세입니다.”
하고, 윤두수가 아뢰기를,
“전일에 권율이 소신에게 편지를 보내왔는데 보니, 행장(行長)이 바야흐로 강화(講和-정전회담)를 말하는데 고성(固城)·곤양(昆陽) 근처에 적도들이 쳐들어왔으므로 이것을 행장에게 말했더니, 행장은 ‘그 적은 나의 무리가 아니다. 조선에서 비록 그들을 죽이더라도 내가 가서 구할 리가 없다.’고 했다 했습니다. 신이 선거이(宣居怡)·이순신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영등포(永登浦)에 진을 치고 있는 적과 싸우도록 했더니 장문포(長門浦)에 진을 치고 있던 적들이 와서 구원하고, 장문포에 진을 치고 있던 적과 싸우면 영등포에 진을 치고 있던 적들이 와서 구할 뿐 행장의 군사들은 관망(觀望)만 하고 있으면서 후원할 만한데도 끝내 와서 구하지 않았으니, 역시 오는 대로 격파해야 합니다. 원수(元帥)가 길에서 왜적 5∼6명을 만났다고 하는데, 적이 만약 원수가 고단(孤單)함을 알았다면 말할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체찰사 역시 간약(簡約)한 사람인데 행동을 경솔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지난번 비변사에서 이순신의 죄상(罪狀)을 이미 헌의(獻議-의견을 말함)했으므로, 이순신의 죄상은 상께서도 이미 통촉하시지만 이번 일은 온 나라의 인심이 모두 분노해 하고 있으니, 행장(行長)이 지휘(指揮)하더라도 역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위급할 때에 장수를 바꾸는 것이 비록 어려운 일이지만 이순신을 체직시켜야 할 듯합니다.”
하고, 정탁이 아뢰기를,
“참으로 죄가 있습니다만 위급할 때에 장수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는 이순신의 사람됨을 자세히 모르지만 성품이 지혜가 적은 듯하다. 임진년 이후에 한번도 거사를 하지 않았고, 이번 일도 하늘이 준 기회를 취하지 않았으니 법을 범한 사람을 어찌 매번 용서할 것인가. 원균(元均)으로 대신해야 하겠다. 중국 장수 이 제독(李提督)이하가 모두 조정을 기만하지 않는 자가 없더니, 우리 나라 사람들도 그걸 본받는 자가 많다. 왜영을 불태운 일도 김난서(金鸞瑞)와 안위(安衛)가 몰래 약속하여 했다고 하는데, 이순신은 자기가 계책을 세워 한 것처럼 하니 나는 매우 온당치 않게 여긴다. 그런 사람은 비록 청정(淸正)의 목을 베어 오더라도 용서할 수가 없다.”
하였다. 이산해가 아뢰기를,
“임진년에 원균의 공로가 많았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공이 없었다고 할 수 없다. 앞장서서 나아가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사졸(士卒)들이 보고 본받기 때문이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신의 집이 이순신과 같은 동네에 있기 때문에 신이 이순신의 사람됨을 깊이 알고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성(京城)사람인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성종(成宗) 때 사람 이거(李琚)의 자손인데, 직사(職事)를 감당할 만하다고 여겨 당초에 신이 조산 만호(造山萬戶)로 천거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글을 잘하는 사람인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성품이 굽히기를 좋아하지 않아 제법 취할 만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어느 곳 수령으로 있을 때 신이 수사(水使)로 천거했습니다. 임진년에 신이 차령(車嶺)에 있을 때 이순신이 정헌(正憲)이 되고, 원균이 가선(嘉善-종2품, 가선대부)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작상(爵賞-상을 내림)이 지나치다고 여겼습니다. 무장(武將)은 지기(志氣)가 교만해지면 쓸 수가 없게 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때에 원균이 그의 동생 원전(元㙉)을 보내 승전을 알렸기 때문에 그런 상이 있었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거제(巨濟)에 들어가 지켰다면 영등(永登)·김해(金海)의 적이 반드시 두려워하였을 것인데 오랫동안 한산(閑山)에 머물면서 별로 하는 일이 없었고 이번 바닷길도 역시 요격(邀擊)하지 않았으니, 어찌 죄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다만 체대(遞代-관직을 바꿈)하는 사이에 사세가 어려울 것 같기 때문에 전일에 그렇게 계달하였던 것입니다. 비변사로서 어찌 이순신 하나를 비호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순신은 조금도 용서할 수가 없다. 무신(武臣)이 조정을 가볍게 여기는 습성은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이순신이 조산 만호로 있을 때 김경눌(金景訥) 역시 녹둔도(鹿屯島)에 둔전(屯田)하는 일로 마침 그곳에 있었는데, 이순신과 김경눌은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었다. 이순신이 밤중에 호인(胡人) 하나를 잡아 김경눌을 속이니, 김경눌은 바지만 입고 도망하기까지 하였다. 김경눌은 허술한 사람이어서 그처럼 위태로운 곳에서 계엄을 하지 않았고, 이순신은 같은 변방의 장수로서 서로 희롱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내가 그런 일을 일찍이 들었다. 김경눌은 매양 공(功)을 세우는 데 뜻을 둔 사람인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평일에 자부하던 기개를 어찌 난시(亂時)에 시험하지 않고 있는가.”
하자, 김수가 아뢰기를,
“신이 임진년에 거느리고 오다가 용인(龍仁)에서 철환을 맞았는데 지금은 순찰사 둔전관(巡察使屯田官)이 되었다고 합니다. 대체로 허탄한 사람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사람이 평소에 스스로 ‘글은 이름이나 쓸 정도이고 칼솜씨는 사람을 대적할 만하니, 오백의사(五百義士)같은 사람이다.’고 하였다.”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평소에도 활을 잘 쏘지 못하였는데 지금은 팔에 병이 났습니다.”
하였다. 이정형이 아뢰기를,
“이순신이 ‘거제도에 들어가 지키면 좋은 줄은 알지만, 한산도는 선박을 감출 수 있는데다가 적들이 천심(淺深-얕고 깊음)을 알 수 없고, 거제도는 그 만이 비록 넓기는 하나 선박을 감출 곳이 없을 뿐더러 또 건너편 안골(安骨-안골포, 경상도 진해 앞바다 이름)의 적과 상대하고 있어 들어가 지키기에는 어렵다.’고 하였으니, 그 말이 합당한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들어가 지키는 것이 어렵다고 했는데, 경의 생각은 어떤가?”
하자, 이정형이 아뢰기를,
“신 역시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의 말이 그렇습니다. 원균은 사변이 일어난 처음에 강개(慷慨-의기에 복받침)하여 공을 세웠는데, 다만 군졸을 돌보지 않아 민심을 잃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성품이 그처럼 포악한가?”
하니, 이정형이 아뢰기를,
“경상도가 판탕된 것은 모두 원균에게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상(右相)이 내려갈 때 원균은 적과 싸울 때에나 쓸 만한 사람이라 하였으니, 여기에서 짐작할 수 있다.”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인심을 잃었다는 말은 우선 치지 도외하고 주사(舟師)로 써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억기(李億祺)는 내가 일찍이 본 적이 있는데, 쓸 만한 사람이다.”
하니, 이정형이 아뢰기를,
“원균만 못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원균은 자기 소견대로만 하고 고칠 줄을 모른다. 체찰사가 비록 논리적으로 개유(開諭-깨우침)해도 고치지 않는다고 한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대개 나라를 위하는 데는 성심이 있습니다. 상당 산성(上黨山城)을 쌓을 때 움막을 만들고 자면서 역사를 감독해 수축하였습니다.”
하고, 이산해가 아뢰기를,
“상당 산성을 수축할 때에 위력으로 역사를 감독했기 때문에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하고, 이 정형이 아뢰기를,
“상당 산성의 역사는 비록 이루어졌지만 도로 비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체찰사가 이순신과 원균에게 분부하는 일이 있으면, 비록 온당하지 못하더라도 이순신은 그런대로 면종(面從-마주하여 봄)을 하지만 원균은 노기를 내어 청종(聽從-따라 들음)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그의 공(功)을 빼앗겨서인가? 원균을 좌도 주사(左道舟師-경상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하고, 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2인을 진압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이정형이 아뢰기를,
“이순신과 원균은 서로 용납하지 못할 형세입니다.”
하고, 김수가 아뢰기를,
“원균은 매양 이순신이 공을 빼앗았다고 신에게 말하였습니다.”
하고, 이덕열이 아뢰기를,
“이순신이 원균의 공을 빼앗아 권준(權俊)의 공으로 삼으면서 원균과 상의하지도 않고 먼저 장계한 것입니다. 그때에 왜선 안에서 여인(女人)을 얻어 사실을 탐지하고는 곧장 장계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때 왜장(倭將)이 3층 누선(樓船)에 앉아서 관(冠)을 쓰고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그 배가 매우 허술하였기 때문에 우리 배와 만나 즉시 부서졌다 한다. 왜선이 지금도 그곳에 있다 하니, 전선(全船)을 포착(捕捉)했다는 말이 반드시 허언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하고, 또 상이 이르기를,
“전라도는 중국 사신을 지대(支待-접대)하느라 주사(舟師)와 격군(格軍-노 젓는 군인)이 아직 정돈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일은 모두 이순신만을 책할 수는 없다.”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불태우는 일을 이순신이 처음에 안위(安衛-조선장수 이름)와 밀약하였는데, 다른 사람이 먼저 불사르니 이순신이 도리어 자기의 공로로 삼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은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하고, 이정형이 아뢰기를,
“변방의 일은 멀리서 헤아릴 수가 없으니, 서서히 처리해야 합니다.”
하고, 김수가 아뢰기를,
“이것이 사실이라면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유성룡이 아뢰기를,
“그 사람의 죄가 그렇기는 하나 지금부터 책려(策勵-독려)해야 합니다.”
하고, 윤두수가 아뢰기를,
“이순신과 원균을 모두 통제사(統制使)로 삼아, 서로 세력을 협조토록 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비록 두 사람을 나누어 통제사로 삼더라도 반드시 조절하여 절제(節制)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원균이 앞장서서 싸움에 나가는데 이순신이 물러나 구하지 않는다면 사세가 어려울 것이다.”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그렇게 한다면 이순신을 중죄에 처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날 이현충(李顯忠)의 일도 있었으니 반드시 문관(文官)으로 하여금 두 사람을 조절하게 하여 기탄하는 바가 있게 해야 한다. 그가 이미 통제사가 되었으니, 수군을 모아야 하는데 어째서 정돈하지 않고 있는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겨울이면 격군(格軍)을 풀어준다고 합니다.”
하고, 김수가 아뢰기를,
“으레 10월이면 격군을 풀어주는 것이 이미 규례가 되었기 때문에 아직까지 정돈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고, 윤두수가 아뢰기를,
“신이 남원(南原)에 있을 때, 이순신이 군관을 남원에 보내 군사를 모집하다가 그곳 병방(兵房)을 참(斬)하기까지 하여 백성들이 잇따라 소란하고 곡성(哭聲)이 하늘에까지 사무쳤습니다. 군관을 불러서 물어보았더니, 그들의 멀고 가까운 친척까지 붙잡아 갔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로 보건대 군사를 모을 즈음에 상서롭지 못한 일이 많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날에는 군사를 뽑을 때 어떻게 하였는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전에는 공사천(公私賤)과 잡류군(雜類軍)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에도 어찌 업무(業武)하는 사람이나 제색군(諸色軍)이 없겠는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충청도는 병사를 모집하여 속오군(束伍軍-노비로 구성된 지방군)으로 삼은 자가 5백여 명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시발(李時發)이 거느렸는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선봉군(選鋒軍) 8백여 명 역시 조련하고 있는데, 이는 모두 쓸 만하고 그 외에는 쓸 만한 군사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밖에 어찌 제색 군사(諸色軍士)가 없겠는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선봉군(選鋒軍) 8백 명 외에 출신(出身-무과 합격자)·업무(業武)한 사람들을 점차 뽑아야 하는데 원수(元帥)가 충청도에 전령(傳令-명령을 보냄)하여 1만 명을 먼저 뽑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감사(監司)는 부득이 전결(田結-토지 단위로)로써 괄군(括軍-군사모집)하니, 사람들이 산골짜기로 도망하여 서로 모여 도둑이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8결(結)로 괄군하면 호미를 든 무리들일테니 소란만 할 뿐이다.”
하니, 김응남이 아뢰기를,
“절제(節制)도 아니고 속오(束伍)도 아니므로 의거할 곳이 없기 때문에 부득이 8결로 괄군하는 것입니다.”하고, 유성룡이 아뢰기를,
“경기의 군사는 이미 속오를 마쳐 품관(品官-관직)으로 파총(把總-정4품 무관직)을 삼았으니, 만약 조발(調發-징발)함이 있으면 8결로 괄군하는 경우처럼 흩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수령은 으레 서반(西班-무관직)의 직함을 겸하니, 이는 군사를 거느리는 직임이므로 수령도 적과 싸우지 않을 수 없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는 한갓 문교(文敎)만을 숭상하여 각 고을에 훈도(訓導-고을 교관)를 두고 있는데, 군사 훈련도 훈도를 설치해야 합니다.”
하고, 김수가 아뢰기를,
“경기를 보건대 파총의 권한이 수령보다 큽니다.”
하고, 유성룡이 아뢰기를,
“군사 양성을 위해서는 먼저 군량을 비축하기를 《진서(陣書)》에 인용된 《관자(管子)》에 있는 단속(團束)의 말처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결코 군사 양성에 능하지 못합니다. 한 사람은 조발을 주관하고, 수령은 백성만 다스리면 어떻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군사 훈련도 훈도의 제도처럼 하면 옳을 듯하다. 그러나 수령은 적과 싸우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경기의 군사를 징발하면 며칠 안에 모두 모집할 수 있지만, 충청도의 군사를 징발하면 반드시 때에 맞춰 조발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속오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수령이 고을을 비우고 전쟁에 나아가면 사나운 도적들이 생기게 될 것이니, 이것이 염려입니다. 그리고 변방의 소식을 전하는 일도 반드시 지체될 것입니다.”
하고, 김수가 아뢰기를,
“경기의 일을 자세히 살펴보면, 수령들이 파총(把總)에게 군사를 빌기 때문에 감사(監司)가 중국 사신이 올 때에 인부를 조발하는 것을 어렵게 여겨 부득이 수령으로 파총을 겸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수령들이 군량 운반하는 일을 모두 파총에게 미루고 있는가?”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군량 운반하는 일은 수령이 맡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원균에게 수군을 나누어 통제하게 하는 일을 판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그 사람이 하고자 하면 신의 생각에는 마땅하다고 여기나, 서로 제지하고 방해하는 걱정이 있을까 싶으니, 중국 제도의 참장(參將)이 전쟁을 하면 독전(督戰)하는 사람이 있는 것과 같게 해야 합니다.”
하고, 윤두수가 아뢰기를,
“종사관(從事官)으로 독전하게 하면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반드시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전적으로 조절하게 하여 보내야 한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한효순(韓孝順)에게 독전(督戰)하게 하면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독전하는 사람이 한 곳에 있으면 그는 반드시 꺼리는 바가 있을 것이다. 또 병사(兵使)는 누구를 대신시킬 것인가?”
하니, 김수가 아뢰기를,
“그곳 인심은 나주 목사(羅州牧使)를 병사로 삼아야 한다고 합니다.”
하고, 유성룡이 아뢰기를,
“하서(下書)하여 위유(慰諭)하고, 두 사람을 책려해야 합니다.”
하고, 이덕형이 아뢰기를,
“박진(朴晉)의 말로는, 이순신의 군관(軍官)이 원균이 있는 곳에서 돌아왔는데, 군중에서 사설(邪說)로 고동(鼓動)하여 주장(主將)을 배척했다 하여 군관을 내쫓았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사이가 점점 이렇게 되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 사람은 도량(度量)이 좁다.”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체찰사가 종사관까지 보내 품하였는데, 이곳에는 다만 하서만 했을 뿐 별달리 조치한 일이 없습니다. 이후에도 이와같이 하면 말할 수 없게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는 작은 일이 아니다. 지난 겨울에 원수(元帥)의 장계를 보니 ‘감사(監司) 이용순(李用淳)은 뜻을 펴지 못하고 있다….’하였기에 내가 매양 괴이하게 여겼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대개 체찰(體察)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사람들의 호령이 서로 견제되는 것이 염려할 만하다.”
하니, 이산해가 아뢰기를,
“호령이 서로 견제되면 반드시 패하는 법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종사관에게 이르기를 ‘원수(元帥)와 체찰사 사이는, 전쟁에 임해서는 품승(稟承)할 겨를이 없으나 보통 때에는 모든 일을 상의하고 의논하여야 한다. 어찌 체찰사가 백성들만 살필 수 있겠는가.’ 하였었다.”
하니, 이덕형이 아뢰기를,
“체찰사가 한번 호령을 내렸는데, 또 도원수(都元帥)가 호령을 내리니 호령이 여기저기서 나오면 사세가 매우 어렵습니다. 중국처럼 한 사람은 군량을 주관하고, 한사람은 군사를 주관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명호(名號)는 다르나 한 아문(衙門)이니, 이 제독(李提督)은 군사를 주관하고 송응창(宋應昌)은 군량을주관한 일과는 같지 않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두 사람의 의논이 서로 달라서, 원수의 뜻은 4∼5만의 군사를 조발하고자 하고, 체찰사의 뜻은 산성(山城)을 수축하고 청야(淸野-들을 불태움, 적이 들의 곡식을 가지고 가지 못하게 함)하면서 기다리고자 하니, 두 사람의 뜻이 서로 어긋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이하 장관(將官)들이 누구를 따라야 할지 모릅니다. 만약 한 아문을 만들면 원수는 마땅히 부원수(副元師)가 될 뿐이며, 도원수(都元師)로 칭호하면 도원수는 싸움만을 주장할 따름입니다. 밖에서 헤아리건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이덕형이 아뢰기를,
“큰 진(陣)을 만들어 적이 오는 길을 차단하는데는 본도(本道)에 있는 병마로 하고, 부족하면 전라도의 무사(武士)와 충청도의 선봉(選鋒)이 넉넉한데, 왜 전결(田結)로 군사를 뽑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할 수 있는 일은 빨리 해야 한다. 원균은 오늘 정사(政事)에서 해야 하는가?”
하니, 이정형이 아뢰기를,
“원균을 통제사로 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싶으니, 경솔히 하지 말고 자세히 살펴서 해야 합니다.”하고, 이산해가 아뢰기를,
“요시라(要時羅)와 행장은 후대(厚待-후하게 대접)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 뒤에도 기대하는 바가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병부(兵部)에서 성지(聖旨)를 받들어 이자(移咨)했는데, 경들의 생각에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는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일본이 부산의 군사를 철수하면 조선이 사신(使臣)을 보낸다…….’ 하였는데, 심유경(沈惟敬)에게 말하기를 ‘만약 부산의 군사를 철수시키면 우리 나라에서도 사신을 보내겠다.’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 뜻은 이미 유시하였으니, 빨리 의논하여 정하라. 한갓 의논만 할 일이 아니다. 의논으로 말할 것 같으면 반드시 평수길(平秀吉)을 사로잡아야 할 것이다. 물러가 속히 의논해 정하라. 또 손 경략(孫經略)에게는 낱낱이 치보(馳報-빨리 알림)할 필요는 없고, 장계(狀啓)가 오면 바로 호응원(胡應元)에게 보이라.”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저들이 만약 사신(使臣)을 받아들이지 않고 대병(大兵)으로 바로 쳐들어오면 어떻게 합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황제의 명령이 이미 내렸으니, 사신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이미 황신(黃愼)을 보냈으니, 어찌 보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태백산사고본】【영인본】 23책 157면
4. 선조 84권,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1월 28일(기미)
○ 비망기로 유영순(柳永詢)에게 전교하였다.
“우리 나라가 믿는 바는 오직 수군뿐인데,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은 나라의 중한 임무를 맡고서 마음대로 기망(欺罔)하여 적을 토벌하지 않아 청정으로 하여금 안연히 바다를 건너게 하였으니, 잡아다 국문하고 용서하지 말아야 하겠지만, 바야흐로 적과 진을 맞대고 있기 때문에 우선 공을 세워 효과를 거두게 해야 한다. 나는 평소 경의 충용을 알고 있어 이제 경을 경상우도 수군 절도사 겸 경상도 통제사로 삼노니, 경은 더욱 책려하여 나라를 위해 힘을 다하라. 우선 이순신과 합심하여 전의 유감을 깨끗이 씻고 해적을 다 섬멸해 나라를 구해 이름을 역사에 남기고, 훈공이 종정(鍾鼎)에 새겨지게 하라. 경은 공경히 하라. 이를 원균에게 하유하라.
【태백산사고본】【영인본】 23책 157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