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주차 강의내용
어떻게 역사를 쓸 것인가.

처음에 강의한 내용은 교양이란 무엇인가 였습니다. 교양이란 전공을 위한 소양을 쌓는 작업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교양수업은 전공을 더 잘 이해하고 위한 내용으로 채워져야 하지만, 실제 그렇게 하는 교양은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교양은 이제 왜 배워야 할까요. 시각을 좁혀 인문학으로 너머가 봅시다. 자연과학의 연구대상이 자연(물자체)라고 한다면 인문학의 연구 대상은 인간(사람)이 됩니다. 인간이 남긴 흔적들, 예를 들어 글이 되면 문학일테고, 생각이면 철학일테고, 언어이면 언어학, 사회현상이면 사회학, 경제활동이면 경제학이 되듯이, 인간의 과거흔적은 역사학이 됩니다. 모두 인간이 남긴 자취들이죠. 그래서 인문학이라고 봅니다.

인문학은 왜 배울가요. 물론 인간이 인간답기 위한 최소한의 기본적인 지식을 습득하는데에도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야 소위 말하는 인간대접을 받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머무르게 된다면 서점 인문학 코너에 있는 "교양"이라고 쓰여진 책 하나 사서 읽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비싼 등록금을 내면서 교양으로 인문학을 배울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책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그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대학에서 교양으로써의 인문학을 공부하게 되는 이유일 것입니다.

교양으로써 역사강의가 가지는 의미는 어디에 있을까요. 물론 고등학교 때까지는 암기과목의 전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목적은 수능시험에서의 좋은 점수, 대표적인 사회탐구영역의 과목이죠. 방법은 암기 말고는 없습니다. 역사과목으로 토론수업을 한다는 것은 현행 교과과정에서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강의에서 말씀드렸듯이 대학에서의 역사는 고등학교 때와는 목적과 방법이 전혀 다릅니다. 우선 목적으로 시험이 없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은 "공무원 국사"라는 무지막지하게 두꺼운 책을 열심히 암기해야 하지만, 그것은 대학안에서의 과정으로 이해할 수는 없는 문제입니다. 공무원 준비 안하는 학생이 더 많을테니까요. (그건 개인적으로 알아서 공부하시고....) 그리고 방법으로는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암기를 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굳이 말하자면 고등학교와 대학교 사이에서의 역사과목의 결정적인 차이는 여기에 있습니다.

역사적인 문제로 넘어가보죠. 우리가 역사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점들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물론 재미없어 하시겠지만, 철학적인 질문을 역사에 던져 보죠. 역사란 무엇일까요. 역사학이라는 학문이 만들어졌을때 가장 먼저 던져진 질문입니다. 이에 대한 몇가지의 답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역사 E.H. Carr의 "역사는 현재와 과거와의 대화"라는 명제입니다. 현재는 지금의 내가 되고, 과거는 말그대로 현재 이전에 있었던 사실, 그리고 대화는 역사를 쓰는 방식, 혹은 과거를 생각하는 그 자체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대답에서 가장 초점이 주어지는 것은 과거나 대화가 하는 현재가 됩니다. 과거는 있었던 일이므로 변하지 않습니다. 대화는 생각하는 그 자체이므로 개인의 능력에 따라 달라집니다. 문제의 소지는 현재에 있습니다. 앞의 강의에서 말했듯이, 현재 내가 놓여 있는 정치적 환경에 따라 대화를 하는 방식이 달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역사에 대한 철학적인 문제는 더 이상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요구받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역사를 현재와 과거와의 대화라고 하여도 결국 현재 내가 어느 위치에 있는가에 따라 역사의 의미는 달라지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현재가 문제 됩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질문 자체를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즉 역사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로 옮아 가기 됩니다. 우리는 누구를 위한 역사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가장 대표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입니다. 머리말을 보면 수없이 등장하는 말이 있는데 바로 "민족"이라는 말입니다. 즉 고등학교 국사교과서는 민족을 위한 역사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민족이라는 것은 국가에서 만든 교과서에서 국가를 대표하는 표상으로 등장하는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국가가 만든 교과서 안에서는 잘 통용이 될 수 있고 아무도 이 문제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국사교과서가 아닌 교양으로써 역사를 배우고 있습니다. 교과서가 없죠. 그리고 더 이상 국가에서 요구하는 내용으로 역사를 공부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자연스럽게 민족이라는 말도 거의 쓰지 않게 됩니다.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라는 입장에서 보았을 때 고등학교 때에는 누구를 민족이라고 상정했지만, 대학교에서는 민족을 가리키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대학교에서는 이제 누구를 누구로 상정해야 할까요. 본래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라는 말은 역사의 존재에 대한 이유를 묻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존재 이유를 고민하지 못하고 무조건 민족을 위한 역사를 강요(?) 받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배워왔지요. 고민하지 않고 순응적으로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대전제(민족)이 사라진 현재 대학의 교양 역사수업에서는 누구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지 고민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지만, 아직 우리는 그런 경험을 하지 못했습니다.

역사는 누가 가르쳐 주는 학문은 아닙니다. 우리가 늘 접하고 경험하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들이 실은 역사에 해당합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오늘 있었던 일도 내일이 되면 모두 역사가 됩니다. 그러므로 과거를 생각한다는 것 그 자체가 곧 역사를 쓴다는 말로 치환할 수 있습니다. 즉 역사는 우리 모두 개개인이 쓰는 것이고 역사를 만드는 주체는 곧 나 자신이 됩니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면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에서 누구는 바로 나 자신이 되며 대학교에서는 이제 나를 위한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역사를 공부하지도, 역사를 쓰는 방법도 모르는 내가 어떻게 나를 위한 역사를 할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배우면 됩니다. 아무도 안 가르쳐 줬으니 모르는 건 당연하죠. 그런데 생각보다 쉬운건 아닙니다.

역사를 어떻게 쓸 것인가. 이 주제가 이번주 강의 내용입니다. 역사에서는 자료를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역사와 문학의 차이는 과거에 대한 근거 유무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자료를 이해할 때 그 판단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느냐 아니면 주관적으로 보아야 하느냐의 문제가 있습니다. 역사를 쓸 때 가장 큰 고민은 바로 역사의 객관성과 주관성입니다. 역사의 객관성은 내가 말하고자 하는 사실에 대해서 논리적인 근거를 들어서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의 자료가 있으면 그 자료의 내용을 분석하여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뜻합니다. 역사의 주관성은 어느 하나의 자료를 통해서 그것을 가지고 유추를 통해 자료를 너머서는 사실을 찾아내는 과정을 말하는데, 그 과정에서는 역사가의 일정한 상상을 포함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자료에서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못하는 다른 사실들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거라고 생각은 드는데 자료로 설명이 잘 되지 못하는 것들을 말합니다.

사례를 들어 보겠습니다. 위안부 문제를 들면 한국에서는 위안부가 있었다고 주장하고, 일본에서는 위안부가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한국에서는 위안부 할머니 들의 증언을 통해서 그 사실의 증거로 삼고 있으며, 일본에서는 일본군에서 위안부를 설치했다는 증거문서가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거로 삼고 있습니다. 역사의 객관성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본다면 두 주장 모두 논리적인 설명이 됩니다. 특별히 문제될 것이 없죠. 그런데 왜 역사를 설명하는 방식은 다를까요. 그 논리에 대한 역사적 설명, 즉 역사의 주관성 부분에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과거를 다르게 보게 됩니다.

독도 문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한국은 독도가 한국의 영토라고 하고, 일본은 다케시마가 일본의 영토라고 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독도가 한국령이라고 표기된 지도를 통해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고, 일본은 다케시마가 일본령이라고 표기된 지도를 통해서 자신의 주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모두 둘다 사실이죠. 왜냐하면 명확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으니까요. 이 부분까지가 역사의 객관성입니다. 문제는 설명방식이죠. 각기 자기 영토의 역사성을 주장합니다. 이 부분이 역사의 주관성에 해당됩니다. 논리적인 부분은 같지만, 추상적인 부분은 제각각인 상태, 이게 바로 역사를 기술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자료에 대한 비판입니다. (역사용어로는 사료비판이라고 합니다.) 증거자료를 비판하면 좀더 정확한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정조의 역사는 정조실록과 같은 기록을 통해서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작년 발견된 정조의 편지를 통해서 우리가 알고 있던 정조의 모습이 다르게 비추어지고 있습니다. 서로 상반되는 설명이 가능한데, 어느 자료가 더 객관적이고 신빙성이 있을까요. 당연히 정조의 편지가 더 객관적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편지는 정조 자신이 직접 쓴 것이지만, 정조실록은 정조가 죽은 이후에 신하들이 지은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정조의 역사를 쓴다면 편지가 우선시되고, 정조실록은 부차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의 편지가 있다고 합시다. <박씨가....3냥만 빌려줘....이씨에게>라고 하는 편지가 있다고 생각합시다. 위 편지 내용에 따르면 박씨는 돈이 모자라 이씨에게 3냥을 빌리고자 합니다. 그렇죠? 근데 실제로 이씨는 박씨에게 3냥을 주었을까요? 그건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단지 이 편지가 현재 남아 있다는 사실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이 편지가 실제로 이씨에게 전달된 것인지 알 수 없으며, 이 편지가 이씨에게 전달되었다고 하여도 돈은 박씨에게 주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박씨에게 돈을 빌려주었다고 해도 3냥이 아닌 1냥만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박씨가 일부러 있지도 않을 사실을 편지로 남겼을 수 있습니다. 모든 역사적 사실이 가능한데, 그렇게 설명할 수 있는 이유는 더이상 이 편지는 그러한 사실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단지 편지만 남아 있을 따름입니다.

정조의 편지로 돌아가 보죠. 위의 내용에 따른다면, 정조의 편지로 정조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아마 편지만 가지고는 힘들 것입니다. 실제로 편지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었는지 알 수 없고, 정조가 지시한 여러가지 일들을 편지를 받은 사람이 실제 실행했는지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현재 역사가 봉착한 문제는 여기까지입니다.

그래서 철학자인 자크 데리다는 "텍스트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유명한 명제를 남겼습니다. 텍스트는 현재 우리가 보는 편지(역사자료)죠. 편지에 있는 글 외에는 우리는 더이상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없기 때문이죠. 역사학 안에서는 이를 포스트모더니즘 문제라고 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심도있게 논의하고 있는 중입니다. 현재 역사학의 방법론이 여기까지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과정중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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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