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 학살의 시대

사편(史片)/그외 2010. 1. 1. 21:49 Posted by 아현(我峴)
19세기 - 학살의 시대

1894년 조선에서 동학이 총공세를 펼쳤을 때 그 세력은 거의 16만7천 여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물론 정확한 숫자는 아니지만 1894년 11월 8일 동학군이 공주성을 포위하고자 인근 산을 점령했을 때 일본군이 기록한 것이라는 점으로 보아서는 수만명은 되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수만의 동학군과는 달리 이를 진압하기 위해 공주에 온 병력은 일본군 9개 중대의 1900 여명과 이두황(1858~1916)이 이끄는 조선 관군 2500 여명이었다고 합니다. 동학군이 진압군보다 월등히 많은 상황에서 패하였으니 군사의 수가 절대적 승리조건이었던 전근대사회의 전쟁은 아니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일본군과 조선관군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요인은 서양식 최신 총이었습니다. 당시 동학군이 서양식 최신 총을 거의 구비하지 못하고 중세식 조총과 농기구로 이들과 대적하였다는 사실은 근대적 전쟁의 양상에서는 이길 확률이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일본군을 주도하던 일본공사관과 조선 정부에서는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동학군이 수만명이라는 사실을 알고서도 겨우 5천 여명으로 이들을 대적했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나는 것이죠.

최후의 전투인 공주 우금치에서 이들은 격돌하게 되는데 적게는 1~2만명에서 많게는 3만명의 동학군이 서양식 총에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를 우금치 전투라고 하는데, 전투라기 보다는 학살 내지는 도살이라고 하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고 박노자 선생은 생각하는데 어찌보면 현대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근대적 전쟁에서 전근대적 무기와 근대적 무기의 충돌은 대부분 근대적 무기의 승리로 돌아가며 그 때 군사의 수는 아무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우금치 전투의 승리를 계기로 동학군의 근거지인 전라도를 휩쓸고 다니게 되는데 이때 주도했던 사람들은 조선군 개화파 장교들로 여러곳에서 비도(匪徒-조선군이 동학군을 지칭하던 말)들을 공개처형합니다.

이러한 대규모 적인 학살은 동학의 특수성으로 설명하기에는 지나치게 보편적이라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입니다. 19세기 사회는 홉스봄이 말한대로 제국의 시대이지만, 식민지를 경험한 입장의 나라에서는 제국의 시대가 아닌 학살의 시대로 규정해도 크게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19세기 말 조선 사회가 일본에 의해서 그러했듯이 아프리카와 아시아 국가들은 서양제국주의 세력에 의해서 그렇게 학살의 시대를 맞이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도구를 가리킨다면 바로 '소총'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성장함에 따라 19세기 중반 이후가 되면 소위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원주민들도 능력이 발전하게 됩니다. 서양제국주의가 독점하던 소총을 구비하게 되죠. 1838~42년에 걸쳐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한 영국은 5천명의 사망자를 내고 포기를 하고, 1857~58년 사이에 인도에서 일어난 세포이 항쟁으로 영국도 2천여명의 사망자를 내고 잠시 후퇴를 하기도 했죠. 소총으로 무장한 아프가니스탄 주민들과 인도의 세포이들이 제국주의자들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을 다시 역전시킨 것은 역사 서양제국주의의 무기들이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1884년에 등장한 '맥심기관총'으로 이 무기는 단발식 소총과는 달리 다량의 인명을 살상할 수 있는 그 당시에는 가공할 만한 무기였습니다. 1898년 9월 2일 아프리카 수단의 칼리파인 압둘라가 5만여 명을 이끌고 영국군과 교전을 할 때 기관총으로 무장한 영국군은 47명의 사망자만 내고 거의 1만여명의 수단군을 전몰시켰습니다. 1894년의 우금치 전투도 여기에 비견될 수 있죠.

도륙과 살상이 이제 기계화된 시대에 식민지화된 국가들에게 '제국의 시대'는 그대들의 시대일 뿐 아무런 의미를 가져다 주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다르게 명명할 필요가 있으며 당시의 현실을 그들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생각한다면 아마 '학살의 시대'가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던져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 국민에 대한 시각입니다. 과연 그들은 식민지인들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영국의 위대한 문호이자 당시 사형제 폐지론자였던 찰스 디킨스는 인도에서 일어난 세포이 항쟁 소식을 듣고는 어느 편지에서 "인도에서 군 총지휘관이 되어 인도인이라는 인종 자체를 지구상에서 모조리 지워버렸으면 하는 것이 나의 꿈"이라고 하였고, 그의 동료 시인인 마틴 터퍼는 "그 종양을 칼로 베어 불로 태워버리고 그 반란 지역을 일체 파괴하고 모든 개 같은 토착민 하층들을 교수형에 처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인종주의적이고 평화주의적이라고 그것은 제국만의 것이고 식민지인에게는 돌아오지 않은 허황에 불과하니 제국의 시대는 곧 그대들만의 시대라는 말과 상통한다고 보아도 좋을 듯 싶습니다.

이러한 학살의 시대는 언제 막을 내렸을까. 제국의 양심있는 사람들(얼마나 양심적이고 누구에게 양심적인지는 몰라도)의 반대운동도 있었지만, 대개는 식민지 국가들의 근대적 인식의 성장과 민족주의 사상의 대중화가 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의 대한민국으로써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의 양심있는 지식인이었다기 보다는 근대적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성장과 한국이라는 민족인식이 큰 몫을 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듯 합니다. 물론 다른 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베트남전쟁으로 미국의 근대적 무기로 북베트남을 아무리 공격하여도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서서히 인식하게 되었고 결국 패배로 끝을 맺었죠.

학살의 시대와 제국의 시대 사이에 대한 간격은 아직도 크게 느껴집니다. 홉스봄이 20세기를 극단의 시대라고 표현한 것처럼 그 극단에는 학살로 대변되는 이들의 생각과 제국으로 대표되는 국가들 사이의 인식이 자리잡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 극단들이 존재하겠지만, 저는 아마도 학살-제국 사이의 간격만큼 큰 것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 출처 : 박노자, "기관총이 열어젖힌 학살의 시대', <한겨레21> 792호, 2010년1월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