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조선의 해외파병 - 계산된 결정

계승범 선생의 최근 저작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를 정리하였습니다.

당근과 채찍 - 조선초기의 여진정책

조선의 명나라 국제질서에 참여하게 된 것은 명나라의 국제적 우월성을 인정했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나 조선의 주변 작은 국가들에 대해서는 조선 나름대로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국제질서를 작은 주변나라를 통해서 실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남방의 대마도가 그러하였고, 북방의 여진족이 그랬습니다. 명나라 또한 여진의 여러 추장에게 인신과 작위를 주었는데 이는 조선도 마찬가지여서 명나라의 관직을 받은 여진 추장이 조선에 들어와도 조선에서는 그에 상응하는 조선의 관직을 하사했습니다. 하물려 여진인들이 조선으로 귀화하는 것도 적극 권장하여 세금의 면제 등의 혜택을 제공했습니다.

만주 일대의 여진인들이 명나라와 조선 모두에서 입조를 한 상황은 15세기 내내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여진 문제를 놓고 명나라에서는 국서를 보내서 여진과 직접 교통하지 말라는 칙령을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명나라에서 조선의 여진정책을 거의 방관하다 시피하다 조선의 여진정책이 강화된 틈을 이용하여 간섭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명나라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상 조선에서도 더 이상 여진에 대한 관계를 진척시키지 못하고 한동안 관계가 단절되기도 했습니다. 조선과 여진의 관계도 그리 평화적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태종대에서 선조대까지 200여년 동안 조선은 모두 13차례의 원정을 감행하기도 했습니다.

파병은 없다 - 세종대 해외파병

1449년 8월 1일 밤에 요동으로부터 올라온 보고가 조정을 술렁이게 했습니다. 몽골군대가 명나라를 침략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에 조선에서도 비상 방어체제가 돌입되었습니다. 그러나 파병에 대해서는 입장이 달리 신중론이 강했습니다. 당시 조정의 신료들은 사대라는 것은 그저 대국을 섬기는 것으로 이해했고 따라서 사대의 대상은 국제정세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조선에서도 10만의 대군을 요동에 파견하여 도우라고 하였으나 조선에서는 왜나 여진이 언제 처들어올지 모르니 조선의 강토를 굳건히 지켜 번국의 도리를 다하는 것으로 하겠다고 분명히 거절했습니다. 세종대의 특징은 처음부터 끝까지 신료들 중 어느 누구도 청병에 응하자는 의견을 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조선조정의 일관된 관심은 예상되는 변란에 대비해 방어태세를 갖추고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특징은 조선의 파병 거절에 대해 명나라에서도 아무런 이의제기없이 그대로 수용했다는 점입니다.

즉각적인 파병 - 세조대 해외파병

1467년(세조13)에 명나라는 조선에 다시 파병을 요청하는 칙서를 보냈는데, 이번에는 건주여진이 대상이었습니다. 이 당시 건주여진은 요동을 100여차례나 침범할 정도로 그 기세가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조선조정의 반응은 파병일변도였고 반대 의견은 전혀 없었습니다. 특이한 점은 신하들의 합의도 없이 세조의 일방적인 지시로 결정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럼 세종대와는 다른 즉각적인 파병이 이루어졌을까. 이미 청병이 있기 전에 조선에서는 건주여진에 대한 정벌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건주여진이 기세가 등등한 가운데 명나라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도 국경에 대한 방비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비록 계획 수립 열흘만에 이시애의 난으로 전면 중단이 되었으나 명나라에서 먼저 건주여진을 치고자 하는 상황에서 조선에서는 그 수고로움을 덜 수 있는 기회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건주여진 문제로 명나라와 조선에서 외교적으로 매우 껄끄러웠던 상황(여진정책에서 설명했듯이)을 고려한다면 명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될 경우 조선의 손해가 크다는 사실도 어느정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상황이 종합적으로 어우러져 세조대에는 즉각적인 파병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생색내기 파병 - 성종대 해외파병

1479년(성종 10년)에 명나라는 다시 조선에 파병을 요청했습니다. 골자는 건주여진을 다시 치고자 하니 조선에서 퇴로를 차단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조정에서는 이에 대하여 즉각적인 논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조정의 의견은 찬반이 명확히 갈렸습니다. 찬성론에서는 대국을 섬기는 예의상 거절하기 어렵다는 점과 세조대에 출병한 전례가 있다는 것이었고, 반대론에서는 평안도 지역의 흉년, 겨울이라는 시기문제, 패배할 가능성, 세종대 명의 청병을 거절한 점을 들었습니다. 성종의 마음은 반대론이었는데 문제는 구실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해답은 당시 하급관리였던 승문원참교 정효종의 상소였습니다.

그는 맹자의 <이루장>의 구절을 인용하여 쓸데없이 이웃의 싸움에 개입해 남 좋은 일을 해 줄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정효종의 생각을 성종과 여러 조정의 신하들은 아무런 이의 없이 받아들였다는 점입니다. 파병 찬성론자들도 이 상소를 보고 파병을 제고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의견을 바꾸었습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다음과 같은 지침을 세웠습니다.

1. 칙서에 따르겠다고 하되, 겨울철 파병은 어렵다고 한다. 2. 혹시 칙사가 파병할 군사수를 물으면 1만명 이상은 불가능한다고 한다. 3. 만약 칙사가 직접 조선 군대와 함께 요동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면, 우리 장수가 직접 지휘할 것이라고 하면서 거절한다. 4. 공격 기일에 대해서는 날씨와 지형을 핑계로 그 날짜에 맞추기 어렵다고 한다.

이는 곧 청병에는 응하겠지만, 세부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따르게 어렵다는 말 그대로 생색내기 파병이었습니다. 파병을 애매모호하게 함으로써 하지 않겠다는 우회적인 방법입니다. 이에 따라 조선에서도 명목상 파병은 하게 되는데 당시 3도도체찰사였던 어유소가 원정군 대장을 맡게 됩니다. 성종은 어유소에게 섣불리 공격하지 말고 며운이 토벌하고 지나간 다음 살며시 들어가 포로나 몇명 잡아 북경에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압록강에 다다르자 기병대가 강을 건너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는 군대를 해산시켜 버렸습니다. 성종은 이를 크게 문제삼지 않았으나 문제는 명 조정에서 조선이 출병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을 경우 외교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 하여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신하들은 적을 공격하지 않았더라도 최소한 강이라도 건넜어야 황제에게 뭐라고 보고라도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고 우려를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결국 2차출병을 하게된 조선은 윤필상이 이끄는 950명 규모의 부대가 압록강을 건너 몇몇 건주여진 부락을 급습하여 15명 참수, 1명 사살 7명의 명나라 백성 구출, 부녀 및 아이 15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는데 전혀 전투라고 할 수도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이에 성종은 한두 명만을 잡았어도 만족인데 포로가 참 많다고 하여 매우 기뻐했다고 합니다. 이에 조선이 승첩을 보고하자 명 조정은 조선이 작전 기일을 지키지 않은 것을 문제 삼기는 커녕 칙서에 순종해 건주여진을 무찌른 것으로 간주해 크게 포상하고 금패까지 하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