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가 공짜가 아닌 이유

사편(史片)/근현대사 2009. 12. 10. 14:43 Posted by 아현(我峴)
원조가 공짜가 아닌 이유

한국은 IMF의 구제금융을 받고 나서 외자에 대한 동향이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지게 된다. 1998년 5월에 주식시장에서 외국인 소유지반에 대한 제한 규정이 사라졌고, 2000년 말에는 외환 거래마저 자유화되었다. 그 결과 주식시장에서 외국인의 지분 비율은 30%를 넘게 되었고, 국내 주식시장은 외국 자본에 의해서 큰 영향을 받는 결과를 가져왔다. 우리가 현재 미국과 일본 자본의 영향 아래에 놓이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IMF위기 이전에는 이 정도로 체감이 되지 않았다. 외자 문제는 주로 외채와 관련된 문제에서 불거졌고, 그때 사람들은 정치인들에게만 이를 맡겨두었으며 나라 살림을 걱정하면서 국민 한 사람이 얼마를 갚아야 한다는 식으로 계산하고는 하였다. 자본이 부족한 나라에서는 외국 자본을 빌려 나중에 갚으면 될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그러나 원조는 공짜로 주는 것이 아니다. 이미 외국자본의 논리는 상당히 정권유지적 경제논리에 포함이 되어 있으며 그것이 현재 한국경제의 한 단편인게 사실이다. 우리 안의 파시즘 만큼이나 우리 안의 미국이 한국현대사를 관통한다.

원조는 도와준다는 말이다. 대가없이 물자나 자금을 공짜로 베풀어준다는 의미다. 그러나 자본주의 경제관념에서 보상과 이득이 없는 경제 논리는 있을 수 없다. 원조 또한 본질적으로 자본이기 때문에 자기 이득을 위한 무엇가가 작동하게 마련이다. 아쉽게도  본질은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19세기 말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산업자본주의를 거쳐 독점자본주의로 나아갔다. 자본축적 방식도 변화하여 상품수출에서 자본수출로 바뀌었다. 독점자본주의에서 바로 그 독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포화상태인 국내를 벗어나 새로운 해외 추자처를 찾아야 한다. 그리하면 과잉자본이 생겨 자본수출이 가능해진다. 후진자본주의 국가들이 노동생산성은 낮지만 노동시간을 연장하여 잉여가치를 늘리기 때문에 독점자본주의 국가들은 후진자본주의 국가로 자본을 수출하게 된다. 자본은 선진국에서 원료, 노동은 후진국에서 마련하는 것이다.

자본수출에는 사적(민간) 자본수출과 국가(정부) 자본수출이 있다. 1차 세계대전 이전과 1960년대 이후 같이 안정된 시기에는 사적 독점자본이 증권투자 형식으로 국외에 진출하였으나 1차, 2차 세계대전과 1930년대 대공황기, 한국전쟁기간에는 불안정한 시기여서 정부간 차관이나 원조와 같은 국가 자본의 수출이 주류를 이루었다. 우리가 보고자 하는 원조는 국가독점자본주의 단계에서 나타나는 국가자본 수출의 전형이다. 원조는 직접적인 경제적 대가를 바라지 않기 때문에 제공국이 실질적인 비용을 부담한다. 그러나 원조는 가까운 미래에 도입국과의 무역관계 촉직이나 상품수출 등을 기대하기 때문에 그 비용은 충분히 보상이 된다. 그래서 원조는 원조->유상의 공공차관->민간 상업차관->직접, 합작 투자로 이어지는 것이 기본적인 구조이다.

재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미국은 전후세계질서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고민했다. 그래서 미국은 배타적인 무역장벽을 철폐하고 자유무역제도를 확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는데 문제는 미국의 과잉된 상품을 살만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는 국가가 별로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미 미국의 군수산업 생산물은 과잉생산이어서 그대로 둔다면 제2차 대공황을 야기할 상황이었다. 따라서 비대해진 생산력을 배출할 해외시장이 필요했다. 그래서 미국은 우월한 경제력으로 미국상품 수출의 절대적 자유를 다른 국가에 요구했다.

미국은 장기적으로 무역과 투자를 위한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전쟁으로 손상된 자본주의 사회관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원조정책을 실시했다. 유럽부흥계획, 흔히 마셜플랜이라고 하는 원조는 공산권의 위협을 봉쇄하고 자본의 통제를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미국은 이를 위해 1948년엥 경제협조처(ECA)를 설치했는데 한국의 원조는 여기서 제공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군정은 물리적으로 믹구의 가치를 하나씩 한국에 이식하기 시작했다. 농지개혁은 유상매입 유생분배 방식을 채택했다. 식민지시대 기업들은 당시 잉여가치의 결정체였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자주관리로 가지 않고 친일세력에게 헐값으로 팔아 넘겼다.

마셜플랜은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국의 대외원조는 군사원조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1951년 제정된 미국 대외원조의 기본구조인 상호안전보장법(MSA)은 군사원조와 경제원조를 하나로 통합했다. 전쟁통에 군사원조의 비중이 커지면서 1950년대 대부분의 경제원조는 이것으로 충당되었다. 그러나 MSA원조를 받은 나라는 대충자금(對充資金)의 일정부분을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했다. 대충자금은 달러로 된 원조를 환율에 의해 도입국의 화폐로 환산하여 도입국의 재정자금으로 적립하는 것을 말하는데, 도입국 입장에서는 공짜 재정이 생기는 셈이다. 그러나 이는 반만 사실이고 반은 그렇지 않다.

대충자금으로 형성된 국가재정은 대부분 제공국의 상품을 구매하는데 본 가격보다는 싸게 들여오지만 제공국의 상품을 들여오는데 상당부분을 지출하고 있었다. 이러한 자금은 1950년대 세입의 30~50%를 차지하고 있었다. 원조의 본질은 바로 이 대충자금의 운용을 통해서 그러난다. 제공국의 원조 목적이 경제적 이윤을 얻기 위한 대충자금이 목적이라면 결국 원조의 본질은 잉여가치를 얻고자 하는 자본으로써 국가자본이 수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1950년대의 원조, 60~70년대의 차관, 80년대 이후의 직접 투자 모두 이러한 관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미국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한국의 경제적 발전은 곧 미국 수출시장의 확대를 의미하며 한국 경제발전을 위한 자금 제공의 방법은 단지, 원조, 차관, 투자 등과 같은 방법에서의 차이만 있었을 뿐이다. 원조의 결과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한국은 원조의 대가로 미국의 지역통합전략 구도의 반공을 위한 전초기지 위치에 있어서 일본경제의 배후지, 하위 파트너로 설정이 되어 경제발전도 이런 목적에 맞는 수준으로 한정되었다. 그 예로 미국은 한정된 재원으로 한국이 반공전초기지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도록 한미합동경제위원회를 통해 대충자금을 운용해갔다. 1954~60년 동안 대충자금은 35%가 국방비로 사용되었고, 62%만이 경제부흥사업에 충당되었다. 정치, 군사적논리가 경제적 논리와 양분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원조의 영향은 미국의 이해관계에 맞는 공업화의 방향, 소비재 공업으로 귀결되었다. 미국은 방대한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 소비재 원조물자 공급을 늘렸는데, 원조물자의 70%가 소비재였다. 따라서 원조원료에 기반한 소비재 공업인 면방, 제분, 제당 공업이 당시 공업화를 이끌었다. 소비재 공업의 독점은 원료와 판매의 독점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카르텔의 형성은 자연스러웠고, 이를 통해 이승만 정권과 자본가 사이에 정치자금이 유통되었다. 경제와 정치의 유착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10대 재벌 중에서 9개 재벌이 이 시기에 주력산업을 형성했다. 결국 반공전초기지, 종속적 소비재공업, 전근대적 정경유착, 경쟁력 없는 재벌, 농업의 몰락과 농촌피폐는 1950년대 원조가 남긴 부정적 유산이었다. 우리는 아직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 출처 : 신용옥, "원조가 공짜가 아닌 이유", <내일을 여는 역사> 2001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