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 영양천씨 가계의 사회지위와 이동

조선후기에 군역의 면제는 양반과 비양반을 구분하는 중요한 지표로 군역과 관련된 직임(職任)은 그 사회의 지위를 보여주는 표식으로 인식되었다. 즉 군역은 바로 조선후기 사회의 신분의 표식이자, 신분 변동의 통로였다. 군역을 살펴봄으로써 사회이동을 추적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에 본 글에서는 경상도 동래에서 거주하고 있던 비향반(非鄕班)층에서 무임(武任)직을 거쳐 향반(鄕班)으로 나아간 동래 석대동 하리의 영양 천씨를 대상으로 하였다. 영양천씨 가문은 처음 석대동 하리에 정착하였을 당시에는 사회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낮은 계층이었다. 그러나 이후에 무임직을 거쳐서 향교에 출입하기까지 했다.

* 향반(鄕班) - 지역사회에서 지역의 질서를 주도하는 지배세력을 통칭하는 말인데, 보통 알고 있는 상층의 양반하고는 의미가 약간 다릅니다. 상층양반보다 약간 아래의 지배층이라 보시면 됩니다.

동래 석대동의 영양천씨 가문은 상리(上里)와 하리(下里)에 거주하는 두 가계로 나뉜다. 이 글에서는 하리에 거주하는 천두필 가계를 대상으로 한다. 천두필 가계는 총 163점의 고문서를 소장하고 있다. 가장 많은 것은 준호구와 호구단자인데, 총 230년에 걸쳐 작성된 것이다. 그런데 이 자료의 특징을 보면 천씨 가계의 본관이 각기 다르게 기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1696년 천두필의 호구단자에는 본관이 동래로 기재되어있으나 천두필의 손자인 천성제가 기재된 1771년의 준호구에는 본관이 안동으로 되어 있으며 1834년 천치문의 호구단자에는 본관이 영양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는 천자필의 가계도 마찬가지여서 1783년 천성태의 준호구에는 본관이 동래에서 안동으로 바뀌어 기재되어 있다. 즉 다시 말하면 동래 석대동에 들어올때는 본관이 동래였으나 그 후 1700년대 후반에는 안동으로 바뀌었고, 이어 1830년대에 들어 영양으로 바뀌었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이 집안의 사회적 지위와 관련된 고문서들, 즉 첩(帖), 전령(傳令), 천지(薦紙), 망기(望記), 입안(立案) 등과 같은 것들에서 보이는 사회지위가 변화된 측면을 보면 본관이 바뀔 성향을 조금이나마 읽어낼 수 있다. 조선후기 동래 지역의 무임 직책을 나타내는 차첩이나 전령을 보면 이들이 다양한 무임을 역임하였고, 동래 지역에서 확고한 무임가문으로서 그들의 지평을 넓혀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사회적 지위의 변화는 그들의 재산상황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영양천씨 가문은 중시조로 천만리(千萬里, 1543~?)을 내세우는데 천만리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서 조병령양사겸총독장(調兵領糧使兼總督將)으로 이여송과 함께 명나라에서 조선으로 온 인물이었다. 그의 아들 천상(千祥)은 한성부좌윤겸오위도총관을 지냈다. 이들이 동래에 거재후게 된 것은 천만리의 4세손인 천찬석인데 그의 아들은 천득록이고 이 글의 주인공인 천자필과 천두필은 천득록의 두 아들이었다. 천자필은 상리에 천두필은 하리에 각기 자리를 잡았다.

이들의 경제적 상황은 천두필의 허여문기(상속문서)와 토지와 노비의 매매문기를 보면 잘 드러난다. 천두필 이후 그 후손들은 평균 3명 이상의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고 19세기 되어도 전답과 노비를 계속 사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천씨 가계의 넉넉한 경제적 기반은 이미 상당한 정도로 구축이 되었고 지역사회에 미치는 영향 또한 클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영양천씨는 입향조였던 천찬석의 아들인 천득록대에 보충대(補充隊) 입역(立役)을 통해 속량(贖良)되었던 것이 주목된다. 속신(贖身)을 통해 종량(從良)이 있었으므로 보충대에 들어갔던 자들도 관직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당시에는 가능했다. 천득록 역시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노비신분에서 양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아들인 천두필으 보충대에 소속되지 않아 다시 관청에 소지를 올리는 일이 있었다. 아버지가 종량된 사실을 증빙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숙종41년(1717)에 장례원에서 입안(증빙문서 발급)을 해 줌에 따라 완전한 양인 신분으로 남게 되었다.

* 보충대(補充隊) - 양반의 자손 중에서 어머니가 노비인 경우 자식이 노비가 되기 때문에 이들을 노비에서 양인으로 신분을 상승시켜주기 위한 방편으로 이들을 의흥위라는 군대에 소속시켜 일정하게 복무가 끝나면 관직에 나아갈 수 있게 한 군대를 말합니다.
* 입역(立役) - 양인이 군역을 지거나, 노비가 몸으로 일을 맡는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는 군대에 들어간다는 의미.
* 속량(贖良) - 돈을 내거나 국가에 공을 세워 노비에서 풀려나 양인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천찬석이 서얼이었기 때문에 있었던 일이나 추정된다. 서얼이 아니면 이러한 일은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 후손들은 이와 같은 사실을 기억하거나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어느정도 경제적 기반을 형성한 영양 천씨 가문이지만 서얼의 자손으로서의 인식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아마도 동래 지역의 사족(양반)의 위세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이에 대한 이의제기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이후에 무임직으로 사회적 지위 상승을 도모할 수 있었다.

앞서 본관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이야기 했다. 동래->안동->영양으로 본관이 바뀌는데 본래 천찬석은 영양이 본관이었다. 그러나 그가 동래로 이주하고 나서는 동래를 본관으로 쓰게 되어 동래 천씨로서 정체성을 갖게 되었으나 동래를 포기라고 안동으로, 그리고 다시 영양으로 본관을 바꾸었다. 이는 본관지인 영양에 대해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하였기 때문인데, 아마도 가장 먼저 발급된 준호구에 본관이 영양이었기 때문에 가장 오래된 문서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자신 가문의 연원을 끌어올리려는 인식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영양천씨는 천두필대에 노비신분에서 양인신분이 된 이후 동래 지역의 무임직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19세기가 되면 이 지역의 향반 사회에 편입이 된다. 17세기 준호구에 천두필의 직역이 ‘전력도위겸사복수영 기패관’으로 기재된 이래 천씨 가문은 지속적으로 무임의 직책을 이어나아가게 된다. 그의 아들이었던 천석구는 전습기패관, 속오기패관, 대솔군관, 속오기수초관, 속오우초관, 군관작대후초삼정, 여절교위수훈련원판관등으로 발령을 받았는데, 모두 무임직에 해당한다. 천석구의 아들은 천재덕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속오기패관, 속오후포관, 별기위, 아병후초관, 속오파총, 별군관등으로 나아갔다. 이들은 대개 병영소속 아니면 동래부의 무관직이었다. 이와 같이 천씨 가계는 석대동 상리와 하리에 거주한 이후 하급 무임에서 시작하여 중급무임까지 진출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768년 준호구를 보면 천성제의 직역이 유학(幼學)으로 나온다. 이후 그는 일관되게 유학으로 기재되는데, 그의 아들인 천세유(1753~1813) 역시 유학으로 기재되어있다. 천성제 이후 그의 후손들은 더 이상 무임직이 아니라 유학으로 기재된 것이다. 천성제는 1802년 4월 안락서원의 재임으로 천거되었고 8월에는 서원의 석전제 전작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후손인 천현곤은 면중 유사로, 천재곤은 향교 장의로 천거되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영양천씨가 동래에서 지역 사회 향반들이 관장하는 서원, 향교 등의 지역사회의 조직체계의 구성원으로 참여했다는 것일 알려준다. 재임(齋任) 등의 일은 지역사회에서 그들의 지위가 이제 작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천성제 이후 영양천씨는 무임가문에서 점차 향반 가문으로 그 지위를 굳히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지역사회 지배층의 일원으로 인정받는데에는 거의 100여년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신분상승이 조선후기 모든 사회에 일반화되었던 것은 아니다. 동래라는 변경의 특수한 지역이었던 점, 양반보다는 무인 집단 및 가문이 더 중요한 사회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점을 감안한다면 동래 지역의 특수성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안동이나 상주 같은 사족이나 양반의 세력이 강한 지역이었다면 이러한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영양천씨가 서얼인 점이나 그들의 하급 무임을 그들의 업으로 하고 있던 점은 그들의 신분이 낮았음을 나타내는 것이었고, 적자 중심의 양반들이 이를 가만 보아두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갈등을 이른바 향전(鄕戰)이라고 한다.

* 출처 : 손숙경, "조선후기 동래 석대동 하리의 영양 천씨 가계의 사회 지위와 그 이동 - 비향반에서 향반으로의 사회 이동과 변경지역 사회의 역동성", <고문서연구> 35, 2009.

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