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군대생활

사편(史片)/조선시대 2009. 11. 13. 20:49 Posted by 아현(我峴)
조선시대 군대생활

조선시대의 군대생활은 현대의 군대생활하고 많은 다른 점이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나 현재나 같은 점이라면 군대가기를 싫어했다는 사실이다. 조선시대의 군대생활은 <경국대전>을 보면 몇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로 복무기간이 길었다. 군대갈 수 있는 나이는 16~60세까지로 이를 丁이라고 지칭했는데 양인 남자를 말했다. 엄청나게 긴 복무기간인데 보통 1년에 2~6개월 정도의 근무를 하고 교체를 했지만, 오랜세월에 걸쳐 복무를 했으므로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둘째로, 국가에서는 군인에게 월급을 지급하지 않았다. 군사업무를 수행하는 군인을 정군(正軍)이라고 하였는데 이들에게는 보인(保人)이 있어서 이들이 정군에게 재정적인 도움을 주었을 뿐이었고 정부에서는 별도의 월급을 주지 않았다. 즉 정군의 월급 및 군대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보인에게서 얻었다. 그래서 정군 1인에 보인이 2~3인 정도가 하나의 집단을 이루었다. 월급 군인은 임진왜란 때 만들어진 훈련도감에서 처음으로 생겨났다.

셋째로 군인들은 자신들의 무기나 복장도 스스로 마련했다. 군대의 검열을 받을 때 처벌을 피하기 위해 군인 스스로 돈을 마련하여 무기를 구입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효종실록>에 그러한 사실이 보인다. 지역 대장에 해당하는 영장이 속오군을 점검할 때 무기나 복장이 불량하면 심하게 처벌을 했는데, 이는 그들이 이를 스스로 마련하지 않으면 처벌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편 조총과 같은 값비싼 무기를 구입한 군인에게는 면세의 혜택이 주어지기도 했는데, 국가에서는 스스로 이를 마련할 능력이 되지 못했음을 한편으로 보여준다.

넷째는 조선시대 군대는 신분에 따라 다양하게 편성되었다. 양반이 갈 수 있는 군대는 갑사, 별시위, 내금위, 충의위 등이 있었으며 일반 양인은 정병, 천인은 잡색군과 속오군 등으로 편성되었다. 신분에 따른 편제가 이루어진 것은 차별 대우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양반은 군대 복무와 더불어 관직 진출이 보장되어 특전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에 주축이 된 군대는 노비들이 주축인 속오군이었다. 임진왜란이라는 임시 상황을 통하여 군공이나 시재(試才)를 통해서 신분을 상승시키는 기회를 가졌다는 점에서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다섯째는 군역의 담당자에게 세금을 거두어서 국가재정을 확보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군대를 가지 않았던 대신에 군인에 복무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대신 돈을 거두어 이 돈으로 군대를 먹여살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부분으로 유용했다는 점이다. 국가에서는 실질적으로 군인보다는 재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군사활동을 중지시키고 돈을 모으는 수단으로 많이 사용하였다.

조선시대 법전에도 군대에 대한 면제 사유가 규정되어 있다. 이를 보면 다음과 같다. 군역에 면제되는 나이는 보통 만60세 이상이었다. 귀화한 외국인도 군역을 담당하는 경우를 볼 수 있었으며 전사자의 자손으로 충장위에 소속된 자는 손자에 한하여 군역에서 면제되었다. 또한 불치의 병이나 불구인 부모를 모시거나 70세 이상의 부모를 모시는 경우는 아들 중 한명을, 90세 이상의 부모를 모시는 경우 아들 모두를 면제시킬 수 있었다. 아들이 사망한 경우 친손자 중 한명을, 친손자가 없으면 외손자 중 한명을 면제시켜주었다. 이외에 지랄병, 맹인, 벙어리, 천치, 난쟁이, 곱사등이, 팔다리 중 하나를 쓰지 못하는 등의 불치병에 걸린 남자, 현직 관료와 관학생(성균관 유생, 사학 유생, 향교 생도), 2품 이상의 전지 관리 등은 군역을 면제받았다.

조선시대에도 비합법적으로 군역을 기피하는 방법은 다양했다. 돈이 있는 경우 요즘 말로 알바 군인을 고용해서 자신 대신 보냈는데 이를 대립(代立)이라고 한다. 이러한 대립의 폐단을 더욱 심각해서 전문적으로 이를 알선해 주는 사람이 생기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파기(疤記)라고 하여 군인의 용모와 특징을 기록한 장부가 있어서 쉽게 가까 군인을 식별할 수 있었지만, 이를 묵인해주는 댓가로 돈을 받았다.

다음으로 양반으로 신분을 상승시켜 면제받는 경우도 있었다. 양반은 조선후기에 군대를 합법적으로 가지 않았다. 이에 자신이 양반임을 증명하여 군역에서 빠지기도 했다. 양반이라는 증명은 복조를 사거나 위조하고, 국왕 및 공신의 자손이라고 하여 양반임을 강조했다. 또한 향교의 교생으로 모입(冒入)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향교의 교생은 합법적으로 군대를 가지 않았다. 한편, 향청의 관속, 차비(差備)가 되거나 감영과 병영의 군관같은 헐역(歇役)이 되는 방법도 있었다. 아울러 승려가 되기도 하고, 양반의 종이 되거나 향교의 임원이 되는 방법도 있었다.

이에 정부는 군역기피자를 색출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대응책을 강구하기도 했다. 호패법을 실시하여 전국적인 인구조사를 하고 도망가거나 군역을 지지하지 않는 자를 색출하는가 하면 승려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도첩제를 실시하여 승려의 인구를 제한하고, 교생에 대한 고강(考講-암기시험)을 실시하여 공부안하는 교생에게 군역을 지우는 방법도 있었다. 한편 군역세를 낮추어서 지방관청의 군인이 되는 것을 방지하고, 천인을 군역에 동원하여 군대를 충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백성들의 안정적인 생활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이러한 정책들은 큰 효과가 없었다.

한편 이와는 달리 스스로 군인이 되는 사람도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에 훈련도감이 설치되자 가난한 백성들이 도감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잘 모집이 되지 않았으나 하루에 쌀 두 되를 지급한다는 조건을 내걸자 많은 사람들이 도감으로 몰려들었다. 서울의 빈민들이 끼니를 잇기 어려워하자 곡식을 얻기 위해 몰려든 것이다. 결국 훈련도감은 노비 신분의 장정이 많았었고 신분을 가려뽑으려던 방침을 포기해야 했다.

참고문헌 : 서태원, “조선시대의 군대생활”,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청년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