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상추의 첩과 기생

사편(史片) 2008. 5. 3. 20:28 Posted by 아현(我峴)
문숙자, <조선후기 양반의 일상과 가족내외의 남녀관계>, [고문서연구] 28, 2006.

이 글은 <노상추일기>를 자료로 하고 있다. 시기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이다.

노상추 가문의 공식적인 부부관계는 정처(正妻)에 의한 사회적 지위와 가문간의 관계로 설정되어 있었다. 낯선 타인에서 점점 정을 쌓아가는 관계였으며 자식을 낳아 가계를 유지하는 데 큰 의미를 가지는 반면, 첩과 기생의 경우에는 자식을 낳는 경우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타향에서의 장기간의 관직생활에 따른 현실적 원인이 더 컸다.

노상추 가문의 부부관계는 사별과 재혼의 반복이었다. 아내의 요절이 많았는데, 대부분 산후조리의 미숙이었고, 그에 따른 남편의 재혼이 반복되었다. 가장의 재혼은 대개 가족의 유지와 계승이 안정적으로 보장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 이후에 재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반면에 첩과 기생은 현실적이고 감정적이었다. 처에 대한 인정은 대개 사망할 때 나타나지만, 첩과 기생에 대한 정은 수시로 나타나는 것이 보이며, 과연 그것이 사랑인지에 대한 스스로의 의문도 가끔 드러난다.

妓次雪梅與洪玉 下直馬頭 不無一分顧戀意思 丈夫無意於色上云者 乃虛語也 (노상추일기, 1794.9.7)

사대부들의 문장이 아닌 평범한 한 무관 관직자의 소회이다. 관기인 설매와 홍옥과 서로 헤어지는데 조금이라도 연분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며 대장부가 색에 뜻이 없다고 하는 것은 모두 거짓말이라고 하는 그의 솔직한 생각은 이념과 현실사이에서의 괴리가 조금은 느껴진다.

노상추는 처음에는 갑산부 관기인 '벽이'와 관계를 맺었다. 그는 거의 매일 노상추가 있는 갑산진에 들렀으며 일기에는 벽이가 유통(乳痛)으로 고통스러한다는 기록을 남기는데 이는 곧 그녀의 해산소식으로 그 원인이 드러나기도 했다. 벽이는 아예 어미까지 대동하고 노상추를 찾아오는가 하면 노상추가 앓아 누우면 벽이의 언니들까지 노상추를 방문할 정도였다.

몇년 후에는 노상추가 옥매라는 구성부 소속 관기와 정을 나누었다. 그러나 옥매는 남편까지 있었다. 노상추가 삭주부사로 임명을 받자, 여러 관속들과 인사할때도 옥매는 있었으며 구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삭주에 10여일간 머물렀다. 한편 노상추가 구성부에 가면 기생을 불러 가무를 즐길때 옥매가 끼어 있었다. 옥매와는 1년 넘게 정을 나누었는데 노상추는 남편이 있는 기생과의 관계에서 오는 공허함으로 괴로워했다.

당시 지배층의 연애관은 이중적인 면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한다. 한편으로는 공식적인 처를 통해 다른 하나는 비공식적인 첩과 기생을 통해 발현되었다. 처를 통한 애정관은 대개 죽고 나서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 않으면 처는 대개 남편에게서 질투의 대상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이는 미암일기에도 나타난다. 아마도 이념적인 애정관이 아닐까. 아니면 아들을 낳아준 것에 대한 인정이라고나 할까. 내 생각엔 후자가 더 강하게 느껴진다. 첩과 기생은 대개 타향 생활로 인해 발생하는 경우가 많아지는데, 타향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이러한 현실적인 애정관이 어떻게 발현되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앞으로의 숙제라고 보여진다.

또 하나는 변방 기생과 첩비들의 생활 모습이다. 옥매에서 보는 것처럼 남편까지 있으면서 지배층의 마음에 들고자 하는 경향이 컸다. 이러한 모습은 부북일기에서도 나타난다. 분명 하삼도나, 경성의 경우와는 많이 다를 것이다. 변방의 특성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이념적인 측면과는 다르다는 것.

08.05.03. 我峴 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