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히로부미 살해사건의 파문

사편(史片)/근현대사 2009. 10. 30. 02:50 Posted by 아현(我峴)
이토 히로부미 살해사건의 파문

통감부 시기(1905~1910) 전통적인 지역의 지배질서였던 지역양반과 향리에 의한 지배구조가 해체가 되면서 그동안 민란을 주도해온 향촌의 지식인과 덕망가의 선비의식도 많은 약해지고 있었다. 이러한 지역사회에 대한 변화에 통감부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인들도 촉각을 세우게 되었다. 당시 통감부 경무국의 자료인 “민심을 지배해야 할 세력의 중심”을 보면 민심을 지배해야 할 세력의 중심이 이동하고 있다고 하는데 대표적으로 자본가, 신지식계급, 특히 일본어를 아는 자라고 하였다. 이를 좀 더 넓은 의미로 해석하면 “민심을 지배해야 할 세력 중심”으로서 새롭게 발흥한 근대적 세력의 유력한 매개체로 일진회와 애국계몽단체가 부상하고 있었다.

이들이 중요한 것은 통감부 시기 주요단체의 구성원을 보면 일진회가 가장 많아서 1910년 6월 기준으로 일진회가 91,896명, 다음으로 대한협회 20,289명으로 두 단체가 거의 압도적이었고 그 다음으로 많은 서북학회는 겨우 4,370여명이었다. 물론 종교단체의 경우 천도교가 7만여명에 이르렀지만, 여기서는 정치단체에만 국한하여 말하고자 한다. 이들은 통감부의 정책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었을까. 일진회의 경우는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에 굳이 논하지는 않겠지만, 우선 하나만 집고 넘어가자면 회원의 다수가 상민 혹은 하층자라는 사실이다. 다음으로 대한협회를 보면 이 단체는 애국계몽단체의 중심적인 존재로 여겨졌지만 통감부의 보호정치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입장이었다. 그래서 1909년대 대동단결을 도모하려는 일진회와의 제휴협상에도 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 의해 저격되었다. 한국에 있던 경찰들은 이에 빠르게 대응을 했는데, 27일자 신문에 따르면 <대한매일신보>는 안중근을 그냥 ‘범인’으로 부르고 있지만, <황성신문과>, <대한민보>에서는 ‘흉악범인(行兇犯人)’이나 ‘행흉자(行兇者)’라는 용어를 써서 안중근과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한국정부의 반응도 즉각적이어서 시내 거리에서 소란을 피우는 것을 금지하고 새벽 시장과 노래도 금지했다. 이토의 국경일에 서울 시내의 민가에 반기 게양을 실시하고 전국 공사립 학교의 휴교령이 내려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총독부 경무국의 민심에 대한 조사가 실시되었다. 몇 가지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이토가 살해된 데 대한 축하나 환영 또한 안중근의 거사에 대한 칭송이 많이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앞날에 대한 불안과 비관의 기색도 칭송과 더불어 역력하게 보이고 있다. 그러나 위 두 가지 반응은 서로 상반된 것이 아니어서 사건을 내심 환영하면서도 동시에 한국의 앞날을 걱정하는 양면적인 심정이야말로 당시 한국인들의 심성을 대표적으로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그 불안과 걱정이란 과연 일본의 배상 요구가 어느정도 이어질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말한다.

이토의 죽음에 직면하여 국내 최대의 정치단체였던 일진화와 대한협회는 이토 추도에 대한 적극성에 차이가 있었다고는 해도 사건을 환영하기보다는 한국의 전도를 염려하는 입장에서는 공통되고 있었다. 두 단체는 30일 연합해서 이토 추도회를 거행하는데 합의를 하고 11월 11일에 대한국민추도 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두 단체는 대일 관계를 둘러싼 전략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대한협회는 한국의 실력양성을 위한 일본의 보호정치를 인정하고 통감 정치의 현상유지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일진회의 경우에는 합방청원서를 향한 움직임을 구체화하고 있었다. 즉 대한협회는 통감부의 보호정치 유지를, 일진회는 일본과의 합방을 생각하고 있었다.

일진회의 이러한 움직임에 일진회의 지방지회와 일반 회원들은 합방청원서에 지지를 표명하였지만, 대한협회는 합방운동에 반대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합방이 무엇인지를 자세히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던 것이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였다. 전라북도에서는 일진회의 합방청원서 제출로부터 3주가 지난 뒤에도 이를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합방에 대한 반대 의견을 가진 백성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다양한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어떤 이는 “합방을 하면 다시 옛날의 양반과 같이 압제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어떤 사람은 “합방 결과 한국인은 일본인 이민과의 생존 경쟁에서 지거나 그들에 의해 추방되는 것은 아닐까 불안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국가의 운명에 따른 반대가 아니라 주위 환경의 변화로부터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의식이 더 강했던 것을 볼 수 있다.

모든 것을 민족성으로 이야기하기에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본 글은 일본인이 쓴 것으로 이토 히로부미 살해사건이라고 표현된 것입니다. 올해가 한국에서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이라면 일본에서는 이토 히로부미 사망 100주년입니다.

* 출처 : 마쓰다 도시히코, “이토 히로부미 살해사건의 파문”, <한국과 이토히로부미>, 선인,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