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두 정철의 졸기를 보고 송시열이 어떠한 인물인지 A4 2장으로 쓰세요.(마지막 수업시간에 제출)

* 정철의 졸기(卒記) 1 - <선조실록> 46권, 26년(1593) 12월 21일 기사

인성 부원군(寅城府院君) 정철(鄭澈)이 졸(卒)하였다. 【정철은 논박을 받고 강화(江華)에 가 있다가 졸하였다. 】

사신(史臣-실록을 편찬한 사람)은 논한다. 정철은 성품이 편협하고 말이 망령되고 행동이 경망하고 농담과 해학을 좋아했기 때문에 원망을 자초(自招)하였다. 최영경(崔永慶)이 옥에 갇혀 있을 적에, 그가 영경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나라 사람이 다같이 아는 바이고 그가 이미 국권을 잡고 있었으므로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도 모두 정철과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런데 마침내 죽게 만들었으니 가수(假手-손을 빌림)했다는 말을 어떻게 면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일에 대응하는 재간도 모자라 처사(處事)가 소루하였기 때문에 양호(兩湖-충청도와 전라도)의 체찰사(體察使-관찰사)로 있을 때에는 인심을 만족시키지 못하였고, 중국에 사신(使臣-중국에 가는 조선외교관)으로 가서는 전대(專對-남의 물음을 혼자 받아 스스로의 지혜로 답변함)에 잘못을 저지르는 등 죄려(罪戾-죄를 저질러 사리에 몹시 어그러지는 일)가 잇따랐으므로 죽을 때까지 비방이 그치지 않았다.

* 정철의 졸기(卒記) 2 - <선조수정실록> 27권, 26년(1593) 12월 1일 기사

전(前) 인성 부원군(寅城府院君) 정철(鄭澈)이 졸하였다.

과거에 정철이 부사(副使-중국에 가는 조선외교관 중 2위 관원) 유근(柳根)과 함께 사은사(謝恩使-조선 시대 때 나라에 베푼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중국에 보내던 사신)로 경사에 갔다가 돌아왔다. 이때 동로군문(東路軍門)이 화의(和議)를 주장하여 ‘왜적이 이미 군사를 철수하여 바다를 건너갔다.’고 속여 말했으므로, 본국의 주문(奏文-임금에게 아뢰는 글)과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정철(鄭澈) 등이 돌아온 뒤에 병부(兵部)가 주문(奏文)하기를, “전에 온 사신에게 물었더니 역시 ‘왜적이 이미 철수해 돌아갔다.’고 말하였습니다.”하였다.

상(왕을 지칭하는 말:선조)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랐는데, 유근이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기를, “이것은 실로 병부에서 속임수로 꾸며낸 말입니다. 사신 일행이 어찌 그런 말을 했겠습니까.” 하였다. 이때에 조정의 의논이 이미 변하여 먼저 정철을 제거하려고 하여 대간(臺諫-사간원과 사헌부)이 이를 인해 정철을 탄핵하였다. 그러나 상은 다만 체직시키고 추고하도록 명하였는데, 유근 및 서장관(書狀官-중국에 가는 조선외교관 중 3위 관원) 이민각(李民覺)과 역관(譯官-중국에 가는 조선외교관 중 통역관) 등은 모두 연루되지 않았다. 이때부터 유언 비어가 비등하여, “정철이 북경에 가서 오로지 성궁(聖躬-임금의 몸을 높여 이르는 말)의 과실만을 은밀히 중국 조정에 전파시켰다. 그러므로 황제 칙서 속의 추사(醜詞)들은 모두가 그로부터 나온 것이다.” 하였다. 정철은 강화(江華)에 우거하다가 술병으로 죽었다. 향년은 59세였다.

정철의 자는 계함(季涵)이고 호는 송강(松江)이며, 젊어서부터 재명(才名)이 있었다. 김인후(金麟厚)·기대승(奇大升)에게 종학(從學-남을 좇아서 그에게 배움)하였는데, 기대승은 자주 그의 결백한 지조를 칭찬하였다. 그의 누나는 인종(仁宗)의 귀인(貴人)이 되고, 누이동생은 계림군(桂林君)의 아내가 되었다. 을사년(1545년)의 화(禍)에 부형(父兄)이 관여되었으나 정철은 어리다는 이유로 화를 면하게 되었다. 어린 아이 때 동궁(東宮)을 드나들었는데, 명종이 대군으로 있을 때 정철과 유희(遊戲-놀다)하면서 매우 가깝게 지냈다. 정철이 장원에 등제한 방목(榜目-과거합격자 목록)을 보고는 매우 기뻐하여 액문(掖門-삼문(三門) 가운데 좌우에 달린 작은 문) 안에서 특별히 주찬(酒饌-술과 안주)을 내리라고 명하니, 정철이 사양하기를, “이미 출신(出身-과거에 합격)한 이상 남의 신하된 입장에서 감히 이런 사례(私禮)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명종(明宗)이 주찬을 내릴 것을 중지시키고 신무문(神武門-서울 경복궁의 북문)을 통해 나가도록 명한 뒤 누대 위에서 그가 가는 것을 바라보았으니, 은권(恩眷-임금의 총애)이 특별하였다. 얼마 후에 정언(正言-사간원 정6품 벼슬)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대중(臺中)에서는 바야흐로 경양군(景陽君-명종의 사촌형)이 처가의 재산을 빼앗으려고 서얼 처남을 꾀어 죽인 사건을 논하면서 법대로 처벌할 것을 청하고 있었다. 명종(明宗)이 친속(친척)으로 하여금 정철을 설득시켜 논박을 정지하도록 하였는데, 정철은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정철은 파면되어 광주(光州)에 돌아가 있게 되었는데, 여러 번 청망(淸望-청요직, 중요관직)에 주의(注擬-인사명단에 올라감)되었으나 3년 동안 낙점(임금이 인사명단을 보고 임명할 사람을 정하는 일)을 받지 못하였다.

선조 초년에 전랑(銓郞-이조와 병조의 좌랑과 정랑, 문관과 무관의 인사권을 가짐)으로 기용되었는데, 오로지 격탁 양청(激濁揚淸-탁류를 몰아내고 淸波(청파)를 끌어들인다는 뜻으로, 악을 제거하고 선을 떨침을 비유해 이르는 말)만을 힘썼으므로 명망은 높았으나 그를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많았다. 당론이 갈라지자 그는 한쪽만을 극력 주장하다가 시론(時論-당시의 논의)에 원수처럼 되었는데, 상의 권애(眷愛-임금의 총애)를 힙입어 구제된 것이 여러 번이었다. 신묘년(1591년)에 이르러서는 상의 권애도 식어서 거의 죽음을 당할 뻔했는데 이덕형(李德馨)이 구제해 준 덕분에 조금 완화되었다. 그 뒤 변란을 인하여 폐고(廢錮) 중에서 기용되었으나 또한 조정에 용납되지 못하였다.

그는 처신을 너무나도 모가 나게 하였으므로 유성룡(柳成龍)이 평소에 그를 미워하였다. 정유년(1597년)에 유성룡이 탄핵을 받았는데, 논자(論者)들이 뇌물을 탐했다고 무고하면서 미오(郿塢-후한(後漢) 말기 음란 흉포하기로 유명한 동탁(董卓)을 가리킴. 동탁이 미(郿)땅에 오(塢)를 쌓아 이름을 만세오(萬歲塢)라 하고 그 속에 금은 보화를 저장한 데서 연유한 말이다)에 비유하자, 유성룡이 탄식하기를, “지난번에 논자들이 계함(季涵)을 가차없이 공격하면서도 탐비(貪鄙-욕심이 많고 야비함)로는 지목하지 않았는데, 어찌 나의 처신이 저 계함에 미치지 못했단 말인가.” 하였다. 언젠가 정철이 최영경(崔永慶)을 죽인 일에 대해 말하자 종사관(從事官) 서성(徐渻)이 그렇지 않다고 극력 변론하니, 유성룡이 말하기를, “계함이 항상 떳떳하게 스스로 이 일을 해명하였으나, 나는 최영경의 죽음이 정철 때문이었다고 마음속으로 여겨왔기 때문에 귀로 그 말을 듣고도 답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건대, 그 사람은 입이 곧아 자기가 한 일은 반드시 숨기지 않았을 인물이다. 그러니 그대의 말이 옳지 않겠는가.” 하였다.

신흠(申欽)은 논하기를, “정철은 평소 지닌 풍조(風調-시가 따위의 가락)가 쇄락(灑落-개운하고 깨끗함)하고 자성(資性-타고난 성품)이 청랑(淸朗-맑고 명랑함)하며, 집에 있을 때에는 효제(孝悌)하고 조정에 벼슬할 때에는 결백하였으니, 마땅히 옛사람에게서나 찾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하였다. 한때 정철을 논한 자가 간적(奸賊-간악한 적)으로 칭하자, 풍문이 퍼져 모든 사람이 뇌동하여 정철을 정말 소인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평소 정철을 아는 자들도 여론에 현혹되어 그가 정말 소인인가 하고 의심하는 자까지 있었다. 그러나 자고로 소인이라 칭할 때에는 세 가지 경우가 있으니, 첫째는 고총(固寵-변함이 없이 총애를 받음)이요, 둘째는 첨미(諂媚-아첨하며 아양을 떪)요, 셋째는 부회(附會-이치(理致)에 닿지 않는 것을 억지로 끌어대어 이치(理致)에 맞게 하는 것)인 것이다.

정철이 적소(謫所-귀양지)로부터 소환되어 언젠가 빈청(賓廳)에 앉아 있을 때 참판(參判) 구사맹(具思孟)과 지중추(知中樞) 신잡(申磼)이 동좌(같이 앉음)했었는데, 별감(別監) 한 사람이 안에서 주찬(酒饌)을 가지고 나와 말을 꾸며 이야기하기를, “안에서 모든 재상들이 함께 먹으라고 하신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기실은 구사맹과 신잡이 모두 궁금(宮禁-궁궐)과 인척관계에 있기 때문에 귀인(貴人)이 다른 손님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사사로이 보내온 것이었다. 이성중(李誠中)이 그 자리에 있다가 소반과 젓가락을 가져와 음식을 정승 앞에 나눠 드리도록 하자, 정철이 말하기를, “이 음식은 구 참판과 신 지사가 먹어야 마땅하니, 대신이 참여해선 안 된다.” 하고는 곧 일어나 나가버렸다. 그 말이 대내에 들리자 정철이 그 이튿날 체찰사(體察使)로 나가게 되었으니, 이는 그가 첨미·고총을 하지 않았다는 밝은 증거라 하겠다. 소인이 과연 그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이발(李潑)과 이산해(李山海)는 한때 권세를 장악했던 자들로서 정철은 그들의 친구였으니, 정철의 재주로서 조금만 비위를 맞추었더라면 어찌 낭패를 당하여 곤고하게 되어 종신토록 굶주린 신세가 되기까지야 했겠는가. 그런데도 그는 한 번도 기꺼이 굽히려 하지 않았다. 이는 바로 그가 부회(附會)하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인 것이다. 소인이 과연 그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그는 단지 결백성이 지나쳐 의심이 많고 용서하는 마음이 적어 일을 처리해 나가는 지혜가 없었으니, 이것이 그의 평생 단점이었다.

만일 그를 강호 산림의 사이에 두었더라면 잘 처신했을 것인데, 지위가 삼사(三司-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의 끝까지 오르고 몸이 장상(將相-장수와 재상)을 겸하였으니, 그에 맞는 벼슬이 아니었다. 정철은 중년 이후로 주색에 병들어 자신을 충분히 단속하지 못한 데다가 탐사(貪邪-탐욕스럽고 사악함)한 사람을 미워하여 술이 취하면 곧 면전에서 꾸짖으면서 권귀(權貴-권세와 부)를 가리지 않았다. 편벽된 의논을 극력 고집하면서 믿는 것은 척리(戚里-임금의 친척)의 진부한 사람이었고, 왕명을 받아 역옥(逆獄-역적에 대한 옥사)을 다스릴 때 당색(黨色)의 원수를 많이 체포하였으니, 그가 한세상의 공격 대상이 된 것은 족히 괴이할 게 없다. 그의 처신은 정말 지혜롭지 못했다 하겠다.

그러나 권간(權奸-권력과 세력을 가진 간사한 신하)과 적신(賊臣-반역하거나 불충한 신하)으로 지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정철은 조정에서 앉은 자리가 미처 따스해질 겨를도 없이 정승이 된 지는 겨우 1년 남짓하였다. 밝은 임금이 스스로 팔병(八柄-임금이 신하들을 거느리는 여덟 가지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이산해·유성룡과 세 사람이 아울러 정승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산해가 특히 임금의 은총을 입고 있었으니, 정철이 어떻게 권세를 부릴 여지가 있었겠는가. 이것은 변론할 것도 없이 자명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