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정치의 맥락에서 탕평군주 정조 읽기


머리말


* 탕평정치는 봉건정치에서 근대정치로 이행하는 과도기

* 역사학계는 탕평정치가 사대부가 주도하는 붕당정치의 폐해를 극복하고 군주권이 강회되는 새로운 체제 개혁을 모색한 것에 대해서는 대체로 합의했다고 판단


1. 근래의 새로운 시각들

 1) 인간 정조에 대한 관심의 증대


* 2009년 정조-심환지 어찰첩의 발굴

* 정병설의 <권력과 인간>


 2) 임오화변을 둘러싼 논란



 3) 임오화변과 당쟁


* 정조의 의리탕평에서 핵심은 영조가 확립하였고 정조도 계승의 전제로 인정했던 임오의리, 곧 영조의 임오의리를 수정하는 것이었다.

* 정조가 영조의 임오의리를 수정하는데 따르는 정치적 갈등과 부담을 무릅쓰고서 정조의 임오의리를 확립하려 했던 이유는 신하들의 당쟁이 군주 또는 저군의 계승권에 간여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2. 정조대 연구의 주요시각에 대한 비판적 재검토

 1) 탕평은 붕당정치 혹은 당쟁의 부정인가


* 영조-정조대 정치사의 객관적 서술을 방해하는 원인은 당쟁 그 자체가 아니라 영조-정조대 당파의 분화 양상과 당쟁의 쟁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연구자들에게 있다.

* 대체로 노론 동당+소론 준론+남인 청론은 보호론자, 노론 남당+소론 완론 탕평파는 위동론에 가담

* 노론 북당에서도 홍봉한계는 보호론, 홍인한은 위동론으로 분화

* 정조는 붕당의 현실을 부정하거나 인위적으로 타파하려 하지 않았다

* 정조의 탕평책은 여러 붕당들과 공존할 수 있었고, 견제와 균형의 원리로 작동하였던 조선후기 특유의 붕당정치 질서도 존중

* 세도정치 시기에는 도리어 붕당의 활동이 지극히 위축되었다.

* 황극의 붕괴 상황이었고, 정치는 실종되었다.

* 세도정치는 황극의 붕괴나 부진을 배경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 고종이 정조를 이상적 모델로 계승하고자 했던 것은 조선후기의 군주제 전통에서는 당연한 선택


 2) 정조는 일군만민의 대동사뢰를 지향한 절대군주였는가

* 정조가 각종 개혁사업을 추진한 것은 사실이나, 그 지향은 평등과 균분을 내용으로 하는 대동의 이상이 아니라 18세기 조선의 현실에서 도출된 지극히 현실적인 개혁

* 개혁은 추구하되 그 방식은 대단히 점진적

* 정조에게는 실력있는 사대부가 정치의 파트너였지, 중인 이하 일반 백성들은 여전히 애민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 영조-정조 탕평군주는 재정 운용 주체를 일원화하여 집권력을 높이기 위해 세원의 파악과 징수체제를 단순한 방향으로 정비하는 균부-균역 정책을 취하고 관권을 빙자한 사상인 침탐을 방지하여 좀더 자유로운 상업체계를 구축하려 한 것은 맞지만....<예기>에서 말하는 대동사회는 아님

* 탕평군주의 지향을 혁명의 유토피아 차원에서 설명하는 것은 논리 비약

* 주자가 말하는 均은 각기 그 분수를 얻는 것으로 풀이....

* 조선후기 부세정책에서 관철되었던 대동의 원칙이란 상하와 빈부의 현실적 차이를 전제하면서 대소의 부역을 함께 내는 것(대동), 구체적으로 토지의 대소나 호구의 다과 등 동일한 원리에 의하여 부과되는 세법을 의미할 뿐.

* 정조는 양반 사대부나 유력 농상공인으로 대표되는 다양한 중상층의 존재와 역할을 인정하면서 그들이 주어진 조건에서 공정하게 제 실력을 발휘하도록 유도했을 뿐

* 탕평의 세계를 일군만민의 대동사회 지향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3) 의리탕평과 주자학, 그리고 국가-사회개혁론

* 정조의 학문을 반주자학이라는 의미의 실학으로 설명하는 시각이 전형적

* 정조는 주자와 송시열의 학문을 정학으로 존숭한 철저한 주자학자이며, 공적 의미를 확립해야만 탕평을 구현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의리탕평론자

* 정조의 임오의리는 영조의 임오의리를 전제로 하되 생부의 공덕을 추가한 것이므로, 엄밀하게 말하면 영조의 임오의리를 수정한 것

* 정조는 정조의 임오의리에 입각하여 사도세자를 국왕으로 추숭하는 추왕을 궁극의 목표로 삼았다

* 정조는 상왕의 공간을 단순히 왕권 강화의 표상으로서가 아니라, 조선 국가에 필요한 제도개혁의 시험장으로 만들고 그 성과를 전국으로 확산시키고자 하였다

* 정조의 정치, 경제, 사회에 걸친 탕평의 실험은 주자학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 이를 실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맺음말


* 갈등 조정의 원리 차이....


● 출처 : 최성환, <역사비평> 115, 2016.


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