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왕산성의 기억들

사편(史片)/조선시대 2009. 8. 26. 22:54 Posted by 아현(我峴)
화왕산성의 기억들

1. 역사적 사실

 역사적 사실과 역사적 의미는 따로 떼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역사적 사실 속에서 그 의미를 찾아내기 때문에 역사적 의미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사실이 규명되어야 합니다. 어느정도 해석에서는 차이가 나타날 수 있지만, 역사적 사실은 사실(史實)에 근거해야 한다는 의미는 크게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는 것이 현재의 현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1597년에 명군과 일본군의 협상이 결렬되자 일본군이 다시 조선에 쳐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1597년 7월 곽재우는 창녕에 있는 화왕산성 주변의 고을 피난민을 이끌고 산성으로 들어갔습니다. 가토 기요마사의 대군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곽재우 군대는 공격을 받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전체를 놓고 보면 화왕산성에서 있었던 일은 하나의 조그마한 사건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흘러 18세기에 이르자 <화왕산성동고록(火旺山城同苦錄)>이라는 기록이 간행되었습니다. 이 지역에서 화왕산성에 대한 기억을 이 책을 통해 공유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역사적 사실과 이후의 기억에 대한 기억의 차이가 발생하게 됩니다. <화왕산성동고록(火旺山城同苦錄)>은 얼마나 정확하게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을까. 그리고 18세기 사람들은 화왕산성을 어떻게 기억하고자 했을까. 이번 강의의 목표는 여기에 있습니다.

2. 사실(事實)

 1597년 7월 21일 현풍의 석문산성을 신축하던 방어사 곽재우가 인근 고을의 사람들을 이끌고 창녕의 화왕산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른바 초토화작전이라는 것인데, 마을을 전부 비워두고 산성에서 백성들을 지켜내자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울산을 점령한 가토 기요마사 부대가 내륙으로 들어온다는 정보를 듣고 그 길목에 있던 지역을 비워두고자 했던 것입니다. 곽재우가 석문산성을 버리고 화왕산성을 선택한 것은 이 지역이 지리적으로 좋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충지이자 요새인 화왕산성에 들어온 백성들은 곽재우를 대장으로 얻어 모두 기뻐했다고 합니다.
 얼마 되지 않아 일본군의 유격대가 들이닥치더니 가토의 본대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일본군의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산성 아래에 도착한 일본군은 성을 쳐다보더니 그냥 지나쳤습니다. 곽재우의 입장에서는 수비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지만, 일본군이 오히려 산성을 무모하게 공격하지 않았다는 것이 합리적인 설명으로 보입니다. 오랜 경험에서 얻은 일본군의 방법이었죠.
 가토의 입장에서 화왕산성을 무리하게 공격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의 목표는 하루 빨리 남원을 치는 것이었지, 화왕산성에서 지쳐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가토는 결국 순조롭게 진군하여 안음의 황석산성을 격파하고 남원으로 진군할 수 있었습니다. 8월 29일이 되어서야 곽재우는 화왕산성을 떠났습니다. 계모상(繼母喪)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화왕산성의 수비는 그 이후에도 쭉 이어졌지만 특별한 전투상황에 대한 자료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상이 자료에 보이는 임진왜란 시기 화왕산성에 대한 사실입니다.

3. <화왕입성동고록>

 곽재우가 화왕산성을 방어한지 137년 후인 1734년에 <창의록(倡義錄)>이 간행됩니다. 이 책에 <화왕산성동고록>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제목 그대로 1597년에 화왕산성에 들어가 함께 고생한 사람들의 명단입니다. <동고록>에는 총 699명의 인물이 기록되어 있는데, 방어사 곽재우가 가장 먼저 나오고 그와 함께한 19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인근 수령의 이름이 보입니다.
 그 다음에는 윤탁 이하 680여명의 구체적인 임무가 없는 인사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양반으로 자발적으로 의병에 있는 사람이라 볼 수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당대 명사도 보입니다. 당시 경상도 도체찰사 이원익, 경상좌도수사 이운용, 일본군과 협상을 하던 장희춘이 있습니다. 또한 홍문관에 있던 한준겸, 이황의 문인인 조목, 유성룡도 있습니다. 유성룡은 영의정이었고 조목은 당시 74세의 노쇠로 예안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과연 화왕산성에서 함께 고생한 인물일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산성수비에 참여했다면 어느 문집에 그러한 기록이 보일텐데, 그러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조현명(趙顯命)이 쓴 <창의록> 서문에는 “체찰사 이하의 몇몇 공들은 다만 한때 왕래했을 뿐이다. 그런데 여기에 함께 기록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바로 잡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럼 왜 이렇게 무리하게 기록이 되었을까. 인물의 지역분포를 우선 보면 경상도가 총 32개 고을로 경상도 이외지역은 16개 지역에 불과하며 안동이 115명, 경주 63명, 흥해 41명, 예안 36명, 상주 32명 등으로 대부분 경상도 지역에서 경상도 인물이 거의 대부분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화왕산성과 멀리 떨어진 안동지역의 인물이 가장 많이 기록된 것은 산성 방어와 무관한 기록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화왕산성의 주역인 곽재우의 문집인 <망우집(忘憂集)>에 <동고록>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것은 곽재우 본인과는 무관하며 다른 사람에 의해서 작성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동고록>의 원본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에서도 작성의 의도가 다른데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문제는 시각을 조금 넓혀서 살펴볼 필요가 있을 듯 합니다. 당시의 정국에서는 모두 당쟁이 일정하게 반영되고 표출됩니다. 영남 남인들의 의사도 이러한 방식으로 제기되는데 영남남인들은 1724년과 1736년에 집단상소를 통해 그러한 의사를 표시하였고 1734년이 되면 영남 유생을 대표하여 박윤광의 주도로 <창의록>이 간행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의록>안에 수록된 <동고록>은 이러한 속성을 일정하게 반영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1734년에 임진왜란과 관련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조헌의 칠백의사에 어제(御製) 제문(祭文)이 내려지고 제사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조헌의 순절은 노론의 정신적 뿌리로 노론 단합의 표상이었기 때문에 노론 우위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는 영남 남인을 긴장하게 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결국 <동고록>은 영남 남인의 단합을 이루고 노론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동고록>은 재생산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동고록>의 명단을 보고 행장과 비문, 연보들이 만들어지고 인용됩니다. <동고록>의 사실들이 마치 임진왜란의 실상을 보여준다는 인식 아래 전혀 관계없는 인물의 후손들은 자신의 조상들이 화왕산성의 전투에 참여했다는 것을 <동고록>을 인용하여 자기 문집에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4. 사회적 기억

화왕산성의 전투가 있은 지 325년이 지나고 <동고록>이 간행된지 188년이 지난 1922년에 곽재우의 후손 곽진곤은 문중 사람들과 임진왜란의 고사를 이야기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 할아버지와 여러 현인들이 죽음을 맹세하고 군대를 일으켜 나라를 구했다. 그들의 우의는 백세(百世)가 지나도 다질 만한 일인데, 겨우 십세(十世) 만에 서로 잊어서야 되겠는가.

그리고 명단에 기록된 991명의 후손들의 명단을 널리 수집하고 3년만에 수천명의 명단을 모아 옛 명단 아래에 용사세강록(龍蛇世講錄)이라는 이름으로 출판했다고 합니다.

처음에 화왕산성의 수비는 전투 한번 치루지 않은 피난에 불과했는데, 성을 무사히 지켜냈다는 입장에서는 성공적이지만, 내세울만한 공적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묻혀버렸습니다. 그런데 <동고록>의 출판과 더불이 집단기억이 만들어졌습니다. 재탄생한 화왕산성의 기억은 이후 188년이 지나 다시 꽃을 피우게 되는데 900여인의 명단이 수천명으로 확대 재생산되었고 기억을 세습화하게 됩니다.

화왕산성의 기억이 사실과 다르다고 하며 그것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후 사람들이 화왕산성을 어떻게 기억하게 되었고 그 기저에는 어떠한 이면이 있었는지를 찾아내는 일도 또한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 됩니다. 그것은 곧 현재에 이르러 우리들의 기억의 일부가 됩니다. 만약 사료가 없게 된다면 우리는 역사를 기억에만 의지하게 된다면 이러한 사실들의 잘못된 이해나 오인은 더더욱 커지게 될 것입니다.

출처 : 하영휘, "화왕산성의 기억", <임진왜란-동아시아 삼국전쟁>, 휴머니스트,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