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도 지역은 조선초기까지 상당히 이질적인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세종대 두만강 유역의 육진이 조선의 영역 안에 들어오면서 서서히 조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지만 조선후기까지 여진인과 자주 접촉을 하였고 오히려 남쪽과의 교류는 지형상 어려웠다. 그러므로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사람들과는 낯설게 느껴지는 곳이 바로 함경도 육진일 것이다.

조선후기 지방의 모습은 많은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그러나 대부분 경기 이남지역을 대상으로 하였고 황해도나 평안도, 함경도에 대한 모습은 거의 확인할 수 없었다. 현재 그 지역이 북한이기에 직접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료 또한 확보할 수 없어서 연구의 성과는 더디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직접적인 자료 이외에 지방관으로 파견된 사람들의 기행문을 통해서 어느정도의 실상은 엿볼 수 있다.

17세기 후반 만들어진 함경도 읍지인 <북관지>, 정조 1년 경흥부사를 지낸 홍양호의 <삭방풍토기>나 <북새기략>, 순조 8년에 북평사로 재직했던 홍의영의 <북관기사>나, 순조 8년에 북평사였던 박내겸의 <북막일기> 등을 통해서 우리는 함경도 육진 지역의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다. 물론 이들은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시각을 고려하면서 함경도 백성들의 삶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북관지>에 따르면 “바람이 매섭고 일찍 추워진다(風氣猛烈旱寒)”고 표현했다. 육진 지역의 기후를 아주 잘 표현한 말이라 할 수 있다. 위에 소개한 기행문에는 이러한 표현들이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홍양호는 “경흥은 3월에도 꽃이 피지 않고 8월이면 눈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강한 겨울 바람은 상당한 고통이었다. 상대적으로 온난한 남부출신의 지방관들에게 이 지역의 추위는 충격 그 자체였다. 눈이 많이 내리는 것은 빠지지 않은 강한 인상이었다. 8월이면 서리와 눈이 오고 10월이면 폭설이 내렸다. 박내겸은 8월에 무산에서 눈이 내리는 것을 보고 “8월의 눈을 듣기는 했으나 어찌 직접 보리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八月之雪 曾聞其語而豈意目睹耶)”라고 했다.

겨울이 길고 추운 곳이어서 경작 가능 기간도 다른 지역에 비해 짧았다. 무논이 없었으며 벼는 조금만 심었다. 논이 있긴 했으나 주민들이 잘 취급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조가 더 기름졌다고 한다. 주민들의 복식은 식량보다 더 열악했다. 면화가 생산되지 않아서 남자들은 개가죽을 걸쳤고 여자들은 누더기 옷을 입었다. 겨울에는 쇠가죽으로 만든 다로기(多路岐)라는 긴 버선을 신었다. 세포(細布)라는 유명한 제품이 함경도에서 생산되었지만, 그들은 만들기만 할 뿐 입지는 못했다.

함경도 기행문에서 자주 나오는 교통수단으로는 수레가 있었다. 수레는 다른지역과 큰 차이가 나는 수단이었으므로 자주 언급이 되었다. 기행문과 읍지를 종합해 보면 함경도 수레에는 세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장곡거(長轂車)로 함경지역에 주로 있으며 바퀴의 높이가 사람의 키 만했다. 다른 하나는 소차(小車)로 작은 바퀴에 소 한 마리가 끌고가는 수레였으며 마지막은 발고(跋高)로 소나 말이 끄는 바퀴가 없는 것이었다. 발고의 경우 함경도 특징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었는데 활처럼 휜 긴 나무 두 개를 이용한 썰매 형태의 수레였다. 눈 위를 달리는 수레라고 생각하면 된다.

함경도 주민들의 세금 부담은 다른 지역에 비하여 적었다. 그것은 농경사정이 너무 열악한 지역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함경도 주민들에게 큰 부담은 세금이라기 보다는 군역에 있었다. 조선후기 다른 지역의 군병이 납포군 위주였던데 함경도 육진의 군병인 실병력이었다. 납포란 실제 군대를 가지 않고 그 대신 면포로 군역을 면하는 것이었는데, 함경도 육진의 군병들은 면포로 군대를 면제 받지 못하고 군대 생활을 해야 했다. 이와 더불어 다른 지역과는 달리 강변의 파수, 파발, 봉수에 군역이 부과되었다. 이 중에서 가장 힘든 군역은 강변의 파수였다. 강변의 파수는 현재의 국경수비대와 같은 개념으로 두만강에 10리 간격으로 설치되었고 파수 한 곳에 장교 1인, 군졸 2인이 배치되어 5일 간격으로 교대했다.

자연지형과 기후가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더욱 낯설게 되는 경우는 바로 언어였다. 현재 제주도의 경우에서 그런 것을 쉽게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당시 남방에서 살았던 지방관이 함경도로 부임했을 때 가장 먼저 이질감을 느끼는 것은 언어였다. 기행문을 작성한 지방관들에게 자신이 외부인임을 확실하게 느끼게 해주는 명확한 구실이었다. 육진지역은 오랫동안 여진인 거주하던 지역이었고 조선이 이 지역을 확보한 이후에도 여진인들은 여전히 이 지역에서 살고 있었으며 두만강 건너편 여진인과 지속적인 교류를 함으로써 여진어의 흔적을 많이 남기게 되었다. 지역의 명칭에 많이 남아 있으며(경흥의 “서수라”, “아오지”, “무이”같은 경우) 행정편제나 명칭도 달랐다. 군현의 면을 사(社)라 하고, 백성은 향도(鄕徒), 무당은 사(師), 사노(私奴)는 토노(土奴)라 했으며, 문(門)은 오라(烏喇), 산봉우리는 장(嶂), 높은 언덕(언덕을 한자로 차용하면 言德이 된다)은 덕(德) 고양이는 호양(虎樣), 새잡는 그물은 탄(彈)이라 했다.

출처 : 강석화, “기행문에 보이는 19세기 함경도 육진 지역의 생활상”, <문화로 보는 한국사 2 - 물질문화와 농민들의 삶>, 태학사,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