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점령군은 처음에 해방군으로 인식되어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미군과 남한의 백성들은 곧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미군에 대한 인식은 해방군에서 점령군으로 바뀌었을 뿐 아니라 '정의의 사도'에서 '야만적 수탈자'로 그 인식이 전환되었다. 왜 그랬을까. 점령군으로 남한에 진주했던 노먼 프리슈(Norman Frisch)의 언급은 이러한 사실을 확인해준다.

"미군 진주지녁 내의 조선 사림이라는 것은 미국 내의 흑인과 흡사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일본인을 도와 조선을 망친 반역자였거나 조선국민을 도와 일본인과 싸운 지하운동자거나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저 조선인은 'gook'(국-미국인이 조선인을 얖보아 부르는 말)일 따름이다." - <독립신문> 1947년 1월 17일자.

프리슈의 말대로라면 모두는 아니겠지만 대부분의 미군은 친일민족반역자와 항일민족해방투사라는 차이에 관심도 없었고 구별할 능력도 없었던 것이다. 또한 프리슈는 보행자들을 향해 차를 질주하여 바로 앞에서 정차한 후에 욕을 하는 미 공군 소령의 모습을 보고 개탄했다. 미 공군 장교가 그와 같이 한 이유는 다름아닌 조선인이 자신을 보며 웃었다는 것이다. 다음은 공군 장교의 말이다.

"놈들이 우리를 미워하니까 미워하지요. 놈들은 우리를 보고 싱글싱글 웃겠지요. 우리는 여기 와서 물질적으로 금전적으로 놈들을 도와주려고 진력을 하는데 놈들은 우리를 보고 웃는 게 아니요" - <독립신문> 1947년 1월 18일자.

이 미군 장교의 인식에는 피점령자 조선인은 단지 의사소통이 필요없는 경멸적 존재들에 불과했다.

열악한 위생조건도 미군들에게는 혐오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이는 대부분의 미군들이 동양과 서양, 인종적 우열함과 저열함으로 조선인을 평가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 점령군 사령과 하지는 진주후에 장병들에게 동양의 보건 위생 여건이 최상의 공중보건 수준을 유지하는 미국과 차이가 있으니 망각하지 말것을 강조했고 남한에서도 개별장병이 각자 위생 유지에 만전을 기할 것을 주문했다.

그는 특히 한국의 매춘여성의 성병감염율이 매우 높다는 사실과 요식업소의 위생이 열악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러한 곳은 미군들이 공간적으로 분리되어야 할 경계대상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피점령자를 인종적, 문명적으로 낮고 거리를 두어야 할 대상으로 간주했던 미군이 남한 사회를 불안과 공포가 휩싸인 곳으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군 스스로 경계를 삼았기 때문에 경계대상이 된 남한은 결국 불안덩어리 혹은 공포 그 자체가 되었다.

특히 불시가 된 것은 서울과 지방 가릴 것 없이 미군이 진주한 곳은 강도와 여성들에 대한 폭력 문제가 야기되었던 것이다. 부산에서 전통 결혼식에 초대를 받은 두 미군이 혼례를 마친 신부와의 동침을 요구하다고 조선인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피살자는 다름아닌 두 미군을 초청한 사람이었다. 초청한 한국인은 두 미군에게 한국의 문화를 설명했으나 통할 리 없었다. 피점령자를 육체적 지배의 대상으로 여기는 점령군에게 피점령자가 문화적 차이를 이해할 것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점령자의 분노를 사는 일이었다.

1946년 8월 미군이 경복궁 내에 미군의 막사를 신축하는 일은 문화보호자로서 미군의 위상을 크게 실추시켰으며 고조된 인종적 문화적 갈등은 1947년 1월 발생한 사건을 계기로 폭발했다. 1월 7일 목포발 서울행 호남선에서 미군들이 한 여성을 윤간하고 금품을 약탈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좌우 정치세력 모두 이념적 차이에 상관없이 이 사건에 대한 민족적 공분을 표출했다. 미군이 "거만한 우월감으로 군림했다"고 폭로한 것이다. 결국 미군은 "문명인의 가면을 쓴 비문명인"으로 규정되었다.

이러한 인식을 바꾸고자 미군정에서 설치한 기관이 주한미공보원(OCI)이다. 이 기관은 다음과 같은 임무가 있었다. 1. 남한 대중에게 미 점령당국에게 우호적인 태로를 갖도록 만드는 것, 2. 대중에게 미국의 대외정책과 생활양식에 대해 이해를 확장시키는 것, 3. 미군의 점령통치가 종식된 뒤에도 남한에서 미국에 대한 우호적인 인식이 지속될 수 있도록 대중의 인식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아마도 위 임무 중 미국이 가장 신경쓴 것은 역시 3번째였다.

지금의 미국에 대한 인식을 생각해본다면 역시 3번째에 따른 인식이 유효적절한게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린 여전히 미국을 좋은 나라, 최고의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다. 오히려 한국인의 잘못된 인식으로 미국에 대한 누가 끼치지 않을까 고민하기도 한다. 그러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일이 있었다. 호남선 윤간 사건을 접한 어느 인시가 "여자들의 풍기"나 "혼혈아" 문제를 언급하며 민족 구성원으로서 이들의 자격을 논했다고 한다. 특히 미군과 관계를 맺는 여성은 민족의 수치를 야기하는 반민족적 본재로 부각되기도 했는데, 이러한 인식은 지금도 우리에게도 볼 수 있다. 현실이 부끄러울 뿐이다.

출처 : 허은, "미 점령군 통치하 '문명과 야만'의 교차", <한국근현대사연구> 42, 2007.

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