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유민의 망명지

사편(史片)/고대사 2009. 7. 9. 23:02 Posted by 아현(我峴)
한반도의 역사를 둘러보면 이산(離散)의 시대라 할만한 시기가 두번 있었다고 한다. 한번은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시기이고 다른 한번은 조선의 멸망이었다. 근대시대 조선의 멸망에 따른 한민족 사람들의 이산은 보통 비극이라고 보는데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징용이나 징병과 같이 비자발적인 요소들이 상당수 존재하였고 자발적인 이민도 결국 먹고살기 위한 하나의 자구책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결국 비자발적인 요인들에 의해서 이산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고대의 이산을 살펴보면 근대와는 시각이 조금 다르다. 고대의 이산은 7세기 무렵에 집중이 되고 그것은 신라와 당나라에 의한 백제와 고구려의 대대적인 침략에 의해서 발생했다. 소위 말해 "신라에 의한 한반도 대부분의 통일을 수반한 비극"이라고 할 수 있으나 우린 신라에 의한 통일을 비극이라고 하지 않고 통일완수라고 한다. 삼국통일은 그런 의미에서 나온 말이니 통일과 비극이 동일시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하겠다.

고구려도 마찬가지 이지만, 멸망한 백제의 사람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졌다. 첫째 부류는 멸망 직후 포로로 당나라에 끌려간 1만2천명 정도의 지배층들이다. 고구려의 경우에는 적어도 15만명정도가 당나라로 끌려갔다고 하니 비교가 되지 않지만, 육지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숫자이다. 개인적인 궁금증을 더한다면 아마 신라로 끌려간 백제인도 있겠지만, 그러한 의견을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물론 백제 전체가 신라의 영토가 되었으니 없을 수도 있겠다.) 두번째 부류는 멸명한 백제에 그대로 남아 있던 사람들이다. 아무리 옛 백제의 지배층이었다 하더라도 멸망한 백제의 신라체제 아래에서는 더이상 지배층일 수 없었다. 그들도 나름대로 신라에 순응해야 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굴욕을 당하게 마련이었을 것이다. 아마 대다수가 그러했을 듯 하다. 마지막 부류는 신라에 편입되기를 거부하고 망명을 한 사람들인데, 망명의 기착지는 일본이었다. 오늘 하고자 하는 본론은 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멸망 당시 백제인들은 신라와 일본 중 어느쪽에 더 친근해 보였을까. 통일은 운운하고 민족을 이야기 한다면 신라와 백제는 가까운 나라였음에 분명하지만, 아쉽게도 백제인들은 일본인과 더 친근했다. 백제의 문화가 많이 분포하던 곳은 신라가 아니라 일본이었음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그러한 생각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지금도 미국을 생각한다면 한인이 많이 사는 한인타운이 그렇지 않은 백인지역보다 더 편한 것은 어찌할까.

여러 기록들을 보면 멸명 당시 백제의 귀족들은 일본군 장수와 많은 논의 기사들이 보인다. 그러므로 백제의 유민들이 최후의 선택으로 일본 망명을 생각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백제인들이 보기에 혈맹(血盟)으로서의 일본은 자신들의 신분을 유지해주고 백제의 자존심을 살려줄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과연 신라인들이 생각하는 백제인들은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것이고, 백제인들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럼 일본인들은 왜 패망한 백제의 왕족들 혹은 귀족들을 예우해주었을까가 궁금해진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은 일본의 귀족사회에서 백제 계통의 가문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 있을 것이다. 이미 이와 관련된 사실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서 소개가 된 사실이라 굳이 언급은 하지 않겠다.(그렇다고 그것을 가지고 민족주의적으로 접근할 필요는 없겠다. 일본 내에서는 여전히 백제계 후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은 이것들을 적절히 이용한다. 그러나 뒤짚어 생각하면 한국 안에서 백제계 후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민족주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백제와 신라는 동족이고 왜국은 외국이자 이민족이지만, 실제 백제인들은 적국인 신라보다 왜국과 훨씬 친근했고 정치적으로도 왜국과 가까움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근대적인 시각으로 민족을 이야기 하고 국경 및 영토를 운운하는 것은 고대를 바라보는 인식이 아닐 수 있다. 그러므로 백제의 역사는 한국사로도 이야기 될 수 있지만, 동시에 일본사에도 이야기 될 수 있으며 오히려 이를 자랑스럽게 여겨서 일본사를 백제사 내지는 나아가 한국사로 둔갑시키는 일은 지양해야 할 듯 하다.

출처 : 박노자, "백제 유민, 망명지로 왜를 택하다", <한겨레21> 제767호, 2007년 7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