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 해석하기

사편(史片)/고대사 2015. 8. 4. 00:59 Posted by 아현(我峴)

김유신 해석하기

 

김유신을 제대로 이해하면 한국고대사를 바라보는 눈이 조금은 높아진다. 왜냐하면 김유신은 여러 나라에 걸쳐 등장하는 희귀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전기 <삼국사기>를 지인 김부식도 알았던 것일까. <삼국사기> 열전에 등장하는 60여 인물 중에서 김유신이 1번인 것은 우연일까. 사마천이 지은 <사기>에서 열전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인물은 그 유명한 백이와 숙제 이야기이다. 그것의 상징성은 굳이 다시 언급하지 않아도 너무 잘 알려져 있다. 유학에서 가장 먼저 강조하는 의와 예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백이와 숙제는 그것을 몸소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사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배신의 상징 인물들이다. 이와 같은 관점을 가지고 <삼국사기>를 본다면 어떨까. <삼국사기> 열전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개소문, 견훤, 궁예이다. 이들은 모두 반역의 무리들이므로 사마천이 열전에서 강조했던 유학에서 바라본 충신 ----> 배신으로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그럼 김유신은 충신인가.

분명한 한가지 사실은 김부식이 봤을때 김유신은 충신이었다. 그래서 열전 1번에 놓았던 것이고, 분량도 60여인 중 압도적으로 가장 많다. 그런데 특이한 사실이 있다. 김유신 열전 첫 문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金庾信 王京人也" 번역하면 김유신은 왕경인이다. 여기서 왕경인이란 왕경에 사는 사람이고 왕경은 수도를 가리키므로 요즘 말하면 서울사람, 당시로 가리키면 경주사람이 된다. 즉 김유신은 경주사람이다. 그런데 다음 구절은 그와 좀 다르다. "十二世祖首露 不知何許人也" 번역하면 12대조가 수로인데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수로는 우리가 다 아는 금관가야를 건국한 김수로를 가리킨다. 모른다는 말은 김수로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김유신은 김수로의 후손이니 경주사람이 아니라 가야후손이 된다. 뒤에 김유신의 조상에 대한 내력이 기록되어 있는데 모두 가야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김부식은 그를 경주사람이라고 썼다. 왜 그랬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김부식이 보기에 김유신은 경주사람, 즉 신라인이어야 했다. 왜냐하면 충신으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열전 1번 인물은 충신의 표상이 자리해야 하는 위치인데 그 자리가 가야인이면 어떻게 될까. 결국 신라의 입장에서도 김부식의 입장에서도 김유신은 분명 가야왕족의 후손이지만 신라인이어야 했고, 신라인으로 받아들어졌다. 그러나 신라인이 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왕경인은 더더욱 어려웠다.

신라의 신분제도는 골품제로 알려져 있다. 골품이란 골제와 두품제를 합쳐서 부르는 말로 골(骨) 신분과 두품(頭品) 신분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골에는 성골과 진골, 품에는 1두품에서 6두품이 있었다. 성골과 진골은 모두 왕족을 가리킨다. 성골은 왕의 직계를, 진골은 왕족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신라 태초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증왕대 이후 중국식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일종의 왕족 신분제로 정착된 것으로 판단된다. 두품제는 왕족이 아닌 지배층을 가리킨다. 6두품이 최고 지배층이며 1두품은 최하 지배층이다. 그러므로 1두품도 지배층에 해당한다. 절대 농민층이 아니다. 농민층은 아예 골품제에 포함되지 않았다. 농민층을 굳이 신분계층에 넣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니다. 신라 지배층에게 중요한 것은 왕족이나 왕족이 아니냐의 구분이지 지배층이냐 피지배층이냐가 중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피지배층은 너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럼 누가 진골이 되고 누가 두품을 받는다. 진골은 모두 왕족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당연히 대부분 김씨가 된다. 지증왕대 이후 중국식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쓴 성씨가 바로 김씨였다. 초기 성씨는 왕족만 가능했다. 그러므로 진골은 모두 김씨가 된다. 신라 하대 이후 왕권다툼에 등장하는 진골이 모두 김씨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때 김씨는 경주김씨로 왕족의 후손이다. 두품은 경주에 사는 지배층을 가리킨다. 당연히 왕경인에만 해당한다. 지방 지배층은 두품을 받지 못했다. 그것은 수도인 경주에 사는 지배층으로부터 신라의 지배층으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신라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다른 나라를 정복하면 다른 나라의 지배층을 신라에서는 지배층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골품은 당연히 왕경인만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 다시 김유신에게로 돌아가보자. 김유신의 신분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신라인이 아니면서 신라의 골품을 받은 몇 안되는 외국인이었다. 그는 6두품도 아닌 진골이었다. 경주에 사는 왕족만 받을 수 있는 진골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당시 김유신 세력과 능력은 신라 지배층에게 너무나 절실한 원동력이었다. 7세기가 되어도 신라는 백제나 고구려에 비해 국력이 너무 약했다. 외교도 신라의 손을 들어주지 못했다. 남북으로 연결된 돌궐-고구려-백제-일본의 라인은 신라를 완벽하게 고립시켰다. 가야를 병합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미비했다. 유일한 돌파구는 당나라 뿐이었다. 결국 외교적으로는 당나라와 군사적으로는 김유신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신라는 속국의 왕족이었던 김유신에게 신라 왕족의 신분을 부여함으로써 그를 대우해 줄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그가 왕경인이고 그가 진골이 된 이유였다.

가야 입장에서 보면 어떻까. 그는 배신자일까. 문제는 현재 한국인이면 어느 누구도 가야인의 입장에서 김유신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끔 백제나 고구려의 입장에서 김유신을 바라보고 배신자의 낙인을 찍는 경우도 있지만, 배신자라고 해석하려면 차라리 가야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가야인을 대신할 한국인은 아무도 없다. 현재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김유신이 김춘추와 더불어 당나라를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는 사실 뿐이다. 해석은 자유이지만, 그의 행동이 과연 정의로운 것이었는지는 다시 생각해 볼 문제다. 과연 역사를 정의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단지 사실이 있을 뿐이고 결국 그 사실을 판단하는 것은 현재 내가 서 있는 위치가 어떠한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