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04반)

건양대강의/2014.2학기 2014. 11. 2. 23:42 Posted by 아현(我峴)

보고서

한국사새로읽기 04반

 

● 다음은 조선 전기에 살았던 유자광이라는 인물의 일대기를 기록한 글이다. 아래의 글을 읽고 유자광이 어떠한 인물인지 자료에 근거하여 역사적으로 평가하시오.

● 분량은 자유

● 제출 기한은 11월 24일까지.

● 제출 방법 : 인쇄하여 수업시간에 제출.

● 아래의 글은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46593&cid=49618&categoryId=49618 에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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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광()은 부윤() 유규()의 얼자()이다. 날쌔고 힘이 세었으며 높은 곳에 오르기를 원숭이처럼 하였다. 어려서부터 무뢰자()가 되어 장기 바둑으로 재물을 다투었고 밤에 길을 떠돌면서 여자를 만나면 끌고 가서 간음하였다. 유규는 그 출신이 미천하고 또 방종하고 패려함이 이와 같으므로 자주 매를 가하면서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다. 처음에 갑사()에 소속되어 건춘문()을 수직하였는데 소()를 올려 자신을 추천하니 세조()가 그 사람됨을 장하게 여기고 발탁하여 썼다. 또 무자년(, 1468년 세조 14년)에 고변(, 남이() 등이 모반한다고 무고한 사건)한 공으로 훈봉()을 받아 1품의 품계로 차례를 뛰어 올랐다. 늘 호협지사()라 스스로 일컬었으나 천성이 음험해서 남을 해하였고 재능이며 명성과 은총()이 자기보다 뛰어난 자가 있으면 반드시 얽어 빠뜨렸으며 한명회()의 가문이 귀하고 창성하는 것을 질시하였다. 또 성종()이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기 좋아함을 보고 기론()으로 임금이 좋아하는 바에 맞추려고 상소하여 한명회에게 발호()할 뜻이 있다고 하였으나 임금은 죄를 내리지 않았다. 뒤에 임사홍()ㆍ박효원() 등과 더불어 현석규()를 배척하려다가 실패하여 동래()로 유배되었고 곧 풀리어 돌아왔으나 임금은 그가 정치를 어지럽히는 사람으로 알고 다만 훈봉을 회복시켜 주었을 뿐 일을 다스리는 소임을 주지 않았다.

유자광은 은택을 바라는 일에 못하는 짓이 없었으나 마침내는 뜻을 이루지 못하여 마음은 늘 불만이었다. 그런데 이극돈() 형제가 당시 권세를 잡고 있음을 보고서 자기의 일을 충분히 성취시킬 것으로 알고, 곧 몸을 기울여 빌붙어 깊이 서로 사귀었다. 일찍이 함양군()에 놀러갔다가 시()를 지어 고을 수령에게 부탁하여 판에 새겨 벽에다 걸게 하였는데 김종직()이 이 고을 수령이 되어 말하기를, “되잖은 유자광이 감히 현판()을 하였단 말이냐?” 하고, 곧 명하여 떼어서 불태우게 하였다. 유자광은 분하고 한스럽게 여겨 이를 갈았으나 김종직의 총애와 예우가 한창 높았으므로 도리어 스스로 그와 사귀려 하였고, 졸()하게 되어서는 만사()를 짓고 곡을 하였으며, 심지어 왕통()과 한유()에게 비교하기까지 하였다. 김일손()은 일찍이 김종직에게 수업하였다. 헌납()이 되자 말 다하기를 좋아하되 권귀()라 해서 피하는 일이 없었다. 이극돈()과 성준()이 알력을 벌여 장차 우ㆍ이()의 당1)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상소하여 논하니 이극돈이 크게 화를 내었다. 그러다가 사국()이 열리게 되자 이극돈은 당상관()이 되었다. 김일손의 사초()에 자신의 악행()이 매우 자세히 씌어 있고 또 세조조()의 일이 씌어 있음을 보고 이극돈은 이를 인연해서 자신의 원한을 보복하려 하였다. 하루는 좌우의 사람들을 물리치고 총재관() 어세겸()에게 말하기를, “김일손()이 선왕()을 무훼()하였습니다. 신자()로서 이러한 일을 보고 임금께 알리지 않는 것이 옳겠습니까? 나의 생각에는 그 사초를 봉해 아뢰어 임금의 처치를 듣는다면 우리들에게는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어세겸은 놀라워하며 말이 없었다. 조금 지난 뒤 유자광()에게 상의하니 유자광은 팔을 걷어 올리며 말하기를, “이 일이 어찌 머뭇거릴 일입니까?” 하고, 곧장 노사신()ㆍ윤필상()ㆍ한치형()에게 가서 보고 먼저 세조에게 받은 은혜를 잊을 수 없다고 말하여 그 마음을 흔들어 놓은 뒤에 그 일을 교묘히 말하였다. (그것은) 바로 노사신ㆍ윤필상은 세조의 총신()이고, 한치형은 궁가()와 족척()이 되므로 반드시 자기의 뜻에 따를 것임을 짐작하고 3인에게 말한 것이었는데 정말로 모두가 따랐다. 그리하여 함께 차비문() 안으로 나가 도승지() 신수근()을 불러 귀엣말을 한참 한 뒤에 아뢰었다.

처음에 신수근이 승지()가 되었을 때에 대간()과 시종()이 외척()이 권세를 부릴 조짐이라며 강력히 그 불가함을 간하였다. 신수근은 이를 한하여 늘 사람에게 말하기를, “조정은 곧 문신()들의 손바닥 안 물건인가? 우리들이 무슨 일을 하겠는가?” 하였다. 여기에 이르러 뭇 원망이 번갈아 모이게 되었고, 임금 또한 시기함이 많고 횡포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더욱 문사()를 미워하여 말하기를, “명예를 구하여 윗사람을 능멸하고 나로 하여금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자는 모두 이 선비들이다.” 하며, 늘 답답하게 여겨 즐거워하지 않았고, 한 번 쾌하게 시행하고 싶었으나 감히 손을 대지 못하였는데 유자광 등의 아룀을 듣고 “국가에 충성하면 장려와 대우를 특히 후하게 할 것이다.” 하고, 남빈청()에서 수인()을 국문하라 명하고 내수(, 내관) 김자원()으로 하여금 명의 출납을 맡게 하되 나머지는 참여해 듣지 못하게 하였다. 유자광은 옥사()를 자임하고 나서 늘 김자원이 전교()를 전달할 때에는 반드시 그 앞으로 나아가 짐짓 공근()한 태도를 보였으며 그 전교 내용이 엄중하고 각박할 경우에는 임금의 뜻이 제 뜻에 맞는다 생각하고 다시 부복()하여 감사해하는 것처럼 하였다. 듣기를 마치고 물러나서는 기쁜 듯이 얼굴에 자부()하는 빛을 띠었고 좌중에서 큰소리로 말하기를, “오늘은 바로 조정을 변혁하는 때이다. 모름지기 이와 같은 큰 처치()가 있어야지 심상하게 다스리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들의 도당()이 매우 많아 변()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방호()를 엄밀히 해야 하겠습니다.” 하고, 곧 금위병()을 추려 궁문 안을 지키며 차단하고 출입을 엄하게 하였으며 수인이 국문에 나아갈 때에도 군사로 하여금 좌우에서 에워싸게 하였고 옥으로 돌아갈 때에도 그렇게 하였다. 그러나 유자광은 옥사의 다룸이 점점 이완되어 뜻과 같이 아니 될 것을 우려하여 밤낮으로 얽어맬 바를 도모하였다. 하루는 소매에서 한 권의 책을 꺼내놓았는데 바로 김종직()의 문집()이었다. 그 가운데 ≪조의제문()≫과 술주시()를 지적하여 여러 추관()에게 두루 보이며 말하기를, “이는 모두 세조()를 가리켜 지은 것이다. 김일손()의 악행은 모두 김종직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다.” 하고, 스스로 주석()을 하며 문구()마다 해석하여 임금으로 하여금 쉽게 이해하도록 하고 이어 아뢰기를, “김종직이 우리 세조를 헐뜯었으니 그 부도()한 죄는 마땅히 대역()으로 논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가 지은 글을 유전()시켜서는 옳지 않으니 모두 불태워야 합니다.” 하니, 임금은 이에 따랐다. 그러므로 김종직의 시문()을 소장한 자는 2일 안에 각자가 자진해서 바치도록 하여 빈청()의 앞뜰에서 불태우고 제도 관사()에 제()한 현판()은 소재처로 하여금 떼어 없애게 하였다. 성종()이 일찍이 김종직에게 명하여 ≪환취정기()≫를 짓게 하여 인중방에 걸었는데 아울러 철거하기를 청원하였으니 함양()에서의 원한을 갚기 위한 것이었다.

유자광은 임금이 화가 났을 때를 노려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우고 윤필상() 등에게 눈짓하며 말하기를, “이 사람의 악행은 무릇 신자()로서 한 하늘을 같이 못할 원수이니 그 당여()를 찾아내어 일체 제거해야만 조정이 청명()해 질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남은 무리가 다시 일어나 오래 못 가서 화란이 일어날 것이다.” 하니, 좌우에선 잠자코 있었으나 노사신()이 손을 저어 저지하며 말하기를, “무령(, 유자광)이 어찌 이런 말을 하는데 이르렀단 말인가? 당고()의 일을 듣지 못했는가? 금하는 법망이 날로 준엄해져 사류()로 하여금 발을 붙일 수 없게 되자 한()나라는 따라서 망하였다. 청론()은 마땅히 조정에 있어야 하니 청론이 없어지는 것은 국가의 복이 아니다. 무령이 어찌 그릇된 말을 하는가?” 하니, 유자광은 기가 좀 꺾이었다. 그러나 옥사에 연루되어 체포된 자는 반드시 끝까지 다스리려고 하니 노사신은 또 저지하며 말하기를, “당초에 우리들이 아뢴 바는 사사()를 위해서일 뿐이다. 그런데 지금 지엽()까지 관련시켜 사사에 관계없는 자의 구속이 날로 많아지니 우리들의 본뜻이 아니지 않는가?” 하니, 유자광은 기뻐하지 않았다. 죄를 결정하는 날이 되어 노사신의 논의가 같지 않자 유자광은 불쾌한 안색을 드러내며 힐문하고, 각각 그 뜻으로 두 가지를 아뢰니 임금은 유자광의 논의에 따랐다.

이날 낮은 어두 침침하였고 비가 퍼붓듯이 내렸으며 큰바람이 동남쪽에서 일어나 나무를 쓰러뜨리고 모래를 날렸으며 성안 사람들이 쓰러지거나 무서워 다리를 떨지 않는 이가 없었지만 유자광은 의기양양해서 집으로 돌아갔다. 이로부터 위엄은 중외에 행해져 조정에서는 독사처럼 보아 감히 그 뜻을 거스르려 하지 못하였고, 유림()들은 기가 죽어 발을 동동거리거나 곁눈질을 하였다. 그리고 학사()는 쓸쓸하게도 두어 달 사이에 (글을) 읽거나 외우는 소리가 없었고 부형들은 서로 경계하며 말하기를, “학문은 과거에 응할 수 있으면 그쳐야지 많이 해서 무엇하겠느냐?” 하였다. 유자광은 뜻대로 되었다고 생각하고 더는 돌아보거나 거리낌이 없자 이익을 탐하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무리들이 붙쫓아 그 문에 가득하니 식견이 있는 자가 가만히 탄식하기를, “무술년(, 1498년 연산군 4년)의 옥사(, 임사홍과 유자광을 유배시킨 일)는 정류()가 사당()을 공격한 일이었으나 무오년(, 1478년 성종 9년)의 옥사는 사당이 정류를 함몰시킨 일이다. 20년 사이에 한 차례 이기고 한 차례 지면서 치()와 난()도 따랐다.” 하였다. 대체로 군자()가 형()을 집행함에는 늘 너그럽고 동정심이 많은 데서 실수하고 소인이 원한을 갚을 때에는 반드시 잔인하게 멸망시켜야 그만둔다. 무술 옥사 때의 군자로 하여금 그 형률()을 모두 적용하게 하였더라면 어찌 오늘의 화가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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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