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림파가문의 경제적 기반

사편(史片)/조선시대 2009. 5. 19. 00:32 Posted by 아현(我峴)
사림파가문의 경제적 기반

이번 강의는 조선중기 사림파의 등장에 따른 그 경제적 배경은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별로 이야기 되는 조선시대의 정치 이면에는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근거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정치적 경제적 기반이었죠. 정치적으로는 조선의 건국에 앞장선 이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훈구와 사림을 나누기도 합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훈구파를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대지주로, 사림파를 적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중소지주로 나타냅니다. 그러나 조선중기 대표적인 사림이었던 이황 가문의 경제적 기반을 통해서 이와 같은 전제가 사실과 다르다는 사실을 보고자 합니다. 아울러 이황과 같은 사림파들이 중기 이후 어떻게 성장하고 훈구파를 밀어내고 조선의 정치를 주도하게 되는 계기를 가지게 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황의 가계는 고려말에 진보현(眞寶縣)의 이족(吏族-향리가문)에서 사족(士族-양반가문)으로 성장하였습니다. 토성이족(土姓吏族)으로서의 재지적(在地的) 기반에서 출발한 이자수(李子脩)가 공민왕 12년에 2등공신으로 인정되면서 그 댓가로 전지(田地) 50결과 노비(奴婢) 5구(口-노비를 세는 단위는 名이 아니라 동물을 세는 단위와 같은 口라고 하였습니다)를 받으면서부터 가문의 세력이 흥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부터 후손이 번창하여 관직에 나아가는 사람이 늘어나게 되었고, 이황 대에 오면서 예안지방의 대표적인 사족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즉 이황의 성장은 이황의 특출한 지적 능력도 있었지만, 조상의 후광도 크다는 것이겠죠.

이황 가문의 경제적 기반에 관한 구체적인 자료는 현존하고 있는 그의 손자녀에게 재산을 나누어주면서 작성된 화회문기(和會文記-상속문서)에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이 문기를 분석함으로써 이황 가문의 경제적 기반의 형성 과정과 재산의 축적배경도 아울러 추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문기를 노비와 토지로 나누어 보면 노비의 수는 노(奴-남자노비)가 203구, 비(婢-여자노비)는 164구로 총 367구에 이르렀습니다. 토지를 보면 답(畓-논)이 77석락(石落-1,166마지기)이고 전(田-밭)이 119석락(石落-1,787마지기)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황 가문이 소유하고 있는 노비수와 토지수가 엄청나게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재산은 대개 조부(祖父)로부터 물려받은 것과 외가(外家)와 처가(妻家)로부터 받은 것 등등 다양하였습니다. 또한 예안일대와 봉화에 산재해 있던 것은 대개 친가(親家) 쪽에서 받은 것이고 멀리 영천이나 의령에서 받은 것들은 외가(外家)나 처가(妻家)로부터 상속된 것이었습니다.

이황 가문이 16세기 말에 와서 그처럼 많은 재산을 가지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조상전래의 재산에 기초를 두면서 외가와 처가로부터 받은 재산이 계속 쌓이게 되어 증식된 것이었습니다. 한편 일정한 토지와 노비를 가진 사족들은 토지와 노비를 지속적으로 사들임으로써 재산을 증가시켜 나아갔습니다.

물론 터를 잘 고르게 된 원인도 한몫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야 재산을 계속 증식시켜나갈 수 있을 테니까요. 이황의 조부인 이계양이 예안에 터를 잡기 시작하면서부터 그의 가계는 이 지역에 대규모의 농장을 경영하게 됩니다. 당시 이 농장은 사족들이 복거(卜居-터를 잡다)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모두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천과 계곡을 따라 양쪽에 논과 밭이 전개되어 있었고, 쉽게 물을 끌어들임으로써 가뭄도 적게 영향을 받았으며 주위에 개간이 가능한 토지들이 많아 노동력만 있으면 논과 밭을 쉽게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조상전래의 노비를 보유하면서 토지를 개간해나아가고 그 수입으로 다시 재산을 축점하여 토지를 얻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니 이와 같은 양의 재산을 확보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황은 스스로 식리(息利-금전)를 멀리하고자 한다고 하였지만 그의 경제적 기반은 이미 공고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에게 와서 이미 재산은 증식되어 있었던 상태였죠. 제사를 받들고(奉祭祀), 손님을 접대하는 것(接賓客)을 주된 의무로 하는 양반들에게 소요되는 경제적 부담은 이황에게 큰 어려움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도산서당을 위시하여 여러 건물(주택, 정사, 정사, 재암 등)이 이 당시에 축조되었습니다. 한편 퇴계집에 나오는 여러 비명(碑銘)들도 보면 모두 이황 대에 집중된 위선사업(爲先事業)이었던 것이죠. 이러한 일에 엄청난 부담이 든다는 당시의 실정을 감안할 때 그만한 경제적 기반이 토대가 되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출처 : 이수건, <영남사림파의 형성>, 영남대학교출판부, 1979.

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