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3년 서울의 쌀폭동과 미곡유통

사편(史片)/조선시대 2009. 5. 19. 00:30 Posted by 아현(我峴)
1833년 서울의 쌀폭동과 미곡유통

1832년은 전국적인 흉년이었고 특히 서울의 미곡 유통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경기지역의 흉년이 심했다. 서울의 민심은 그 이전의 흉년보다 심하여 동요가 있었다. 황해도 안악군에서 올라온 포수들이 작당하여 서울에 상납 중인 대동미를 중간에서 약탈하는 일이 발생하자 조정을 긴장시키기도 했다.

정부에서는 서울의 미곡 공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영남과 호남의 관찰사에게 영을 내려 방곡령을 해제하도록 촉구하였다. 이러한 조처로 2월 10일과 15일 사이에 쌀값이 조금 떨어졌다. 그렇게 되자 한강변 미곡 상인들이 이익을 많이 얻지 못할까 염려하여 농간을 부리기 시작했다. 서울의 여객주인들을 지휘하여 곡식을 감추어 두고 팔지 못하게 했다. 서울의 싸전(쌀가게) 상인도 이에 호응하여 값을 올렸다. 그 결과 2월 20일부터 30일까지 한 석의 곡식도 도성 안으로 반입되지 못했다. 이러한 일이 계속 되자 3월 6일에는 이전에 비해 쌀값이 2배로 올랐다. 3월 8일에는 싸전이 일제 거래가 중지되어 문을 닫아 버렸다.

1833년 3월 8일 싸전이 일제히 문을 닫자 서울의 미곡 구매자들은 흥분하여 싸전 상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쌀폭동이었다. 사건의 시작은 “쌀값이 급등한 데서 시전 상인이 농간을 부렸기 때문”이라고 하여 싸전을 부수고 불을 지르면서였다.

쌀폭동은 우발적으로 시작되었지만, 그 과정은 상당히 조직적이었다. 호위군관 김광헌은 무리를 불러 싸전을 부수고 문권을 불사르고 가게를 허물어 버렸다. 그 과정에서 신분을 사칭하기도 했다. 치밀함은 또 다른 주모자로 지목되었던 고억철에게서도 보였다. 그는 무리를 선동하여 성 안팎의 싸전을 파괴했을 뿐 아니라 한강변에 미곡을 쌓아놓은 집도 불태웠다. 그는 한강변 상인도 이번 사태의 주범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홍진길의 경우에는 요령있게 공격대상을 지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염집의 피해는 최소였던 것이다.

쌀폭동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들은 정부는 전례없는 일에 크게 당황하였고 매우 신속하게 사태를 처리했다. 우선 사태를 수습하지 못한 좌우 포도대장을 파직했다. 비변사에서는 체포한 자들을 효수하자고 강경론을 폈으나 순조는 억울한 죽음이 있을 수 있다 하여 제지했다. 병판의 조사결과 7명이 주범인 것으로 판단하여 효수형에 처했고, 11명은 종범(從犯)으로 원악지(遠惡地)에 충군시켰으며 27명은 태형에 7명은 처벌없이 풀어주었다.

사건 주동자 외에 쌀폭동의 원인제공자, 즉 강상(江商)과 미전상인(米廛商人)에 대한 처벌 문제도 논의되었다. 그러나 조선정부는 서울의 원활한 미곡유통과 흉년 구제책이라는 명분 하에 강상(江商)의 곡물거래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려 하였고 이윤을 노리는 유통질서를 문란케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상인 2명만 쌀폭동을 초래한 주범이라 지목하여 사형에 처하고 나머지는 방면했던 것이다.

그럼 원인제공자인 이들 상인의 매점매석 행위에 대해서 미온적이었을까. 18세기 이후가 되면 권세가의 상업투자가 빈번해지고 있었다. 그 중에서 미곡 공급의 주도권을 장악한 여객주인권에 대한 권세가의 투자가 많았다. 그리고 정조대 주교사의 설치 이후 경강상인과 권력실세의 접촉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러한 정치적 방향이 서울의 미곡 유통에도 반영되고 있었다.

18세기 이후 정부의 미곡유통에 대한 근본적인 사고방식은 경제자유주의라고 부를 만한 것이었다. 상인이 이윤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입장이었다. 다만 이윤추구에 정도가 있어야 한다고 하여 지나친 독점을 단속할 뿐이었고 흉년에 서울의 미곡이 부족할 때 외방으로 곡물이 반출되는 것은 막았다.

그런데 18세기 후반 정부가 비축해둔 곡물이 줄어들면서 정부는 시장 개입에 한계를 보이고 서울의 미곡 수급은 점차 상인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결국 19세기에 들어서면 독점상업에 대한 단속도 약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명분으로 독점상업에 대한 단속이 오히려 원활한 미곡유통을 방해한다는 논리가 성립되었다. 겉으로는 상업의 불간섭 원칙을 내세워 모든 상인에게 객관적인 입장을 취한 듯하지만, 실제로는 대상인의 미곡 독점을 보장해주고 막대한 이윤을 취하는 정책으로 전환되었다.

18세기에 시전상인과 경쟁하여 경제적 능력을 무기로 우위를 점한 사상(私商)들이 19세기에 들어와 관력과 결탁하여 이윤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경영의 합리화, 다각화 등 경제적인 방법의 우위를 통해 경쟁자를 압도하는 방식보다 권력과의 결탁이라는 쉬운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19세기는 외견상 상업의 발전이 부진한 듯 한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결국 정책의 실질적인 피해자는 서울의 미곡 수요자들이었던 것이다.

출처 : 이욱, “19세기 서울의 미곡유통구조와 쌀폭동”, <동방학지> 136, 2006.'

아현